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조선의 수도로 500여년을 지냈고, 대한제국의 황도를 거쳐 일제강점의 수난과 동족상잔의 비극 그리고 보릿고개를 극복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한 때 치욕스러운 시기도 있었지만, 긴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자랑스러운 발자취와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해도 하등의 지나침이 없다. 그러한 서울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서울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도성이 전조후시(前朝後市) 좌묘우사(左廟右社 - 궁궐을 중심으로 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직, 남쪽에 관청, 북쪽에 시장을 배치)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도성 안에서 경복궁과 육조거리(1395년 태조의 명으로 조성된 거리로, 광화문 좌우에 관아가 배치되었다) 그리고 종묘와 사직단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 뿐일까?

 

하늘에서 바라본 서울전경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서울,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잘 알아야만 할 것 같은 서울이지만,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한양이 만들어졌을 당시 서울의 영역과 조영(造營)에 담긴 뜻을 제대로 알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는 서울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높음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역사문화도시인 서울에는 가치가 높은 수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한양 조성 당시에 만들어진 성곽과 궁궐을 비롯하여 지난 600여년 동안 서울이 만들어온 문화유산은 유형에서 무형, 동산에서 부동산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고, 이들의 가치에 의해 서울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평가되어왔다. 그렇다면 서울 자체의 가치에 의해서 평가될 수는 없는 것일까?


유사 이래 도시는 삶의 근간이 되어 왔고, 삶의 근간으로서의 도시의 중요성은 근대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자체를 문화유산으로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지구상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많은 도시가 있지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도시의 대부분은 역사문화유산을 담고 있는 그릇으로서의 가치가 평가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문화유산으로서의 도시 자체가 평가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살아 쉼쉬는 도시에서는 더욱 그렇다.


우선 서울을 문화유산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서울을 역성혁명을 통해 수립된 조선의 수도라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왕조의 계보가 달라졌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불교를 국가이데올로기로 하는 나라에서 유교를 국가이데올로기로 하는 나라로의 전환이라는 틀에서 조선을 바라보면,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변화가 생긴다.

유교이데올로기와 도성의 공간구조 (밑그림제작: 이상구)


나라를 세운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새로운 국가이데올로기를 백성 모두가 공유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지는 일일 것이다. 지배자의 이데올로기를 백성들이 함께한다면 그 이상의 튼튼한 기반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교이데올로기의 틀을 확고하게 세우기 위해 조선의 사대부들은 무슨 고민을 했을까? 행정시스템을 유교체제로 바꾸고 행정의 수반을 유교사상에 충실한 사람으로 앉히면 그들의 꿈이 이루어질까? 적어도 조선을 열었던 사대부들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듯 하다. 그들은 백성 모두의 삶이 유교사상으로 충만할 때 유교국가로서 조선의 틀이 완성된다고 생각했고, 그 고민의 해법을 도시에서 찾았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유교의 기본 덕목이라고 할 수 있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도시공간속에 펼쳐놓은 것이다.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의 출입문에 유교의 덕목을 담아 성의 안팎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유교의 덕목을 가슴깊이 새기도록 만들었다.‘ 仁’을 흥하게하는 흥인지문(興仁之門), '義'를 돈독하게 하는 돈의문(敦義門), '禮'를 숭상하는 숭례문(崇禮門),‘ 智’를 널리 퍼트리는 홍지문(弘智門),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성의 중심의 종루에는‘信’을 담은 보신각(普信閣)을 두어 매시간 그 뜻이 도성에 퍼지도록 한 것이다. 유교이데올로기를 도시의 일상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도시공간을 계획한 것이다. 얼마나 획기적인 아이디어인가?

지구상에 최초로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했던 소련의 사회주의자들은, ‘도시와건축’이 자본주의 인간을 사회주의 인간으로 바꾸기 위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를 사회적응축기(Social Condenser)라 불렀다. 그리고 그때의 성과중의 하나인 나르콤핀공동주택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한 시도가 추진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서양보다 500년 전에 이미 조선에서 불교형 인간을 유교형 인간으로 바꾸기 위해 도시의 역할을 인지하고 이러한 생각을 실천에 옮긴 서울의 도성계획이 세계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갖는지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경조오부도에 나온 도성과 성저십리

 

다음으로 한양의 영역에 대해서 살펴보자. 많은 사람들이 4대문과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성 안이 한양의 영역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한양의 영역은 도성과 성저십리까지를 포괄하는 지역이었다. 동쪽으로는 중량천변까지 서쪽으로는 홍제천 그리고 남쪽으로는 한강에 이르는 지역까지를 포함하는 지역을 말한다. 도성의 공간에 대해서는 어떻게 계획되었고 지난 600여년 동안 어떠한 변화를 겪어왔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탓에 비교적 상세하게 그 내용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양을 구성하는 또 다른 축이었던 성저십리가 어떤 곳이었고, 어떠한 변화를 겪어왔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조선시대의 성저십리가 어떤 곳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경국대전과 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에 남아있다. 18세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산금표 도에는 금장(禁葬)과 금송(禁松)이 행해지는 영역이 표시되어있다. 금장제도란 도성과 성저십리에 묘를 만들지 못하게 하는 제도였고, 금송제도란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는 제도였다. 이 제도는 성저십리에 사람의 거주를 극히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성저십리를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곳으로 만들었다. 왜 조선정부는 도성보다 넓은 땅을 한양의 행정구역에 포함시키면서 성저십리 안에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정책을 폈을까? 그 답은 도성의 보호였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도성의 무분별한 확장을 막고 성저십리내에 시가지의 형성을 제한함으로써 한양을 보호하는 정책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개발제한구역’ 즉 그린벨트를 연상시킨다. 1972년에 도입된 그린벨트 덕분에 1960년대이후 무분별하게 확장되어 오던 서울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고, 오늘의 서울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린벨트의 긍정적인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유럽에서 처음으로 도입된 그린벨트 정책은 산업혁명으로 피폐해진 도시환경을 되살리기 위한 환경정책의 일환이었다는 점을 감안 한다면, 산업혁명도 없던 600년 전에 수도를 만들면서 도시를 쾌적하게 보호하기 위해 그린벨트를 설치 하였다는 것은 도시계획적 측면에서 매우 뛰어남은 물론 서울이 선견지명이 있는 도시계획을 갖춘 도시였음을 의미한다. 시가지와 그린벨트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서울은 도시와 자연생태가 공존할 수 있는 도시로 계획되었던 것이다.


그린벨트 제도의 도입과 도시를 통해 새로운 국가 이데올로기의 성공적인 정착을 꾀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성리학자들의 생각이 그대로 투영되었고, 600년 전 ‘前朝後市左廟右社’의 도시계획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살아 쉼쉬는 도시, 그리고 도시와 자연이 어우러진 서울은 서울에 담긴 수많은 역사문화자산을 넘어 도시 자체가 갖는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에 의해 새롭게 평가될 때 역사도시 문화도시로서의 격을 한 껏 높일 수 있을 것이다.

 

- 글: 안창모 | 경기대학교 건축대학원 교수

- 이 글은 2010년 내셔널트러스트 매거진 15호를 통해 소개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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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국내셔널트러스트 한국내셔널트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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