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내셔널트러스트 29호 [자연이야기-식물편]- 신나무

법복, 군복, 미영치마 물들이던 ‘신나무’

글: 고주환



쪼록쪼록 조록나무 아이구배야 아그배나무

쌀밥에 이팝나무 수랏상에 상수리나무

앵돌아져 앵도나무 매웁고나 고추나무 

국록먹어 녹나무 군침돈다 신나무

 

세간에 구전되는 나무타령에서 신나무는 말만 들어도 그 신맛에 군침이 도는 나무로 표현이 되지만 딱히 식용하는 부위는 없으니 맛에서 온 이름은 아니다. 여타의 단풍나무종류처럼 가을에 붉게 물드는 잎과 팽그르르 돌면서 떨어져 내리는 날개달린 씨앗이 특징이며 10미터 안쪽으로 자라는 중간키 나무다.

조선초기에 지어진 『훈몽자회』에 ‘싣나모 풍:楓(상10)’이라는 표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신나무라는 이름은 싣나모에서 변한 것으로 보인다. 충북 내수읍의 풍정리楓井里에 ‘싣우물’로 불리는 지명이 남아 있는데 이 외에도 풍정楓井이란 한자표기와 ‘싣우물’이란 우리말이 공존하는 지명이 적지 않고, 사촌쯤 되는 시닥나무도 이름의 뿌리를 함께 하는 듯싶으니 ‘싣’의 어원은 더 연구해 볼 일이다.

신나무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주변에 흔히 자란다. 개울가나 야산의 언저리 심지어는 밭머리나 돌담의 틈새에서도 자라지만 딱히 용도가 있거나 그리 크게 자라는 나무가 아니라 땔감으로 손쉽게 베어지던 나무이기도 하다.

신나무는 뾰죽뾰죽한 여러 갈래의 잎이 손바닥 모양을 이루는 여느 단풍나무들과 달리 세 갈래의 결각이 전체적으로 긴 삼각형을 이룬다. 6월쯤에 마치 더듬이를 세우고 있는 달팽이를 연상시키는 연노랑의 꽃을 피우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아서 눈길을 끌지 못한다. 



신나무의 존재감은 잎이 유난히 붉게 물드는 가을에 최고조에 이른다. 이 나무를 한자로 색목色木이라 하기도 하는데 단풍의 짙은 붉은색에서 기인한 듯하다. 신나무가 색목으로 불린 데에는 이 나무의 잎을 채취해 옷감을 검은색으로 물들이는 염료로서 사용됐던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된 것으로 추측해 보기도 한다. 한여름에 신나무의 잎을 따서 물을 붓고 발효를 시키거나 삶으면 검은 물이 나오는데 여기에 옷감을 담그면 회흑색이 된다. 여러 번 반복하면 검은색이 되어 스님들의 법복이나 이불의 호청 또는 미영치마(면화의 사투리가 ‘미영꽃’이니 ‘무명치마’) 등을 물들였다고 한다. 



더러의 기록에서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일제 치하에서 일본군의 군복을 신나무 잎으로 물들여 공급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해방 후 일제가 물러가고 미군정이 실시되던 이 땅에 비교적 흔했던 것은 일제가 버리고 가거나 미군들에게서 흘러나온 군복이었으니 이후 오랫동안 우리 땅의 민초들은 이 군복을 검게 물들여 평상복이나 작업복으로 입었다. 아마도 서양식의 화학 염료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이전에는 신나무 잎이 염색재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유추해본다.

신나무의 가지와 어린 순은 약재로 이용된 흔적도 보인다. 조선중기에 지어진 양예수의 『의림촬요醫林撮要』라는 의학서에는 신나무가지楓枝를 눈병 치료에 이용하는 기록이 등장하며 민간에서는 어린 순과 잎을 간염 치료에 사용했다고도 한다.



화려하게 물들었던 잎이 져 버린 겨울의 신나무는 을씨년스럽다. 채 떨어뜨리지 못한 날개 모양의 씨앗들이 눈과 바람을 맞으며 사그락거리다 미처 땔감을 쟁여두지 못한 게으른 농부의 낫질에 스러지거나 고무줄 새총을 만들려는 꾸러기들의 손에 잘리기 일쑤였던 나무이다. 


민가의 담장에, 수로 가에, 텃밭머리에......

몇 해 전에 잘린 옆으로 가지를 내어 또 그만큼 자라있는 나무!

무환자나무목 단풍나무과의 신나무 또한 고향집의 지근거리에 안 보이면 서운할 그런 나무다.

 


고주환 | 작가

[나무가 민중이다] 의 저자로 민초의 삶에 깃든 풀과 나무 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며, 숲해설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사진출처

고주환 작가, http://blog.naver.com/hoon814, http://blog.naver.com/tlsgksrnr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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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국내셔널트러스트 한국내셔널트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