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근대건축, 용산을 중심으로

 

그림1. 용산신학교(1892)와 성당

 

나는 지난 2009년에『서울의 근대건축』이란 제목의 도집에 감수자의 한 사람으로 관여한 바가 있다. 이 도집은 1년 이상의 준비를 거쳐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간행한 것으로, 2010년 3월에 들어서 배부하기 시작하였다.『 서울의근대건축』은서울시의문화재인번사창, 뚝도수원지제1정수장, 승동교회, 천도교중앙대교당,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 구 배재학당 동관, 구세군중앙회관, 광통관, 구 동아일보 사옥, 구 제일은행 본점을 다루며 풍부한 사진과 도면, 인터뷰 등을 수록하였다. 도집의 간행과정을 감수하면서, 각기 다른 이유로 서울의 문화재가 된 이 10개소의 근대건축을 어떤 일관된 관점으로 다루는 논문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서울의 근대사를 서술하면서 이런저런 건물이 나타났다고 건물에 관한 기술을 외삽(外揷)하는 기술방식을 취하거나 어떤 방식으로 누구에 의해서 근대건축이 유입되었는가를 찾는, 곧 출자(出自)를 묻는 기술방식을 취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근대건축 전개의 동인을 건축 안에서 찾아서 기술하기란 비교적 어려운 작업인 것 같다.


여기에서 한국근대건축의 특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이러한 특성은 한국근대건축 만의것이 아니라 식민지를 거친 여러 나라들의 근대건축이 갖는 공통된 특성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 점에서 한국근대건축사에서 용산이 차지하는 위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용산은 근대의 문명이 집중된 장소이면서 식민통치를 위하여 개발된 식민지 도시로서 한국근대건축의 특성을 집약적으로 압축하고 있다.


용산은 조선시대부터 수운(水運)이 발달하고 물산(物産)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주요한 창고와 그 관리시설들이 용산에 입지하였다. 한강변의 여러 포구 중에서 용산이 도성으로 가는 최단 거리 길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말의 개항은 용산 일대의 변화를 가져왔다. 1882년의‘조일수호조규 속약’과‘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그리고 그 후의 조약들은 양화진(楊花津)과 한양에서 외국 상인들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1883년에는 개시장(開市場)이 양화진에서 용산으로 이전하게 되어, 용산은 외국상인 진출의 교두보가 되었다. 1890년대에 들어서는 인천에서 용산까지 증기선이 운항하기 시작했다. 1898년에는 화폐를 주조하는 전환국이 인천에서 용산의 군자감으로 이전하였다. 우편과 전신도 용산에 들어와서 용산우편수취소(1899)와 용산전신수취소(1902)가 생겨났다. 1903년에는 한성전기회사 제2발전소가 청암동에 자리잡았다. 한편, 한양 도성의 남부에 살던 가톨릭교도들은 1839년의 기해박해 때 당고개(堂峴)에서 순교하였다. 지금의 신계동(新契洞)에 속하는 당고개는 서소문, 절두산, 새남터와 더불어 4대 순교성지이다. 이후 가톨릭은 지금의 원효로에 1892년에 용산신학교를 세우고 1907년에는 성당을 건립하였다. (그림 1)

 

 그림2. 용산역(1906)

그림3. 조선총독관저(1912)


용산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철도였다. 1899년 경인선 철도공사 때 한강철교 가설공사를 시작하여 1900년 7월에 완성되었다. 이와 더불어 간이 용산역이 1899년에 건립되었다. 1900년 1월에 용산과 도성을 잇는 궤도전차가 놓였다.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로 용산은 경원선과 경의선의 시발점이 되어서 한반도의 철도 중심지가 되었다. 1905년 6월에는 용산역 서쪽으로 대규모의 열차수리공장(뒤의 서울철도공작창)이 세워졌고, 1906년에는 용산역이 서양식 목조로 완성되었다. (그림 2) 1907년 12월에는 용산동인병원(뒤의 철도병원)이 설립되었고, 아울러 만주철도관리국, 철도학교, 철도사택 등도 용산에 세워졌다. 한편 1912년에는총독관저가 가타야마 도우쿠마(片山東熊)의 설계로 철도사택 북쪽에 유럽풍으로 화려하게 지어졌다. (그림 3)

 

그림4. 경성전차안내도(1929)중의 용산 일대

 

용산에는 일본인들이 19세기말부터 거주하여 지금의 원효로를 중심으로 영정(榮町, 사카에마치), 미생정(彌生町, 야요이쪼) 등의 마을을 이루고, 거류민회를 조직하였다. 거류민회는 1906년부터 일본인 거류민단으로 바뀌었고, 1903년에는 일본인만 다니는 용산공립심상소학교가 설립되었다. 일본인들이 거주하면서 용산 일대에는 학교, 사찰, 신사, 유곽 등이 들어섰다. 이후에 용산은 식민지 도시로서의 모습을 갖춰갔다. (그림 4) 한편, 1925년의 을축대홍수는 용산 일대에 피해를 주었고 주변의 하천을 정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군은 1894년 청일전쟁 때 효창원 일대를 숙영지로 삼아 기지를 두고, 만리창에 임시사령부(假司令部)를 둔 적이 있다. 이후에 1904년 러일전쟁 때 한국주차군사령부를 두면서, 일본군은 용산 일대의 300만평을 군사기지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대규모의 군사기지는 일본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1906년 4월부터 사격장, 사령부, 사령관 관저, 위수병원, 병영, 창고, 무기고, 연병장, 형무소 등 수 많은 군사관련시설이 건립되었다. 1916년부터 일본군은 한반도에 2개 사단(師團)을 상주(常駐)시켰고, 사령부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용산에 두었다. 일제는 도성의 바로 밑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철도(경의선₩경원선)를 이용하여 만주 또는 러시아 등의 국경으로 병력을 쉽게 파견할 수 있는 구상으로 용산의 군사기지를 완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용산의 군사 기지는 비단 한반도뿐만이 아니라 동아시아를 염두에 두고 건립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용산 기지는 1945년에 미군이 인계하여 지금까지도 군사기지로 사용하고 있다. 미군은 일본군의 시설을 인수하여 사용하면서 내부는 바꾸었지만 외관은 대체로 그대로 놔두었다. 붉은 벽돌로 지은 주요한 군사시설들은 앞으로 보존활용의 여부가 문제가 될 것이다. (그림 5) 아울러 방대한 면적의 용산기지는 공원화의 방향을 두고 커다란 논란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림5. 용산 북쪽기지 벽돌 건물의 일부


용산은 한국 근대의 흔적들을 간직하면서 일제시대에 형성된 도시계획의 골격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용산은 이제까지 철도기지, 군사기지로 사용되면서 서울의 성장과 발달을 차단하여 왔다. 이제 도성에서 가깝고 평탄한데다가 대규모 토지이기까지 한 용산 지역은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 용산은 그 과거의 흔적들을 어떻게 간직하고 또 지워야 할 것인가?

 

- 글: 우동선ㅣ 한국종합예술학교 건축과 교수

- 이 글은 2010년 내셔널트러스트 매거진 15호를 통해 소개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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