글 / 김금호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사무국장


삶과 죽음 그리고 세대를 가르는 경계, 망우리.

젊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지명이고 30대 중 후반, 그러니까 80년대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공동묘지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망우리. 망우리는 그렇게 삶과 죽음을 나누는 장소이자 특정 세대를 가르는 경계이기도 하다. 근심을 잊는다는 뜻의 망우(忘憂)라는 지명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연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양에 새롭게 도읍을 세운 태조가 지금의 건원릉(구리시 인창동 소재)에 자신의 묘를 정하고 환궁하던 중, 이 고갯마루에서 이제야 오랜 근심을 잊겠다(忘憂)’고 말한 것이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여부를 떠나, 태조의 건원릉이 위치한 동구릉과 직선거리로 2km 남짓한 거리에 위치해 있어 망우리는 세인들이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1914년 일제가 단행한 행정구역 변경 이전만 하더라도 망우리(忘憂里)는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忘憂里面)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하사한 지명 그리고 인근의 동구릉과의 위치 등을 고려할 때 행정구역의 격이 그만큼 높았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일제는 양주군 구지면(九旨面)와 망우리면(忘憂里面)자를 따서 구리(九里)로 병합시킨다. 그리고 망우리면(忘憂里面)의 잔여 지역을 리() 단위인 현재의 망우리(忘憂里)로 귀속한다. 사실상 행정구역의 지위에서 강등당한 셈이다. 망우리의 수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일제는 경성의 묘지가 부족하자 1933년 망우리를 공동묘지로 조성하게 된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과 동구릉이 조성된 산줄기에 평민의 공동묘지를 만든 의도를 짐작 못할 바 아니다.

 

품위를 잃은 장소와 가치가 떨어진 인간의 공존

그 후, 정확히 40년 동안 공동묘지로 매장이 이루어졌던 망우리. 이제 사람들의 기억 속에 품위 있던 장소는 죽음과 어둠의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당시 대학생들이 미팅에서 망우리에 산다고 말하면 퇴짜 맞을 정도였다. 특히 60년대 70년대 산업화의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망우리는 원해서도 가고 원치 않아도 갈 수 있는 슬프고도 두려운 공간이었다.

오죽하면 동대문에서 망우리로 가는 시내버스 여차장이 청량리중량교망우리가요~” 라고 속사포 랩으로 행선지를 외치면, 사람들에게 환청처럼 다른 외침으로 들리기도 했다.

차라리죽으려고망우리가요~'

품위를 잃은 장소와 가치가 떨어진 인간이 시대를 공존하며 무수한 사연과 애환을 만들어 낸 곳. 망우리 인문학 강의는 차라리 죽으려 망우리행 버스에 몸을 싣는 것이다. 코트 주머니에 소주병을 꽂은 채 몸을 휘청거리며 지난시절 누군가 버스에 올랐던 것처럼, 현재의 나를 그곳에 묻기도 하고 삶을 물으러 떠나는 길이다.

 

망우리 인문학 강의를 열다.

4월 망우리 인문학 강의는 강남시문학회 회원을 비롯해 27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30일 진행됐다. 인문학강의는 망우리 근현대 역사인물의 묘역을 순례하며 그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세상과 사람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되짚어 보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결정적인 삶의 순간에 나를 대입해 시간과 공간 그리고 나와 그의 벽을 허무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다. 인문학 강의코스는 주로 이인성(화가)-도산 안창호(독립운동가)-태허 유상규(의사/독립운동가)-아사카와 다쿠미(총독부 산림청 직원/민예학자)-혜관 오긍선(의사/사회사업가)-소파 방정환(아동문학가)-최신복(아동문학가)-위창 오세창(서화가)-만해 한용운(독립운동가)-죽산 조봉암(독립운동가/정치가)-남파 박찬익(독립운동가)-최학송(문학인)-계영묵(문학인)-대향 이중섭(화가)-박인환(시인) 순으로 진행된다. 본 코스는 서울시가 현재 조성하고 있는 인문학길의 코스와 일치한다. 하지만 매번 동일한 코스와 인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와 참여자들의 관심도에 따라 코스 일부가 추가되거나 변경되기도 한다. 강의 일정은 상반기 5월과 6월 마지막주 토요일에 강의를 열게 된다.

인문학 강의의 강사는 망우리 근현대사 인물 소개서인 그와 나 사이를 걷다의 저자이자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리분과위원장인 김영식 작가가 진행한다.

             

그는 부산 출생이지만 4살 때 상경하여 망우리공원과 가까운 중랑구 중화동과 상봉동에서 대학 때까지 살았다. 2006년부터 일주일에 한 번꼴로 현재까지 500회 이상 망우리공원을 오르내리며 무덤의 비명과 근현대 인물들의 삶을 조명하였다.

 

조선이 낳은 비운의 천재화가 이인성

4월 망우리 인문학 강의에서 가장 주목받은 인물 중 한 사람이 바로 화가 이인성이다. 김영식 작가의 소개에 따르면, 화가 이인성은 1930년대 마라톤 영웅 손기정과 무용가 최승희만큼 유명한 존재였던 모양이다. 당시 어른들은 그림 그리는 아이에게 커서 이인성 될거냐?”라고 농담을 건넬 정도였다고 한다. 1912년 대구에서 출생한 이인성은 1928(17)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서 촌락의 풍경이라는 작품으로 특선을 차지하며 주목을 받게 된다. ‘세계아동예술전람회는 소파 방정환등이 운영하는 개벽사가 주최한 것인데, 어떤 면에서는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 이인성의 천재성을 발굴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타계한 지 20년 가까이 차이가 남에도, 방정환과 이인성은 모두 망우리공원에 잠들면서 사후까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화가를 환쟁이라고 천대하던 시절, 1929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계기로 이인성은 집안의 반대를 극복하고 당당히 소년 천재화가로 주목받는다. 그 후 2년에 걸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과 특선을 수상하게 되고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1932년 이인성 화가가 19세 되던 해,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일본 화가들을 제치고 입선을 거머쥔다. 이 일을 두고 김영식 작가는 김연아가 피겨 스케이팅에서 올림픽 금매달을 차지한 것과 같은 역사적 사건이라고 언급하였다.

일본 유학시절 만난 부인 김옥순은 학력이 일천한 이인성과 집안의 반대로 어렵게 결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1924년 부인이 결핵으로 짧은 생을 마치면서 실의에 빠진 이인성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된다. 걸핏하면 폭음과 주사(酒邪)를 일삼았던 것이다. 두 번째 결혼마저 실패하고 세 번째 결혼까지 치루지만, 1950년 어이없는 사고로 죽음을 당한다. 김영식 작가는 그 당시의 상황을 눈앞에 그려내듯 설명했다.

6·25 전쟁으로 어수선한 상황에 경찰의 불심검문이 수시로 이뤄지는 분위기였겠죠. 화가 이인성이 술에 취한 채, 거리를 걷다가 행색을 수상하게 여긴 경찰관에게 붙들린 거예요. 그런데 이인성이 술도 마셨겠다, 경찰관에게 다짜고짜 조선의 천재 이인성을 몰라보느냐.”고 호통을 친 겁니다. 주눅이든 경찰관이 이인성을 놔주고 경찰서로 돌아와 도대체 이인성이 누구냐?”고 물었겠죠. 그러자 주변에서 그 동네에 술주정뱅이 환쟁이가 있지...”라는 말을 들으니, 한낱 환쟁이에게 당한 일이 화가 난겁니다. 그래서 총을 소지하고 이인성의 집으로 찾아가 말다툼과 몸싸움을 벌이다가 실탄이 발사된 거죠. 결국 그 일로 이인성이 숨지고 맙니다. 그의 나이 38살이었습니다.

황당하기까지 한 조선의 천재 이인성의 죽음에 이르러 참가자들이 하는 탄식과 실소 그리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깊은 상실의 시대를 살다 간 시인 박인환

4월 인문학 강의에서 관심을 끌었던 다른 인물이 있다면, 코스의 마지막 묘역에서 만나는 시인 박인환이다. 아마도 단체로 참가신청을 하신 분들이 시문학회 회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화가 이중섭의 묘역에서 강의를 마치고 망우리 관리사무소 쪽으로 이동하다 보면, 오른편에 박인환의 연보비가 나타난다. 비석에는 그의 시 목마와 숙녀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비석의 맞은편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자 김영식 작가가 스마트폰에 저장된 노래를 틀었다. 박인희가 부른 세월이 가면이었다. 이 노래 가사도 명동의 선술집에서 박인환이 즉흥적으로 시를 짓고 이진섭이 곡을 붙여 그 자리에서 나애심이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진다.)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시()였다. 박인환의 묘 앞, 사각형의 묘비에도 시인 박인환의 묘라 적혀있고 그 밑으로 세월이 가면의 첫 문장이 새겨져 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이 시를 짓기 하루 전, 박인환은 첫 사랑이 묻혀 있는 망우리 묘지에 다녀갔다고 김영식 작가는 설명한다. 평소 술을 좋아했던 그였기에, 코트 주머니에 소주병을 꽂은 채 몸을 휘청거리며 망우리행 버스에 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유작시 세월이 가면을 완성한 사흘 후인 1956320, 만취한 채 집에 들어와 잠을 자다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31. 세탁소에 맡긴 봄 코트는 돈이 없어 찾지 못했고, 겨울 코트를 그대로 입은 채였다. 부음을 듣고 맨 먼저 달려온 친구 송지영이 박인환의 뜬 눈을 감겨주었다.

박인환의 또 다른 시 목마와 숙녀에 대한 김영식 작가의 설명이 이어진다. “도대체 목마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그리고 우연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된 고대 무덤의 부장품인 목마를 본 경험담 그리고 순명효 황후 장례행렬 사진 속에서 종이로 만든 백마를 통해 죽음의 동반자임을 설명했다. 고급진 문장과 달달한 시어(詩語)의 느낌과 달리 1950년대 전쟁의 비극과 죽음, 이별, 허무 등의 시대적 고뇌를 박인환의 탁월한 언어적 감수성을 통해 시로 형상화된 것이다.

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시에 사용된 박인환의 세련된 수사와 평소 그의 행색 등으로 인해 남성을 대표하는 속물로 문단의 비난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전쟁의 참혹한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현실인식이 강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덧붙였다.

그러한 이유에서 일까?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에 대한 오해는 필자의 고교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목마와 숙녀는 시화전의 단골 주제였고 교실마다 한 점씩 걸리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박인환이 작사한 세월이 가면을 부른 가수 박인희의 시낭송 음반도 유행이었다. 모국어지만 낭독하면 혀끝에서 감미롭게 굴려지는 시어(詩語)들이 마치 유창한 외국어를 구사하는 듯 했다. 알 듯 모를 듯 낭만적인 언어들은 지적 허영심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잠자리 뿔테안경을 쓴 친구가 같은 반에 늘 한 명쯤 있기 마련이다. 까칠하기로 유명한 국어선생님 수업시간에 이 친구가 목마와 숙녀의 시낭송을 자원했다. 목소리가 좋았던 친구는 자신의 낭송에 점점 도취돼 가는 듯 했다. 그렇게 시낭송이 끝났다. 선생님의 얼굴에 비웃음 혹은 경멸의 빛이 스쳐 지났다.

이 시가 그렇게 낭만적으로 읽히든?”

 

상실의 두 빛깔

4월 망우리 인문학 강의에서 관심을 가진 두 인물은 공교롭게도 '상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인성은 1942년 아내 김순옥의 사망으로 실의에 빠진다. 절망의 시간을 술로 보내던 화가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준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 최고의 화가라는 타이틀이었을 것이다. 술로 인해 타인과의 불화가 이어지고 괴팍한 성격에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수록, ‘조선의 천재 이인성이라는 변할 수 없는 사실에 집착했을 법하다. 오로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건 '영광스러운 과거' 밖에 없었던 가난한 현실이, 그를 비극적 운명으로 몰고가지 않았을까.

목마와 숙녀에서 시인 박인환은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라면서 2차 대전 후, 허무주의에 시달리다가 템즈강에 투신 자살한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상실을 추모한다. 그리고 6·25 전쟁 이후의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는’ 현실 속 상실감을 토로한다. 어쩌면 시인 박인환의 상실감은 뿌리 깊은 것인지도 모른다. 앞서 밝힌 것처럼 이미 20대에 첫사랑을 잃었고, 그 역시 세상과 작별하기 나흘 전, 망우리에 묻힌 첫사랑을 찾는다. 그녀의 묘를 찾은 다음날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가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처럼 보여지지 않는다.  '목마와 숙녀' 역시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인해, 시인 박인환이 지병처럼 앓고 있던 세상에 대한 상실감을 버지니아 울프의 죽음에 투영시킨 건 아닐까.   

인문학 강의의 마지막 코스인 박인환 시인의 묘역에 앉아 그와 이인성이 겪은 상실감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게 나라면?’이라 자문해 본다. 나역시 그들보다 뛰어난 인내와 처세를 발휘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30대에 요절한 두 천재들의 삶을 무어라 평가할 수 있을까? 하지만 누구도 타인의 삶을 평가할 자격은 없다. 살아있는 사람이 목마를 타고 떠난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럴 수 있겠다공감하며 그들의 삶에 고개 끄덕여 주는 것밖에.


자료참조 '그와 나 사이를 걷다' (김영식 저/호메로스/2015)

5월, 6월 망우리공원 인문학강의 신청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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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국내셔널트러스트 한국내셔널트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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