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경기도 연천군 중면 횡산리 DMZ일원에 월동하기 위해 보금자리를 찾는 두루미는 400여 마리에 이릅니다. 멸종위기종 1급 두루미와 멸종위기종 2급 재두루미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두루미들은 왜 1600Km를 날아 연천에 오는 것일까요? 또 와서는 무얼 먹고 겨울을 날까요? 1년 중 7개월은 겨울인 시베리아에서 두루미가 5개월 동안 새끼를 기르고 가르치고 새끼가 하늘을 날아다닐 쯤, 시베리아는 혹독한 겨울이 오기 시작 합니다.

 

영하 40를 넘나드는 추위와 얼어버린 땅에서 먹이를 찾을 수 없게 되면 동토의 땅을 떠나 따뜻하고 먹이가 풍부한 남쪽으로 이동을 합니다.

 

연천 중면 횡산리 임진강 망제여울에서 대장정의 막을 내리고 지친 몸을 추스립니다. 1600km를 날아오면서 소비된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동물성 먹이인 작은 물고기와 다슬기 먹습니다. 그러나 주된 먹이는 탄수화물인 낙곡입니다. 율무와 벼 낙곡은 두루미들의 가장 주요한 에너지 공급원입니다.

 

임진강 민통선내 망제여울(구 빙애여울)

 

유조에게 여울에서 동물성 먹이 찾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두루미부부

 

하지만 두루미들의 겨울나기가 최근 들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율무와 벼 낙곡의 부족입니다. 추수가 끝나면 볏짚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대신 커다란 마시멜로 같이 생긴 '볏짚 곤포 사일리지'가 온 논에 널려 있습니다. 축산 농가의 사료용으로 사용되는 볏짚을 곤포사일리지로 만들어 한 개에 5만 원에 판매됩니다. 이렇게 볏짚을 거둬가게 되면 두루미가 먹는 낙곡이 많이 줄어듭니다.

 

곤포사일리지 만들기 전 볏짚을 말아놓은 모습

 

볏짚을 수거하지 않은 논과 수거한 논

 

1990년대 이전에는 농부들이 추수가 끝나면 볏짚을 그대로 깔아놓고 이듬해 농사를 위한 밑거름으로 사용했습니다. 두루미들은 수천 년 동안 그런 농업 환경에 적응해 낙곡을 먹어가며 연천에서 겨울을 지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서식 환경이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DMZ일원에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곳곳에 건축물이 들어서고 있으며, 논과 밭은 인삼밭으로 변해가면서 두루미는 먹이터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연천군 중면 횡산리 DMZ일원의 인삼밭

 

율무두루미 400여마리가 매년 겨울에 도래하는, 연천군 중면 횡산리 일원은 임진강 최상류에 DMZ일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2개의 여울과 여울 주변에 자리한 10만여평의 논과, 산간에 율무 밭이 넓게 산재해 있습니다. 넓은 논과 수백만평의 밭 두루미들이 한 겨울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볏짚은 가축 사료용으로 수거해가고 율무는 연작을 할 수 없어 해거리를 하고 있습니다.

 

해거리 때문에 율무농사를 짓지 않고 콩을 지은 밭에 율무두루미가 찾아왔습니다. 율무두루미들은 전년도의 기억을 가지고 율무밭을 찾아왔지만 보이는 것은 콩 타작을 하고 남은 부스러기뿐입니다.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묵정밭까지 걸어 올라가 보지만 잡풀뿐입니다. 사정은 이 곳 뿐만 아닙니다. 횡산리 이곳저곳 콩밭만 가득합니다.

 

2015년 10월 경작한 율무밭

2016년 경작하지 않은 율무밭

 

환경부는 지난 2002년부터 겨울 철새의 먹이 확보를 위해 '생물다양성관리계약' 제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논에 볏짚을 그대로 두게 하고 일정액을 보상해주는 '볏짚존치' 사업이 대표적입니다.

 

연천은 2013년부터 '생물다양성관리계약'을 임진강 일원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민통선내에 자리하고 있는 두루미 먹이터인 횡산리 10만평의 논은 축산농가가 곤포사일리지를 만들기 위해 논 소유자와 관리계약을 체결해서 두루미들의 먹이터인 횡산리에서 볏짚존치를 이행하지 못하고 있으며, 매년 반복되는 악순환 속에서 두루미들은 배고픔에 겨울을 나고 있습니다.

 

농가의 볏짚 수거가 계속 확산될 경우 겨울 철새의 먹이 확보는 심각한 위기에 놓일 수 있습니다.

겨울 철새 가운데 몸집이 가장 큰 두루미는 하루 약400g(4000립중)율무낙곡을 먹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400마리의 두루미가 율무낙곡400g을 먹을 경우 하루 160kg의 율무낙곡이 필요합니다.

 

두루미의 월동 기간인 10월말부터 이듬해 3월 하순까지 5, 150일을 생각해보면 약24톤의 율무와 낙곡이 필요한 셈입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 한탄강지키기운동본부와 연천군청에서 5개월간 두루미 먹이로 뿌려주는 4톤의 먹이와 '볏짚존치' 사업은 그야말로 '푸른바다속의 좁쌀'에 불과합니다.

 

많이 부족했지만 그나마 같이가치와 한 땀 한 땀 보태주신 여러분들의 정성이 두루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장정의 길에 체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의 손길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연천 율무두루미를 위한 땅 한 평 사기에도 많은 분들이 도움의 손길을 주고 있습니다.

 

201710월말 연천군 중면 임진강 최상류 망제여울에 두루미들이 유조를 데리고 돌아오게 하여 새로이 난 유조와 그들의 형제자매, 부모와 함께 임진강가에서 자유로운 삶은 가질 때, 두루미가 우리에게 주는 정서적, 문화적 풍요로움은 더욱 커져 갈 것입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 DMZ 위원회 백승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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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4회를 맞는 이곳만은 꼭 지키자!’ 시민공모전 시상식이 지난 1121일 문학의집 서울 산림문학관에서 개최됐다. 이번 시상식은 선정대상이 공개되면서 뜻하지 않게 언론으로부터 주목을 받기도 했다. 수상작에 케이블 건설로 환경파괴 논란이 일고 있는 남설악 오색지구가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민간단체가 내부선정기준에 따라 훼손위기에 처한 대상지를 선정한 것은 일상적인 일이다. 문제는 이번 행사를 후원하고 있는 환경부의 반발이었다. 환경부는 본래 환경부장관상을 이번 시상식에 후원하기로 약속돼 있었다. 하지만 환경부장관상의 수상지역이 아님에도 남설악 오색지구를 수상지역으로 선정한 것을 들어 상장 지원 거부를 통보한 것이다.

[케이블카 건설 논란이 일고 있는 국립공원 설악산 남설악 오색지구]


민간단체의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활동을 환경부가 반대하고 나선 것에 대해 시민사회단체의 비판과 언론의 질타가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 하에 진행되는 시상식이기에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시상식에 참가하신 분들에게 전하는 환영 인사에서도 김원 이사장님은 환경부의 반환경성과 민간단체의 자율적 활동을 부정하는 행위를 질타하였다. ‘깨어있는 젊은 지성이신 김성훈 고문님의 축사는 어지러운 시국, 참석하시는 분들에게 위안을 드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어서 수상자들이 직접 응모한 지역을 소개하는 하는 순서와 문화공연 그리고 6개의 시상내역에 따른 발표가 이어졌다. 사실 6개의 시상내역은 일반적인 순위로 단정 짓기에 어려움이 있다. 응모된 모든 지역을 개량화하여 어디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서열화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미래세대지킴이상은 두 단체가 공동으로 수상하였다. ‘산황동 마을숲을 응모한 고양환경운동연합인천 저어새의 서식처 남동유수지을 응모한 인천저어새네트워크가 선정되었다.

산황동은 마을에서 200미터 떨어진 골프장에서 날아 든 공에 맞아 팔에 금이 가는 부상을 입거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곳이다. 그럼에도 골프장 사업주는 다시 9홀의 골프장을 주민들의 땅도 매입하지 않은 채,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사업자의 계획대로라면 숲은 파괴되고 매입되지 않은 주민의 집이 골프장 잔디밭에 덩그러니 얹어지게 된다. 이 기가 막힌 골프장 증설 계획이 인허가를 얻어 고양시 산황동에서 실제로 추진되고 있다. 증설되면 골프장 안에 들어 선 민가뿐 아니라, 30여 가구가 골프장과 5~20m의 거리에 놓이게 된다. 마치 전쟁처럼 골프장이 마을로 쳐내려 오는 것이다

[골프장 증설로 마을공동체가 와해될 위기에 처한 고양 산황동]


마을과 골프장 사이의 경계인 숲에서 골프공은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그린벨트 지역임에도 사업자는 매입되지도 않은 숲을 벌목하거나 제초제로 나무를 고사시키기도 하며, 심지어는 고의적인 방화를 일삼는다고 한다. 불법적인 벌목을 막기 위해 지역주민들이 나무에 번호표를 붙였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지난 3, 아이들까지도 곱은 손을 호호 불어가며 번호표 작업을 함께 하기도 했다.

인천저어새네트워크가 응모한 인천 저어새의 서식처 남동유수지1980년 중반에 조성된 유수지 내의 인공섬에 천연기념물인 저어새가 서식하는 장소이다. 2016년까지 150여 마리의 저어새가 둥지를 틀고 새끼를 키우는데, 도심에서 저어새를 유일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남동유수지는 도심에서 천연기념물 저어새를 탐조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아름다운자연상영종도 갯벌을 응모한 인천녹색연합에 돌아갔다. 영종도 주변의 갯벌은 인천항 준설토의 투기장으로 꾸준히 매립돼 왔다. 급기야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합류하는 강화도 남단 갯벌과 물길로 이어진 영종도의 남북단 갯벌의 매립까지 추진되고 있다. 강화 남단갯벌은 천연기념물보호구역이다. 매립으로 인해 수십만 년 동안 형성된 갯벌의 정밀한 시스템이 한순간에 무너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천연기념물인 강화 남단 갯벌과 이어진 영종도 갯벌도 매립위기에 처해 있다]


내셔널트러스트상제주 수산평 벵듸를 응모한 제주환경운동연합이 수상하였다. 화산이 만든 초원지대의 제주 방언인 벵듸. 화산이 만든 숲인 곶자왈과 화산이 만든 산인 오름은 잘 알려져 있지만, 벵듸는 아직 미개척 영역이다. 우리나라 초지의 46.6%가 제주에 있는 이유도 한라산과 해안지대의 완충구역인 벵듸의 존재에 기인한다

[화산이 만든 초지 벵듸, 특히 수산평 벵듸는 제2제주신공한 건설로 인한 난개발로 훼손이 우려된다]


중산간지역의 초원지대를 이루는 벵듸는 고려말, 원나라 지배하에 말목장으로 운영되기도 했다. 이곳이 학술적으로 미개척 영역인 점과 달리 개발의 압력은 지속적으로 높아가고 있다. 경치가 좋은 초원지대이기에 별도의 매립이나 절토작업 없이 개발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태보전등급 역시 낮다. 벵듸는 현재까지 마을 공동의 말목장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고령화로 인한 말목장이 지속적으로 감소되고 있는 지금, 중국인의 자본 등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고 있다. 마을 전체의 공유재산이 무너지면 나라의 땅까지 외세의 손에 넘어갈 수 있음을 뼈아프게 말해주고 있다.


문화재청장상은 사단법인 섬연구소가 응모한 이중섭 거주지 및 나전칠기 강습소로 선정되었다. 1930년대 초 건축된 공간으로, 한국전쟁 중, 화가 이중섭이 통영에 머물면서 그의 대표작을 스케치하였거나 그렸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하지만 소유주가 이 건물을 헐고 신축을 추진하고 있어, 훼손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

[화가 이중섭이 통영에서 2년간 머물면서 그의 대표작을 완성했던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환경보전특별상김해 봉하마을 화포천 습지를 응모한 봉하논세상에게 수여됐다. 임점향 선생님에 따르면 ‘9년 동안 친환경농업을 진행해 오던 봉하마을이 힘든 고비를 넘고 있다고 전한다. 전체 면적 24만여평 중 부재지주가 소유한 농토는 약 50%. 지역 연고의 특정 가문 자손들이 소유한 토지가 30%이고 나머지 20%가 지역주민들이 소규모로 땅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외지의 토지소유주들이, 개발이 용이치 않아 상대적으로 지가가 낮은 농업진흥구역의 해제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지역에 연고를 갖고 있는 토지소유주들을 앞세워 친환경농업 포기를 종용하도록 했고, 결국 지난 6월 농업진흥구역 해제 신청이 접수되기에 이른다. 친환경농업이 어려울 수 밖에 없는 농지의 소유구조, 사람들의 인식, 땅에 대한 욕망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유기농으로 생태계가 복원되고 있는 화포천에 '농업진흥구역 해제'가 추진되고 있다]


친환경농업 9년동안 인근 화포천은 놀라운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화포천은 상류 공장에서 흘려 보내는 오폐수와 쓰레기가 방치된 오염된 하천이었다. 농약과 화학비료 사용을 금지하고 약 100톤에 이르는 폐기물을 수거했으며, 이러한 분위기에 발맞춰 공장에서도 오폐수 방류 금지에 협조하고 있다. 현재 화포천은 주민들의 관심 속에 생태계가 복원되는 중이라고 소개했다.

내셔널트러스트대상설악산 국립공원 남설악 오색지구를 응모한 설악산국립공원지키기국민해동이 수상했다. 이 지역은 국립공원, 천연기념물보호구역, 생물권보전지역,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 백두대간보호구역등 겹겹이 보호구역으로 설정될 정도로 핵심보전지역이다. 이곳은 환경부가 오색케이블카 사업을 조건부로 승인한 곳으로, 노선 예정지는 10여종의 천연기념물과 36여 종의 멸종위기 야생생물이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멸종위기종1급이자 천연기념물 217호인 산양의 주서식지이기도 하다.


[제14회 이곳만은 꼭 지키자! 수상작]

시상내역

선정작

수상단체

상금 및 부상

내셔널트러스트 대상

설악산 국립공원 남설악 오색지구

설악산국립공원지키키국민행동

상금 100만원

환경보전특별상

김해 봉하마을 화포천 습지

봉하논세상

상금 100만원

문화재청장상

이중섭 거주지 및 나전칠기 강습소

사단법인 섬연구소

상금 100만원

내셔널트러스트상

제주 수산평 벵듸

제주환경운동연합

상금 70만원

아름다운자연상

영종도 갯벌

인천녹색연합

상금 50만원

미래세대지킴이상

산황동 마을숲 및 느티나무

고양환경운동연합

상금 50만원

인천 저어새의 서식처 남동유수지

인천저어새네트워크

상금 50만원

 

당일 행사장에서는 바로 전 주에 결정된 영양댐 건설의 백지화 사례가 소개하며 자축을 하기도 했다. 11회 시민공모전에 영양 장파천을 응모하여 미래세대지킴이상영양댐반대대책위에 수여되었고, 장작 8년간의 반대활동 끝에 백지화에 성공한 것이다. 또한 최근에는 201412회 시민공모전에서 내셔널트러스트 대상을 수상한 서부 DMZ일원 임진강 하구가 응모한 단체인 파주환경운동연합의 노력으로 사대강 사업의 일환으로 벌어질 예정이었던 임진강 준설사업을 백지화시키기도 했다.

이처럼 이곳만은 꼭 지키자!’ 시민공모전은 횟수를 거듭할수록 각종 개발과 그에 따른 훼손으로부터 환경과 문화유산을 보전하는 대표적 행사로 정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장의 힘겨운 보전활동의 고민을 나누고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주는 자리로서 의미 또한 크다.


행사의 마지막 순서는 각 지역에서 보전하고자 하는 대상을 피켓과 현수막으로 제작하여 구호와 함께 기념촬영을 마무리 됐다. 수상자와 참석하신 모든 분들이 염원, 그리고 하나된 목소리를 통해 힘겨운 현장활동에서 위로가 되고 다함께 마주친 손뼉을 통해 굳건한 연대를 확인하는 제14이곳만은 꼭 지키자!’ 시민공모전 시상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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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금호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사무국장)


6 인문학강의가 진행된 25일, 전국이 장마권에 들었다. 일기예보는 당일 곳에 따라 폭우를 예보하고 있었다. 기상청 예보는 행사 시작 며칠 전부터 인문학 강의의 강행과 취소 사이에서 갈등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번 6월 망우리 인문학 강의는 홍익대부속고등학교 내셔널트러스트 동아리 학생들이 참여를 신청한 상태였다. 학생들이 망우리 인문학 강의를 접할 기회가 날아가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다.

다행히 인문학 강의 당일은 간간히 비를 뿌렸다. 예보대로 폭우가 내리지 않는다면 차라리 더운 날씨보다 훨씬 괜찮은 편이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리위원회 김영식 위원장(작가)이 답사 시작에 앞서 망우리에 대해 간단히 소개했다.

장마비가 가끔 뿌리는 날씨, 청소년들까지 참여한 가운데 망우리공원 인문학강의가 시작됐다.


망우리공원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소파 방정환

참석자들 중 일부가 아직은 앳띤 청소년들이기에 망우리에서 가장 친근하게 다가 온 인물은, 단연 소파 방정환 선생인 듯 싶었다. 다른 묘역에서 보인 진지한 태도는 찾아 볼 수 없고 천진하게 장난까지 친다. 방정환 선생하면 생각나는 게 무어냐는 김영식 작가의 질문에 이들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어린이날이요.”

변성기가 지난 굵은 목소리로 어린이날을 연호하는 게 그들도 우스웠던 모양이다. 청소년들 사이에서 킥킥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직은 어린 티를 벗지 않은 청소년들이기에 소파 방정환 선생은 망우리공원에서 가장 친근한 분이다.


김영식 작가는 방정환 묘의 조성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망우리에서 가장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은 방정환의 묘는, 1931년 방정환 사망후 홍제동에서 화장후 납골당에 안치돼 있다가 1936년 망우리 이곳에 안장된 것으로 전한다. 묘비 앞면에는 선여심동(仙如心童), 무동의이린어, 묘지환정방파소라고 적혀 있는데, 청소년들은 이게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알기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김영식 작가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 방법을 설명하고 비문에 얽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글씨는 당대 명필이며 독립운동가인 위창 오세창 선생이 썼습니다. 오세창 선생은 손병희 선생과 함께 3·1운동을 주도한 33인이며, 방정환 선생은 손병희 선생의 셋째 사위입니다. 그런 인연으로 묘비를 쓰게 되었고, 묘비를 쓰신 오세창 선생도 현재 망우리 묘역에 잠들어 계십니다.”


                            

소파 방정환(1899~1931)


살아서의 인연은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는 모양이다. 소파 방정환과 인연이 있는 인물중 망우리공원에 묻힌 분이 또 계신다. 소파가 1928년 개벽사를 운영하며 주최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계기로 등장한 한국화단의 거두 이인성이었다. 소파 방정환이 부재했다면 과연 화가로서 이인성의 미래를 장담할 수 있었을까.

 

잘 알려지지 않은 소파의 연인

아동문학가나 아동을 위한 운동가로 잘 알려진 소파 방정환. 하지만 김영식 작가는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를 소개한다.

“...소파 방정환의 연인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이 잘 모릅니다. 물론 소파가 손병희 선생의 셋째 따님과 결혼 후, 알게 된 인연이었기에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돼버렸죠. 그 연인의 이름은 신준려(신줄리아, 신형숙)3·1운동 당시, 이화학당 교사로 재직하다 투옥되어 7개월간 수감생활을 하기도 한 여성입니다. 1920년 잡지 [신여자]를 기획했는데, 당시 편집의 귀재로 평판이 높던 방정환을 편집고문으로 위촉하며 사귀게 된 것입니다...”

            

아동문학가로 알려진 소파는 당대 유명 출판인이자 언론인이며 베스트셀러 잡지의 발행인이기도 하다.


당시 소파의 글에서 신준려(줄리아)는 이니셜 ‘S'로 표기돼 [개벽] 4호의 추창수필 [秋窓隨筆]에 등장한다.

...1020, 등불을 가까이하고 독보(구니키다 돗포)의 병상록을 읽다가 언뜻 S를 생각하고 한참이나 멀거니 앉아 있었다. 독보가 말한 밭 있는 곳에 반드시 사람이 살고 사람이 사는 곳에 반드시 연애가 있다라고 한 그 구절 끝에 왜 이런 구절이 없는가 한다. ‘연애가 있는 곳에 반드시 실연이 동거한다. 아아, 인정의 무상함을 지금 새로 느끼는바 아니지만, S의 사랑을 노래하는 그 입으로서 어느 때일지 실연의 애가 나오지 아니할까아아, 사람 그리운 가을 만유가 잠든 야밤에 창밖에는 불어가는 가을 소리가 처연히 들리는데 부질없는 벌레가 잠자던 나를 또 울리는 구나.

당시 소파의 나이 22세 그리고 줄리아 23세로 뜨거운 사랑을 품었던 사이였지만, 소파는 손병희의 3녀와 결혼을 하고 아들까지 둔 처지였다. 결국 두 사람의 짧고도 아쉬운 사랑은 소파의 도쿄 유학과 줄리아의 미국유학으로 영영 이루어질 수 없게 된다.

소파 사망한 후 10여년이 지난 어느 날, 아들 방운영씨는 방정환의 묘역을 참배하는 양장 차림의 여성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다가서는 운용씨에게 유족인지 물었고 그렇다고 대답하자, 조용히 목례를 하고 멀어져 갔다. 후에 방운용씨는 방정환의 지인을 통해 인상착의를 확인하고 그녀가 바로 줄리아였음을 알게 된다.

소파의 묘비에는  '동심여선(童心如仙), 어린의동무 소파 방정환의 묘'라고 표기돼 있다.


아동문학가 이원수는 훗날 두 사람의 플라토닉한 사랑이 어린이를 위한 사랑으로 승화됐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김영식 작가는 "짧은 인생을 살다간 소파의 활동에 대해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고 어린이날을 만든 사람 혹은 아동문학가로 알고 있지만, 그는 다방면에 걸쳐 눈부신 활동을 전개했다"고 언급한다. 소파는 아동문학가 이전에 출판인이자 언론인이었으며 공전의 베스트셀러 잡지인 [학생], [신여성], [혜성], [개벽], [별건곤]등에 발행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소파가 선택한 새로운 사랑

소파가 출판인이자 언론인으로 눈부시게 활약을 펼쳤다지만 묘비에 새겨진 대로 방정환은 어린이의 동무이다. 때문에 성인 누구나 어린시절을 지나왔기에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망우리공원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은 단연 소파 방정환 선생이십니다. 종래 애들’, ‘애놈등으로 불리던 것을 1920[개벽]지에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192251어린이의 날을 발기 선포도 하셨고, 번안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발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1923년 개벽사에서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합니다. 잡지 [어린이]를 통해서 일본노래와 어른들 민요밖에 없던 시절, 동요운동도 벌이셨습니다. 당시 어린이에 노랫말을 기고한 어린이들 중, 이후 아동문학가나 시인으로 성장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소파가 발행한 잡지 [어린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아동문학가와 시인으로 성장했다.


김영식 작가의 말대로 [오빠생각]은 최순애가 11세에 [고향의 봄]15세의 이원수가 어린이에 응모해서 선정된 노랫말이다. 마산소년 이원수와 수원소녀 최순애는 어린이를 계기로 펜팔친구가 되었고, 서로 얼굴도 모르면서 결혼약속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펜팔한 지, 7년 후 수원역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이원수는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원수가 독서회를 통해 불온한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구속돼 1년간 복역을 했기 때문이었다. 최순애의 집안에서도 이원수와의 결혼을 반대하며 다른 혼처를 권했으나 그녀는 완강히 거부한다. 그리고 이원수가 석방되자마자 바로 결혼식을 치르게 된다.

      

[오빠생각]은 최순애가 11세에 [고향의 봄]은 15세의 이원수가 어린이에 응모해서 선정된 노랫말이다. 

둘은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성공한다. 


이밖에도 윤극영의 [설날][반달]을 비롯해, [고드름(유지영 작)], [따오기(한정동 작)], [봄편지(서덕출)]등도 모두 어린이를 통해 세상에 나와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다.

일제강점기 암울한 상황에서 어린이를 위한 잡지 간행이 순조로울 수만은 없었다. 소파는 기성세대의 변절, 무기력, 분열, 좌절감 등을 신세대에 대한 기대로 전환했다. 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소파는 어린이를 장차 조선독립의 역군이 될 인재를 키우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잡지 [어린이]는 일제의 검열에 걸려 기사가 삭제되는 일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그때마다 소파는 경찰서를 들락거려야 했고요. [왜정인물 1]에는 일본 경찰이 작성한 방정환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손병희의 3()용화의 남편이고 천도교이 중요임무를 전담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그리고 키는 52촌에 둥근 얼굴이고, 까만 피부에 비만이라는 기록까지 나오는데,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고 불온한 행동을 할 우려가 있음이라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소파 방정환 선생은 동화구연가로도 유명하다.

이화여자보통학교에서 전교 학생들에게 산드룡(신데렐라의 불어 발음)’을 이야기할 때, 학생들은 눈물이 줄줄 흘러 저고리에 비 오듯 하는 걸 씻지도 않고 들을 정도였고, 교사들마저 눈물을 훔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신데렐라가 의붓어머니에게 두들겨 맞는 구절에 이르자 여학생들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상갓집 같이 일제히 통곡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방정환 선생과 함께 아동문학가로 활동했던 후배 최신복 선생에 따르면, 소파의 강연회에 입회했던 순사가 소파의 강연에 감동해 눈물을 참지 못하고 방정환을 선생으로 모실 정도였다고 합니다.

망우리공원 인문학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그와 나 사이를 걷다'의 저자 김영식 작가


김영식 작가가 언급한 최신복 선생은 동아일보사 수원지국 기자에서 소파의 부탁을 받고 1929년 개벽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훗날 무덤도 없이 홍제동 납골당에 안치된 소파의 유골을 윤석중, 마해송 등과 함께 지금의 망우리공원에 모신다. 그 역시 194538세의 젊은 나이에 소파와 마찬가지로 과로로 유명을 달리 하는데, 방정환의 곁에 묻어 달라 유언했다. 최신복은 그가 죽기 전, 1939년 부친이 사망하자 수원의 선산을 놔두고 망우리공원 소파의 아래쪽에 묘를 썼다. 소파를 더 자주 찾아뵙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1942년 모친이 사망하자 역시 망우리공원 조부의 곁에 안장하였고, 자신의 갓난아기가 죽자 그 곁에 묻은 것으로 전한다. 이로써 소파를 존경했던 최신복으로 인해 3대가 망우리공원 소파의 묘 근처에 잠들게 된다.

소파가 사망한 것은 1931년이었다. 그는 각종 강연, 어린이 관련 행사기획, 집필, 잡지 간행 등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던 중 과로로 쓰러진다. 고혈압에 신장염이었으나 당시 의료기술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지는 못했다. 김영식 작가는 병상의 소파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어린이들을 잘 부탁한다.’말했다며 동화와도 같은 마지막 유언을 전했다.

여보게, 밖에 검정말이 끄는 검정 마차가 와서 검정 옷을 입은 마부가 기다리니 어서 가방을 내다주게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 남긴 것

훌륭한 인물의 업적은 인물과 업적의 내용에 가려져 그 의도나 동기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동기가 드러난다 한들, 표면적인 동기와 당사자가 결심을 품게 된 내재적 동기는 다를 수 있다.

앞서 밝혔듯이, 아동문학가 이원수 선생은 소파 방정환과 줄리아의 플라토닉한 사랑이 향후 어린이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되었다고 언급했다. 아내와 처자를 둔 소파의 처지였기에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으면서도, 두 사람 모두 해외 유학으로 관계가 정리된다. 요즘 드라마 형식을 빌리자면 불륜과 막장으로 끝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유학이 결코 자발적 결정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상상역시 과하지 않다. 하지만 이원수 선생의 말처럼 소파의 플라토닉한 사랑이 내재적 동기로 작용했고, 식민지 조국의 독립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어린이 운동 투신의 표면적 동기와 분명한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소파가 줄리아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대상을 달리할 뿐, 소파의 삶 내내 현재 진행형이었고, 모든 사랑이 그렇듯 그 완성을 갈구하게 된다. [어린이]를 통해 등단한 아동문학가 이원수와 최순애의 결혼은 소파가 사망한 지 5년 후인 1936년의 일이다. 하지만 얼굴도 서로 알지 못했고, 일제 강점기의 엄혹한 환경, 가족의 반대를 극복하고 이룬 운명같은 사랑은, 살아 생전 소파의 실천적 사랑과 무관하다 할 수 있을까.

소파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은 대상만을 달리한 채, 그의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


임종에 가까워질 때, ‘어린이들을 잘 부탁한다.’며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사랑한 대상에 대한 애틋함을 나타낸다. 죽음이란 누구도 피하지 못 할 두려움의 대상이며 생물학적 기능의 종료 상태이다. 하지만 소파였기에, 죽음이라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정서적으로 유약한 어린이들에게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여보게, 밖에 검정말이 끄는 검정 마차가 와서 검정 옷을 입은 마부가 기다리니 어서 가방을 내다주게

소파는 어린이들에게 말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죽음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 동화와도 같은 다른 세계 어디로 떠나가는 것이며, 마치 새로운 일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가방을 챙겨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소파가 배역에 충실한 연기자같이 검은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떠나면서 미완의 사랑은 그의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 어린이를 위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성사시키는 마침표가 찍어진 것이다.

 


망우리공원 보전 '같이가치' 모금 참여하기: https://together.kakao.com/fundraisings/24277


자료참조 '그와 나 사이를 걷다' (김영식 저/호메로스/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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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마지막주 토요일, 망우리공원은 버찌가 빨강게 물들자마자 검붉게 익어가고 있었다. 화사한 꽃이 예뻤던 4월도 잠깐, 어느새 열매는 삽시간에 익는다. 망우리가 근현대 역사인물이 잠든 특성 때문일까. 계절과 시간의 변화도 그들의 삶처럼 압축되어 나타난다.


오늘은 18명의 시민들과 함께 망우리 인문학 강의를 진행한다. 간혹, 참석하신 분들의 성향이나 직업, 나이에 따라 관심을 끄는 묘역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관심이란 한 인물에 대한 존경심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상황에 따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 드러나기도 한다. 사실, 위인에 대한 신비감과 무조건적 영웅시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위인역시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고, 그들의 삶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좀 더 견고하게 개선할 책임을 느낄 필요가 있다. 이를 떠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분의 잘잘못을 섣불리 논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이다.

 

승려의 묘 옆에 부인(人)의 묘가?

망우리공원 순환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도로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묘가 올려다 보인다. 20여 미터 완만한 계단을 오르면 예상치 못했던 장면이 나타난다. 바로 승려였던 만해와 그의 부인의 봉분이다. 비석에도 만해한용운선생묘라는 표기와 부인유씨재우(夫人兪氏在右)’라고 표기돼 틀림없는 한용운 선생의 묘임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김영식 작가가 재미있는 질문을 던진다.

그럼, 한용운 선생의 묘는 둘 중에 어떤 것일까요?


참가자들은 여러 추측이 이어진다. 김영식 작가 말에 따르면, 참배객들이 엉뚱한 봉분에 헌화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결국 오른쪽이라는 것은 우리가 묘를 바라본 입장에서가 아닌, 머리를 위로하고 누운 고인의 입장에서의 방향을 뜻한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18798, 충남 홍성군 결성면에서 태어납니다. 16살이던 1894년에 돌연 출가를 하게 됐는데요. 일설에 따르면 선생의 부인의 해산을 전후로, 시장에서 미역을 사오라는 부탁을 받고 나갔다가 그 길로 출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고향땅인 홍성을 찾지 않았고, 첫 번째 부인의 소생인 아드님과 대면하기조차 꺼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김영식 작가가 출가에 뒤이어 건국훈장인 대한민국장까지 수여받은 한용운 선생의 공로를 언급하였다. 하지만 부인의 봉분과 더불어 처음 알게 된 선생의 행적에 참가자들은 뜨악한 표정들이었. 게다가 승려임에도 두 차례의 결혼 경력은 지금이나 당시에도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임에 틀림없다. 

'상남자셨구나.' 

승려신분으로 독립운동에 그리고 두 차례의 결혼을 떠올리며 참가자들 사이에 묘한 웃음과 분위기가 감지된다.

김영식 작가가 고은 시인의 한용운 평전에서 지적된 내용을 언급한다. 『…연설에 뛰어나고 지조가 강해 지도자적인 능력을 갖추었으나, 수시로 파계를 한 승려답지 않은 행동, 첫 번째 처와 아들에 대한 무정한 처사, 문학적으로 자기보다 앞선 최남선에 대한 시기심...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한용운 평전은 위인의 무조건적인 신격화 또한 우리의 눈을 가리는 행위로 경계해야 할 점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용운 선생이 총독부에 보낸 탄원서와 조선불교유신론에서는 대처의 의미를 짐작할만하다조선불교의 부흥을 위해, 승려가 거지행각을 하면서 탁발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결혼도 하고 가정도 가져 안정된 바탕에서 승려생활을 해야 불교가 발전할 수있다는 소신이었다.


만해는 기미독립운동 민족대표의 33인 중 끝내 지조를 지킨 오세창 등과는 죽을 때까지 교류하였으나, 변절한 최린, 최남선과는 상종하지 않은 것으로 전한다. 한용운이 집을 비운 사이, 최린이 찾아와 딸에게 용돈을 주고 갔는데, 그 돈을 들고 최린의 집에 찾아가 내던진 일화는 만해의 비타협적 생각을 가히 짐작할만하다.

만해는 1944년 지병인 신경통으로 와병하다가 독립을 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시신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홍제동 화장터를 피해 미아리에서 불교식으로 화장을 하고 남은 유골을 망우리 묘지에 안장했다.

 

수채화같았지만 절망적이었던 사랑

1938년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한국명 이남덕)는 미술실기 수업이 끝나고 우연히 수돗가에서 나란히 서서 그와 붓을 빨게 되었다. 조선인 학생으로 2년 선배인 그는,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운동과 노래까지 잘해 당시 여학생들의 선망이 대상이었다. 수돗가에서 붓을 빨던 일을 계기로 둘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하지만 졸업과 동시에 그는 일제가 강점하고 있던 조선땅으로 귀국해야 했다. 편지를 주고 받으며 아쉬움을 달래던 마사코는 해방이 채 되기도 전인 19454월 혈혈단신 현해탄을 건너와 5, 그의 고향인 원산에서 결혼한다. 그의 남편의 이름은 이중섭.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부산과 제주를 전전하는 궁핍한 생활 끝에 병을 얻어 두 아들과 1952년 일본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1953년 친구의 도움으로 잠시 일본에서 가족들과 해후하였으나, 일시체류 신분이기에 다시 기약없는 이별을 맞아야 했다.

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다시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일본입국 비자를 받기 위한 이중섭의 노력은 절박한 것이었다.

마사코가 일본에서 어음을 주고 사 보낸 책을 이중섭이 팔았지만, 결국 판매대금은 그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후배가 중간에서 횡령을 한거죠. 그리고 이중섭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준게 1955년 서울과 대구에서 열린 이중섭 개인전이었습니다. 전시회는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그림을 외상으로 가져가 그림값을 지불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그림을 훔쳐가는 사람도 있었던 겁니다...

처지를 딱하게 생각한 친구들이 돈을 모아 밀항선을 타기를 권했지만, 그 돈마저 어떤 시인이 며칠만 쓰고 돌려준다며 가져가 결국 받지 못했다.

김영식 작가가 말을 잇는다.


화가 이중섭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그림 황소를 보면, 석양의 붉은색을 배경으로 누런 소가 슬픈 눈으로 우는 듯 하는 모습입니다만, 그게 바로 이중섭의 모습이었을 겁니다. 황소처럼 힘세고 야성적이지만, 온순한 성격의 이중섭은 세상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 후, 이중섭의 우울증은 극에 달했다. 일본에서 온 아내의 편지는 뜯지 않았고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황달, 영양실조, 간장염이 발병하게 된다. 그리고 1956년 서대문의 서울적십자병원에서 죽은 후, 무연고자로 처리돼 있다가 사흘 만에 고향 친구인 김병기에 발견된다. 그리고 홍제동 화장장에서 화장돼 유해의 반은 망우리에, 그리고 나머지는 일본의 가족들에게 전해진다. 

 

원했던 혹은 원치 않았던 '이별'의 엇갈린 운명

오로지 그림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던 이중섭에 비해 만해는 종교와 속세를 오가며 불교개혁운동과 독립운동을 벌인다. 1952년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가족과 생이별을 겪어야 했던 이중섭에 비해, 자기의사로 속세와 이별을 결심했던 만해의 경우는 다를지 모른다. 하지만 종교에 대한 귀의와 잔인한 시대의 가슴 아픈 이별도 저마다 타고난 운명을 넘어서지 못 하는 걸까?

대향 이중섭이 잠시 일본에서의 가족과 짧은 해후이후, 가족을 만나기 위한 노력은 필사적인 것이었다. 서울과 대구에서 개최한 개인전의 실패는 그를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하였다. 그리고 절박한 상황에서 시인이었던 친구의 배신은 의지할 곳 없는 중섭을 철저히 파괴해 버렸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은 시인 구상이 이중섭의 2주기 추도기에 기고한 동아일보 기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 세상에서는 중섭이 병들어 미쳐 죽었다고도 하고 굶어 죽었다고도 하고 자살했다고도 한다. 정신병원엘 두 차례나 입원까지 하였으니 병들어 미쳐 죽은 것도 사실이요. 먹을 것을 공궤치 못했으니 굶어 죽인 것도 진상이여, 발병 1년 반 그나마 식음을 완강히 거부했으니 자살했다 하여도 무방하리라. 그러나 그를 살게 하고 죽게 한 것은 오로지 고립이었다. 중섭은 너무나 그림밖에 몰랐다. 그의 생존의 무기란 유일 그림뿐이었다...”

고뇌하는 이중섭(친구이자 화가 한묵이 그린 스케치. 1954년 스케치)


출가를 통해 세상과 이별하고, 승려의 길을 선택한 만해 한용운의 삶도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았지만, 속세와 종교 사이에서 끊임없는 번뇌가 예상된다. 이미 한 차례의 결혼 이후 출가 그리고 재결혼 등은 승려의 파계를 논할 정도로 당시 시대에서는 파격적인 행동으로 보여 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교에 귀의한 몸으로,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의 지조를 지키기란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이중섭은 그렇게 그리워하던 가족들을 살아서 만나지 못했다. 그의 무덤에 세워진 비석은 사망 1년 후, 후배 차근호가 세운 것이다. 비석 오른편에 이중섭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아들 태현(야스가타)과 태성(야스나라)의 부둥켜안은 모습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만해 한용운 선생은 승려였으나, 결국 부인과 무덤을 나란히 하게 된다.

이중섭 묘비는 그가 사망한 지, 1년 후 차근호에 의해 세워졌다.


승려로서 속세와 이별을 했던 한용운 선생, 전쟁과 가난으로 인해 가족과 원치 않는 이별을 해야 했던 화가 이중섭. 원하던 원치 않았던 두 개의 이별의 결과, 설사 다른 시대를 살아갔을 지언정 확연하게 엇갈린 운명을 확인하게 된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세속적 삶의 만남에서 두 분의 생애가 다소나마 뒤바뀌었다면 어떨까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운명은 본래 희망한대로 이뤄지지 않는 인연과 같아 손길이 닿지 않는 아득한 곳에 있다며, 이중섭 묘비의 들꽃이 고개를 떨굴 뿐이다.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소처럼 걸음을 옮기면서 안간힘을 다해 제작을 계속하고 있소...(19541121일 일본의 아내에게 보낸 이중섭의 편지중)


자료참조 '그와 나 사이를 걷다' (김영식 저/호메로스/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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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금호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사무국장


삶과 죽음 그리고 세대를 가르는 경계, 망우리.

젊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지명이고 30대 중 후반, 그러니까 80년대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공동묘지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망우리. 망우리는 그렇게 삶과 죽음을 나누는 장소이자 특정 세대를 가르는 경계이기도 하다. 근심을 잊는다는 뜻의 망우(忘憂)라는 지명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연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양에 새롭게 도읍을 세운 태조가 지금의 건원릉(구리시 인창동 소재)에 자신의 묘를 정하고 환궁하던 중, 이 고갯마루에서 이제야 오랜 근심을 잊겠다(忘憂)’고 말한 것이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여부를 떠나, 태조의 건원릉이 위치한 동구릉과 직선거리로 2km 남짓한 거리에 위치해 있어 망우리는 세인들이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1914년 일제가 단행한 행정구역 변경 이전만 하더라도 망우리(忘憂里)는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忘憂里面)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하사한 지명 그리고 인근의 동구릉과의 위치 등을 고려할 때 행정구역의 격이 그만큼 높았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일제는 양주군 구지면(九旨面)와 망우리면(忘憂里面)자를 따서 구리(九里)로 병합시킨다. 그리고 망우리면(忘憂里面)의 잔여 지역을 리() 단위인 현재의 망우리(忘憂里)로 귀속한다. 사실상 행정구역의 지위에서 강등당한 셈이다. 망우리의 수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일제는 경성의 묘지가 부족하자 1933년 망우리를 공동묘지로 조성하게 된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과 동구릉이 조성된 산줄기에 평민의 공동묘지를 만든 의도를 짐작 못할 바 아니다.

 

품위를 잃은 장소와 가치가 떨어진 인간의 공존

그 후, 정확히 40년 동안 공동묘지로 매장이 이루어졌던 망우리. 이제 사람들의 기억 속에 품위 있던 장소는 죽음과 어둠의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당시 대학생들이 미팅에서 망우리에 산다고 말하면 퇴짜 맞을 정도였다. 특히 60년대 70년대 산업화의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망우리는 원해서도 가고 원치 않아도 갈 수 있는 슬프고도 두려운 공간이었다.

오죽하면 동대문에서 망우리로 가는 시내버스 여차장이 청량리중량교망우리가요~” 라고 속사포 랩으로 행선지를 외치면, 사람들에게 환청처럼 다른 외침으로 들리기도 했다.

차라리죽으려고망우리가요~'

품위를 잃은 장소와 가치가 떨어진 인간이 시대를 공존하며 무수한 사연과 애환을 만들어 낸 곳. 망우리 인문학 강의는 차라리 죽으려 망우리행 버스에 몸을 싣는 것이다. 코트 주머니에 소주병을 꽂은 채 몸을 휘청거리며 지난시절 누군가 버스에 올랐던 것처럼, 현재의 나를 그곳에 묻기도 하고 삶을 물으러 떠나는 길이다.

 

망우리 인문학 강의를 열다.

4월 망우리 인문학 강의는 강남시문학회 회원을 비롯해 27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30일 진행됐다. 인문학강의는 망우리 근현대 역사인물의 묘역을 순례하며 그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세상과 사람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되짚어 보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결정적인 삶의 순간에 나를 대입해 시간과 공간 그리고 나와 그의 벽을 허무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다. 인문학 강의코스는 주로 이인성(화가)-도산 안창호(독립운동가)-태허 유상규(의사/독립운동가)-아사카와 다쿠미(총독부 산림청 직원/민예학자)-혜관 오긍선(의사/사회사업가)-소파 방정환(아동문학가)-최신복(아동문학가)-위창 오세창(서화가)-만해 한용운(독립운동가)-죽산 조봉암(독립운동가/정치가)-남파 박찬익(독립운동가)-최학송(문학인)-계영묵(문학인)-대향 이중섭(화가)-박인환(시인) 순으로 진행된다. 본 코스는 서울시가 현재 조성하고 있는 인문학길의 코스와 일치한다. 하지만 매번 동일한 코스와 인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와 참여자들의 관심도에 따라 코스 일부가 추가되거나 변경되기도 한다. 강의 일정은 상반기 5월과 6월 마지막주 토요일에 강의를 열게 된다.

인문학 강의의 강사는 망우리 근현대사 인물 소개서인 그와 나 사이를 걷다의 저자이자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리분과위원장인 김영식 작가가 진행한다.

             

그는 부산 출생이지만 4살 때 상경하여 망우리공원과 가까운 중랑구 중화동과 상봉동에서 대학 때까지 살았다. 2006년부터 일주일에 한 번꼴로 현재까지 500회 이상 망우리공원을 오르내리며 무덤의 비명과 근현대 인물들의 삶을 조명하였다.

 

조선이 낳은 비운의 천재화가 이인성

4월 망우리 인문학 강의에서 가장 주목받은 인물 중 한 사람이 바로 화가 이인성이다. 김영식 작가의 소개에 따르면, 화가 이인성은 1930년대 마라톤 영웅 손기정과 무용가 최승희만큼 유명한 존재였던 모양이다. 당시 어른들은 그림 그리는 아이에게 커서 이인성 될거냐?”라고 농담을 건넬 정도였다고 한다. 1912년 대구에서 출생한 이인성은 1928(17)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서 촌락의 풍경이라는 작품으로 특선을 차지하며 주목을 받게 된다. ‘세계아동예술전람회는 소파 방정환등이 운영하는 개벽사가 주최한 것인데, 어떤 면에서는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 이인성의 천재성을 발굴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타계한 지 20년 가까이 차이가 남에도, 방정환과 이인성은 모두 망우리공원에 잠들면서 사후까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화가를 환쟁이라고 천대하던 시절, 1929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계기로 이인성은 집안의 반대를 극복하고 당당히 소년 천재화가로 주목받는다. 그 후 2년에 걸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과 특선을 수상하게 되고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1932년 이인성 화가가 19세 되던 해,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일본 화가들을 제치고 입선을 거머쥔다. 이 일을 두고 김영식 작가는 김연아가 피겨 스케이팅에서 올림픽 금매달을 차지한 것과 같은 역사적 사건이라고 언급하였다.

일본 유학시절 만난 부인 김옥순은 학력이 일천한 이인성과 집안의 반대로 어렵게 결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1924년 부인이 결핵으로 짧은 생을 마치면서 실의에 빠진 이인성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된다. 걸핏하면 폭음과 주사(酒邪)를 일삼았던 것이다. 두 번째 결혼마저 실패하고 세 번째 결혼까지 치루지만, 1950년 어이없는 사고로 죽음을 당한다. 김영식 작가는 그 당시의 상황을 눈앞에 그려내듯 설명했다.

6·25 전쟁으로 어수선한 상황에 경찰의 불심검문이 수시로 이뤄지는 분위기였겠죠. 화가 이인성이 술에 취한 채, 거리를 걷다가 행색을 수상하게 여긴 경찰관에게 붙들린 거예요. 그런데 이인성이 술도 마셨겠다, 경찰관에게 다짜고짜 조선의 천재 이인성을 몰라보느냐.”고 호통을 친 겁니다. 주눅이든 경찰관이 이인성을 놔주고 경찰서로 돌아와 도대체 이인성이 누구냐?”고 물었겠죠. 그러자 주변에서 그 동네에 술주정뱅이 환쟁이가 있지...”라는 말을 들으니, 한낱 환쟁이에게 당한 일이 화가 난겁니다. 그래서 총을 소지하고 이인성의 집으로 찾아가 말다툼과 몸싸움을 벌이다가 실탄이 발사된 거죠. 결국 그 일로 이인성이 숨지고 맙니다. 그의 나이 38살이었습니다.

황당하기까지 한 조선의 천재 이인성의 죽음에 이르러 참가자들이 하는 탄식과 실소 그리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깊은 상실의 시대를 살다 간 시인 박인환

4월 인문학 강의에서 관심을 끌었던 다른 인물이 있다면, 코스의 마지막 묘역에서 만나는 시인 박인환이다. 아마도 단체로 참가신청을 하신 분들이 시문학회 회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화가 이중섭의 묘역에서 강의를 마치고 망우리 관리사무소 쪽으로 이동하다 보면, 오른편에 박인환의 연보비가 나타난다. 비석에는 그의 시 목마와 숙녀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비석의 맞은편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자 김영식 작가가 스마트폰에 저장된 노래를 틀었다. 박인희가 부른 세월이 가면이었다. 이 노래 가사도 명동의 선술집에서 박인환이 즉흥적으로 시를 짓고 이진섭이 곡을 붙여 그 자리에서 나애심이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진다.)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시()였다. 박인환의 묘 앞, 사각형의 묘비에도 시인 박인환의 묘라 적혀있고 그 밑으로 세월이 가면의 첫 문장이 새겨져 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이 시를 짓기 하루 전, 박인환은 첫 사랑이 묻혀 있는 망우리 묘지에 다녀갔다고 김영식 작가는 설명한다. 평소 술을 좋아했던 그였기에, 코트 주머니에 소주병을 꽂은 채 몸을 휘청거리며 망우리행 버스에 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유작시 세월이 가면을 완성한 사흘 후인 1956320, 만취한 채 집에 들어와 잠을 자다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31. 세탁소에 맡긴 봄 코트는 돈이 없어 찾지 못했고, 겨울 코트를 그대로 입은 채였다. 부음을 듣고 맨 먼저 달려온 친구 송지영이 박인환의 뜬 눈을 감겨주었다.

박인환의 또 다른 시 목마와 숙녀에 대한 김영식 작가의 설명이 이어진다. “도대체 목마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그리고 우연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된 고대 무덤의 부장품인 목마를 본 경험담 그리고 순명효 황후 장례행렬 사진 속에서 종이로 만든 백마를 통해 죽음의 동반자임을 설명했다. 고급진 문장과 달달한 시어(詩語)의 느낌과 달리 1950년대 전쟁의 비극과 죽음, 이별, 허무 등의 시대적 고뇌를 박인환의 탁월한 언어적 감수성을 통해 시로 형상화된 것이다.

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시에 사용된 박인환의 세련된 수사와 평소 그의 행색 등으로 인해 남성을 대표하는 속물로 문단의 비난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전쟁의 참혹한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현실인식이 강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덧붙였다.

그러한 이유에서 일까?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에 대한 오해는 필자의 고교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목마와 숙녀는 시화전의 단골 주제였고 교실마다 한 점씩 걸리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박인환이 작사한 세월이 가면을 부른 가수 박인희의 시낭송 음반도 유행이었다. 모국어지만 낭독하면 혀끝에서 감미롭게 굴려지는 시어(詩語)들이 마치 유창한 외국어를 구사하는 듯 했다. 알 듯 모를 듯 낭만적인 언어들은 지적 허영심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잠자리 뿔테안경을 쓴 친구가 같은 반에 늘 한 명쯤 있기 마련이다. 까칠하기로 유명한 국어선생님 수업시간에 이 친구가 목마와 숙녀의 시낭송을 자원했다. 목소리가 좋았던 친구는 자신의 낭송에 점점 도취돼 가는 듯 했다. 그렇게 시낭송이 끝났다. 선생님의 얼굴에 비웃음 혹은 경멸의 빛이 스쳐 지났다.

이 시가 그렇게 낭만적으로 읽히든?”

 

상실의 두 빛깔

4월 망우리 인문학 강의에서 관심을 가진 두 인물은 공교롭게도 '상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인성은 1942년 아내 김순옥의 사망으로 실의에 빠진다. 절망의 시간을 술로 보내던 화가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준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 최고의 화가라는 타이틀이었을 것이다. 술로 인해 타인과의 불화가 이어지고 괴팍한 성격에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수록, ‘조선의 천재 이인성이라는 변할 수 없는 사실에 집착했을 법하다. 오로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건 '영광스러운 과거' 밖에 없었던 가난한 현실이, 그를 비극적 운명으로 몰고가지 않았을까.

목마와 숙녀에서 시인 박인환은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라면서 2차 대전 후, 허무주의에 시달리다가 템즈강에 투신 자살한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상실을 추모한다. 그리고 6·25 전쟁 이후의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는’ 현실 속 상실감을 토로한다. 어쩌면 시인 박인환의 상실감은 뿌리 깊은 것인지도 모른다. 앞서 밝힌 것처럼 이미 20대에 첫사랑을 잃었고, 그 역시 세상과 작별하기 나흘 전, 망우리에 묻힌 첫사랑을 찾는다. 그녀의 묘를 찾은 다음날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가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처럼 보여지지 않는다.  '목마와 숙녀' 역시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인해, 시인 박인환이 지병처럼 앓고 있던 세상에 대한 상실감을 버지니아 울프의 죽음에 투영시킨 건 아닐까.   

인문학 강의의 마지막 코스인 박인환 시인의 묘역에 앉아 그와 이인성이 겪은 상실감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게 나라면?’이라 자문해 본다. 나역시 그들보다 뛰어난 인내와 처세를 발휘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30대에 요절한 두 천재들의 삶을 무어라 평가할 수 있을까? 하지만 누구도 타인의 삶을 평가할 자격은 없다. 살아있는 사람이 목마를 타고 떠난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럴 수 있겠다공감하며 그들의 삶에 고개 끄덕여 주는 것밖에.


자료참조 '그와 나 사이를 걷다' (김영식 저/호메로스/2015)

5월, 6월 망우리공원 인문학강의 신청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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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천 답사, 나는 부끄러워졌다

영주출신으로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이 많았던 답사

이튿날(2일) 아침 박 선생은 일찍 일어나서 물새를 보러가고 나는 늦잠을 잤다. 7시가 다 되어 일어나 세수를 한 다음, 아침을 준비했다. 아침이라고 해야 라면에 밥을 한 공기씩 말아, 김치와 함께 먹는 것이 전부였지만 꿀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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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깝작도요새 내성천을 거닐면서 발견
ⓒ 박용훈



후식으로 커피를 한 잔하고는 오전 8시 40분경에 무섬마을에서 출발하여 물길을 따라 4KM정도 아래에 있는 문수면 조제리까지 천천히 걸었다. 무섬마을 아래쪽에 별로 필요도 없어 보이는 순전히 관광객을 위한 외나무다리가 하나 더 만들어져서 있어 마음이 아팠다. 외부인의 방문이 늘어날지는 몰라도, 또 다른 자연 파괴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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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등할미새 내성천
ⓒ 박용훈



아무튼 박 선생과 나는 오후 5시까지 중간에 식사시간 30분을 제외하고는 계속 걸었으니 8시간 정도 쉬지 않고 나무그늘도 없는 모래사장과 물속을 걸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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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마물떼새 내성천
ⓒ 박용훈



무릎까지 오는 긴 고무장화, 모자와 선글라스, 선크림까지 얼굴과 목, 손과 팔에 잔뜩 바르고 나갔다. 온도계가 한낮에는 25℃를 나타내고 있었지만, 체감 온도는 30℃는 넘을 것 같았다. 반팔과 긴팔을 번갈아 가면서 입고 벗고 하면서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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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종 내성천에서
ⓒ 박용훈



'4KM의 거리를 물길을 걷는다고 하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 것이 아니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면 답은 간단하다. 박 선생은 카메라에 GPS(Global Positioning System, 위성에서 보내는 신호를 수신해 사용자의 현재 위치를 계산하는 위성항법시스템)까지 장착하여 지난 사진을 확인해가면서 과거와 현재의 변화된 모습을 비교하는 사진을 찍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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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훈 선생 초록사진작가
ⓒ 김수종



덕분에 놀랍도록 변한 모래사장의 풍경과 내성천의 오늘을 비교 확인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GPS를 사용해도 약간의 위치 차이와 특히 각도를 맞추는 일은 쉽지 않아서 포인트를 정하고도 3~4번씩 자리이동과 위치확인 및 각도를 조절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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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교 사진 옛 사진과 현재의 모습의 비교
ⓒ 김수종



생각보다는 지루한 작업이었지만 예전 사진을 보면서 감사하게 따라 다녔다. 그리고 정말 많이 놀랐다. '내성천이 습지가 되고 산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눈물이 났다. "영주댐이 건설되면서 2012~13년 집중적으로 댐 상하부에서 골재채취를 했고, 내성천은 더 빨리 파괴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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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교 사진 정말 모래사장이 많이 줄었다
ⓒ 김수종



나는 지난 2011년 봄, 홍의락 국회의원, 환경연합 염형철 사무총장 등과 함께 봉화군 해저리에서 무섬마을까지 내성천을 따라 걸은 적이 있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보니 나름 당시에는 모래강이 살아있었던 최후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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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슬기 다슬기도 조금 있네
ⓒ 김수종



그러나 지금은 곳곳에서 악취도 나고, 모래사장은 여뀌와 버드나무가 자라고, 물고기와 물새도 많이 줄었다. 특히 조개류는 그 수가 더 많이 줄었다고 한다. 수달도, 먹황새도 줄었다. 모래유입이 줄어드니 생태계가 전반적으로 급속하게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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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뀌와 버드나무 이제는 버드나무까지
ⓒ 김수종



그래서 인지 박 선생은 "아무리 목이 말라도 냇물을 그냥 마시지는 마세요, 배탈이 나거나 두드러기가 나는 경우도 있어요"라고 했다. 중간에 목이 말랐던 나는 박 선생 몰래 냇물을 조금 마셔봤지만, 다행스럽게도 배탈은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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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달, 고라니, 황새 발자국 역시 짐승들이 많은 듯
ⓒ 김수종



나는 물길을 따라 걸으면서 박 선생에게 어린 시절 영주 시내를 관통하는 서천과 이곳 내성천에 수영하던 기억과 물고기를 잡던 이야기를 했다. 민물고기 이야기를 하다가 운 좋게 중지 정도 되는 크기의 모래무지를 한 마리 발견했다. 잡아서 사진을 찍고 놓아 주었다. 그리고 재첩과 다슬기도 조금 주웠다. 

따라 다니는 나는 조금 지루하고 덥고 힘들었다. 하지만 너무도 묵묵히 좌표를 찾고 사진을 찍으면서 다니는 박 선생의 모습에 감동하여 힘들어도 힘들다는 내색 없이 따라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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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첩 작은 재첩이 조금 있다
ⓒ 김수종



간간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나는 그의 정성과 내성천에 대한 깊은 애정도 발견했다. "이제 거의 희망이 없어진 내성천에서는 올해를 마지막으로 사진기록 작업을 끝낼 예정이다"고 했다. 이제는 파괴된 내성천의 주인인 영주출신으로 너무 마음이 아팠다. 

하긴 자신의 고향 마을까지 수몰지로 만든 현역 국회의원이나, 국가사업이라며 당연히 하자고 선동했던 전임 시장에 비하면, 가끔이라도 찾고 안타까워하는 내가 조금은 나을 수도 있다고 자족해 보기도 한다. 아무튼 안타깝고 부끄럽고 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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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떡 서울에서 산 떡으로 점심
ⓒ 김수종



다섯 시간 가깝게 물과 모래밭을 오가면 사진 작업을 하고는 잠시 쉬면서 서울에서 가져온 떡을 두 조각씩 나누어 물과 커피와 함께 점심을 했다. 이동식으로는 정말 떡이 최고다. "아직은 날이 서늘하지만, 한여름에는 막걸리 냄새가 나는 발효된 술떡 밖에는 먹을 것이 없다"고 했다. 술떡을 좋아하는 나는 영주에 유명한 기지떡(술떡)집이 여러 곳 있다고 소개를 했다.

박 선생은 "영주시는 문화유산인 부석사, 소수서원 같은 것을 관광자원으로 집중 홍보하고 있다. 하지만 영주에는 자연유산인 소백산과 내성천이 주는 혜택이 더 크다. 물론 가능성도 더 많은데, 이것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에는 무섬마을도 한옥보다는 모래사장이 더 중요하다. 특히 세계적인 모래하천인 내성천을 보호하는 일에 영주댐 철거는 필수적인 사항이다"라고 영주사람이 나를 꾸짖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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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섬마을 새로만든 외나무다리 조금 그렇다
ⓒ 김수종



정말 나도 많은 것을 배웠다. 물길을 따라 내려가면서 왼편의 석탑천 유출구부터 4~5KM는 안동 땅이고, 오른편은 전부 영주 땅인데, 안동은 주로 바위와 자갈이 많고, 영주는 모래뿐이다. 안동에서 보면 산이 막혀있고, 영주는 바로 앞에 냇물이 펼쳐지는 모래사장이다. 가뭄도 막아주고, 농사에도 큰 보탬이 되고, 물고기도 많았던 내성천은 영주사람들에게는 보물이었다.

그런데 그 보물 망치는 일을 영주사람들이 주도했다. 특히 지역의 유력인사들이 앞장을 서서 댐건설을 주창했으니 정말 답답한 꼴이다. 모래강은 풀이 자라고 나무까지 자라는 습지가 되면 다시 원상회복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제라도 영주댐을 없애지 않으면 1조 원을 들어 지은 영주댐이 후일 10배~100배 이상의 피해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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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뀌 온통 풀밭이다
ⓒ 김수종



너무 답답한 마음을 안고 식사를 마치고는 다시 천천히 물길을 따라 두어 시간을 더 걸어 조제리에 도착하니 오후 5시다. 영주로 가는 시내버스는 7시에 온다고 하여, 바로 석탑교 다리를 건너 안동시 북후면 석탑리로 가서 안동시내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안동시외버스터미널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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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래무지 중지만 하다
ⓒ 김수종



봉화, 영주와 예천을 흐르는 세계적인 모래강인 내성천, 그리고 그 중앙에 자리하여 모래의 이동을 막고 있는 완공직전의 영주댐. 반드시 후손들에게 소중하게 물려주어야 하는 고귀한 우리의 자연유산, 그리고 물길을 따라 느낄 수 있는 유교문화. 정말 생각이 많아졌고 마음 아팠고 공부할 것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낀 낙동강 상류의 내성천 답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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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묘비석, 망우리공원으로 돌아오다


글 / 김수종 회원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 지하에 잠자고 있던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의 두 번째 묘비가 지난 1일 오후 3시, 43년 만에 아차산 자락의 망우리공원으로 돌아왔다. 

각종 개발 사업으로 사라져버릴 위기에 처해 있는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시민들의 기부금과 증여를 통해 보존대상지를 매입하거나 확보해 보존하는 활동을 하는 단체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와 서울시설공단 등의 노력으로 도산공원의 '도산 안창호 기념관' 지하에 보관되어 있던 옛 묘비가 망우리공원 '도산의 옛 묘터'로 귀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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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창호 선생 다시 온 묘비 제막식
ⓒ 김수종



이 비는 지난 1973년 선생의 묘와 함께 도산공원으로 옮겨졌으며, 이후 부인 이혜련 여사와 합장으로 내역 추가, 한문을 한글로 바꾸는 작업, 비문을 쓴 이광수의 친일 행적 등의 문제로 2005년 11월 9일 선생의 탄신일에 새로운 비로 바꾸었다. 이로 인하여 옛 묘비는 기념관 지하에 보관돼 있었다.  

이 행사를 주관한 한국내셔널트러스트 김금호 사무국장은 "안창호 선생의 묘역이 망우리공원에 들어선 이유는 선생이 유언으로 묘터를 지목했기 때문이다. 도산은 자신보다 2년 먼저 눈을 감은 애제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유상규의 묘 곁에 묻어 달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유상규 선생은 3·1 운동에 참여했고, 도산이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할 때 비서를 지낸 인물이다. 두 선생의 인연을 들은 사람들은 교육가, 정치가로만 알려진 안 선생의 인간적 면모를 알게 돼 감동 받곤 한다. 2005년 이후 10년 이상 기념관 지하에 보관돼 온 묘비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뒤 안 선생의 옛 묫자리로 43년 만에 돌아왔으니 서울시민과 자라나는 세대에 귀감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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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우리공원 유상규의 묘소
ⓒ 김수종



도산이 1938년 3월 10일 61세로 서거한 후 유언에 따라 망우리공원 유상규 묘역 곁에 장례를 치렀고, 암울한 시기라서 작은 묘비석만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에 옮겨온 두 번째 묘비는 1955년 도산기념회에서 만든 것이다. 


▲ 안창호 돌아온 묘비
ⓒ 김수종




이 비석은 오석(烏石. 검은 화강암)으로 높이 2.6m의 방부개석 방식으로, 뒷면 비문(비음기)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도산의 곁에서 일하기도 했던 춘원 이광수가 납북 전에 지어 놓은 것을 서예가 원곡 김기승이 썼으며, 앞면 비문(비양기)의 제자(題字)는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썼다. 

앞면에는 한자로 '배우고 가르침에 끊임없이 애쓰시고 슬기와 큰 덕을 바로 세워 사심은 우리나라와 겨레를 위함이셨네. 바르고 사심 없이 사람을 대함에 봄바람 같고 일을 행하심에 가을 서릿발 같으셨네'라고 썼다. 뒷면에는 안 선생의 이력이 빼곡히 적혔다. 

도산공원의 묘비를 망우리공원으로 다시 옮기게 된 동기는 2014년 서울시의 요청으로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서 추진한 '망우리공원 인문학의 길 연구용역'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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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창호 묘비 제막식
ⓒ 김수종



이 연구용역은 망우리공원에는 한용운, 방정환, 이인성, 이중섭, 박인환, 조봉암, 김상용 등 근현대를 대표하는 예술가와 애국지사들의 무덤을 통해 그들의 삶과 역사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교육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 망우리공원 연구서인<그와 나 사이를 걷다>의 저자 김영식 작가는 "'묘역 따라 역사여행'라는 교육프로그램으로 일반시민과 학생이 참여했다. 독립운동가로 너무나 알려진 도산 선생의 인간적인 면과 사제지간을 뛰어넘는 깊은 우정에 많은 이들이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도산공원에 보관된 옛 묘비라도 본래의 자리인 망우리공원으로 옮겨야겠다고 결의를 다졌다"고 전했다. 

김 작가는 이어 "이후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연구용역 보고에서 도산 선생의 묘비 이전에 대해 서울시와 시설관리공단에 제안했다. 2015년 7월, 흥사단과 도산기념사업회에도 적극 협조의사를 밝힘에 따라 묘비 재이전 행사가 성사된 것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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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우리 공원 연구자 김영식 작가 이번에 상주와 같은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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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사회를 본 김금호 사무국장
ⓒ 김수종



김금호 사무국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번 도산 안창호 묘비 이전 제막식 행사에는 도산이 독립운동을 하던 시기에 작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Auld lang syne' 버전의 애국가가 4절까지 울려 퍼졌고, 김영식 작가의 경과보고, 유족인사, 축사, 제막, 한철수 시인의 비문봉독, 잔 올리기 순으로 거행되었다. 행사장에는 안 선생의 조카사위 김봉성의 아들인 김선영씨, 서상목 도산기념사업회 이사장, 이윤배 흥사단 이사장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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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없는 목소리만 믿고 움직여야 했던 함평 임야의 기증

1월초, 전남 함평 소재의 임야와 토지를 기증하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당시 기부의사를 짤막하게 밝힐 때만 해도 사실, 성사될지 의심스러웠다. 적어도 자신의 자산을 기증한다면, 만날 약속을 정하거나 아니면 방문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증대상인 임야와 토지가 가족 공동소유라 했다. 가족들이 공동으로 소유한 상속자산은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고, 누구 한사람이라도 반대하면 기증은 불가능하게 된다. 최대한 성의를 다해 기증의 절차를 설명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어렵겠다’ 는 회의감이 밀려왔다. 전화를 걸어 온 이 남성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어쩌면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사람이거나 다소 치기에 휩싸인 상태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이 남성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기증에 대해 가족들 모두의 동의를 얻었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 기증하면 영구보전이 가능한 지 재차 물어왔다. 현재 보전상태를 확인한 후, 결정할 수 있다고 전과 동일한 답변을 드렸다. 그러자 그는 확인해 줄 수 있냐고 했다. 조용한 말투였지만 서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전화상으로 통성명만 했을 뿐, 한 번도 본적 없는 사람의 말만 믿고 함평까지 내려가는 길은 불안과 공허감이 꼬리를 물었다. 게다가 혼자만의 답사가 아닌, 운영위원장님을 비롯해 숲 전문가들까지 대동하는 터라 부담이 더했다. 약속이 어긋나기라도 한다면 사리분별도 못하는 실없는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8시간이 넘도록 바쁜 분들을 고속도로에 묶어 놓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미래를 위해 새로운 가능성에 기대를 걸다

비록 전화상의 약속이었으나, 대상지역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는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임야의 면적은 67,835(20,550)로 필지의 최정상부는 해발 310m의 높이에 위치해 있다. 멀리 함평 앞바다의 풍경이 내려다보이고 선산으로 이용했다는 말처럼 볕이 좋은 남향이었다. 임야의 일부가 선산으로 이용된 흔적도 보이지만 묘는 모두 이장된 상태였다. 임야의 식생은 주로 소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그 외 사스레나무, 송악, 비목, 감태나무, 춘란 등 난대 식물들도 넓게 분포했다

이병천(산과자연의친구 우이령사람들)회장님은 과거 편백나무로 수종갱신을 시도했다가 화강암 지반 탓에 실패한 지역이라고 설명하셨다회장님의 말대로임야 곳곳에 유려한 모양의 화강암 바위들이 넓게 펼쳐져 숲의 운치를 더하고 있었다일반적인 산지의 나무와 달리화강암반에 뿌리내린 소나무들은 몸통과 줄기가 휘어지고 얽혀 수형이 아름다웠다.

전문가들의 평가는 현재의 숲 보전상태가 좋다는 점에 이견이 없었다. 그리고 당장 이용이 불가능하더라도 미래의 활용가치를 염두에 두자고 입을 모았다지리적으로도 영광과 무안사이에 위치하면서 서해안을 끼고 있어 생태적 주제가 풍부한 곳이라는 장점도 언급됐다향후 내셔널트러스트가 전국적으로 확산된다면 이 임야를 남부지역 현장 교육장으로 활용하기에 적합하다는 의견도 제시됐다그리고 함께 기증을 약속한 농지(총 2,427/약 735)와 연계한 생태탐방과 숲체험힐링프로그램 등 다양한 시민교육의 장으로 활용가능성도 타진하였다.


복잡하고 번거로운 기증절차를 묵묵히 감수해 주었던 가족들

2월 개최된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이사회에서 함평 임야와 농지의 수탁이 최종 승인됐다. 좋은 취지의 기증이지만 이전등기를 위해서는 복잡한 증여절차를 거쳐야 했다. 법무사가 소유권이전에 필요한 서류를 확인해 주는 며칠사이, 또 연락이 왔다. 얼굴도 모르는 이 남성은 평소처럼 조용한 목소리로, 가능한 3월 초 안에 모든 증여절차를 마무리하고 싶다고 했다. 무엇이 그리 급한 걸까? 담당 법무사를 채근해 서류준비를 준비하면서, 등기이전은 실제소유주를 모두 만나 증여의사를 확인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참 복잡한 절차가 아닐 수 없었다. 함평의 임야와 토지는 78세인 어머니와 40대의 세 자녀의 공동소유다. 함께 거주하는 것조차 불투명한 이들을, 한날한시 한곳에 모여 달라는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끼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사회에서는 좋은 일을 하면서도 감내해야 할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하지만 기증하겠다고 밝힌 남성은 여러 가지 복잡한 서류와 가족들의 면담에 불편한 내색조차 드러내지 않았다전화상의 늘 평온한 목소리 그대로 어려운 부탁을 받아들였다.


믿으니까요(Trust), 믿으니까 할 수 있었던 겁니다

기증의사를 밝힌 얼굴도 모르는 남성과 그 가족들을 만나는 날. 소유권 이전등기를 위해 법무사님을 대동한 자리에 맏형을 제외한 가족 세분을 만날 수 있었다. 어느 가족이나 서로 비슷한 이미지와 분위기를 갖기 마련인데, 모두 순하고 반듯한 인상이었다. 특히 어머님은 80을 앞둔 나이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전화상의 목소리만 들었던 이모씨(44)를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눴다. 그는 형제들 중 막내였다.

법무사님이 함평 임야와 토지의 이전에 대한 동의여부를 확인하는 것을 시작으로 각종 서류에 날인이 이루어졌다. 가족들은 도장을 내주며 조용히 날인된 서류를 돌려보았다. 서류의 날인이 끝나고 소유권 이전 절차에 대한 설명이 진행됐다. 그리고 비로소 기증한 자산을 단체가 영원히 보전하겠다는 협약서의 내용을 설명하고 가족 모두의 날인이 이뤄졌다.

날인이 끝난 후,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일을 하셨으니 이번 기증에 대해서 가족들의 이름과 얼굴이라도 알리고 싶다는 바람을 말씀드렸다그러자 가족 모두 수줍은 듯 웃었고이씨의 누나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사실상 이번 기증에 대해 사진 한 장 이름 석 자도 남기지 않겠다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태도였다짧은 순간, 가족들 사이에 흐르고 있는 세상에 대한 공통된 이해와 서로간의 신뢰를 느낄수 있었다그 견고한 유대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처럼 여겨졌다

막내 이씨가 나직하게 말했다가족들의 이름과 얼굴이 공개되길 원치 않으며그 외 드러난 사실관계만을 알려주길 희망한다는 내용이었다이씨의 누나는 오히려, 이런 기회를 제공한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게 감사드린다고 전했다어머니는 자녀들의 고조부부터 잠들었던 곳이라 100년 가까이 집안 대대로 상속되었던가족들에게 의미있는 장소라고 말씀하셨다현재 묘는 모두 이장됐으나, 이곳의 처분이 자손으로서 도리가 아님에 가족 모두 공감했다 덧붙이셨다그리고 기증한 것이 오히려 흡족하며처음 마음 그대로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영원히 보전해 주길 당부하셨다막내 이씨는 그 자리에 없던 맏형의 이야기도 전했다맏형은 한국내셔널트러스트로부터 전달받은 기증협약서를 읽어본 후기증을 결정한 건 참 잘한 일이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쉽지 않은 결정을 해주신 가족들에게 감사를 드렸을 때막내 이씨의 말이 각자(刻字)처럼 마음속에 한 글자씩 새겨진다.

믿으니까요(Trust), 믿으니까 할 수 있었던 겁니다.”



가족간 유산을 둘러싼 분쟁은 우리현실에서 흔한 일이다그럼에도 이씨 가족들이 살아온 삶 속에서 어떤 계기 혹은 가치가 서로간의 견고한 결속을 이루었는지 궁금했다하지만 현재 이들 사이에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교감이, 어쩌면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안으며 살아 온 기억의 축척일 수도 혹은 종교적 신념일 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엇이든 묻거나 건드리지 않는 것이 이 가족에 대한 예의라는 확신이 들었다다만 이씨의 누나가 막내를 가리키며 우리 동생도 과거사회를 위해 특별한 봉사활동을 했었다고 말해 궁금증을 유발했는데이씨가 수줍게 웃으며 손사래로 누나의 말을 제지했다.

함평 임야와 토지를 기증한 가족들과의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일 수 있는 만남은가족들 사이에 흐르는 화목함 이상의 신뢰를 느끼며 아쉽게 끝을 맺었다. 

 

에필로그

그날 밤, 막내 이씨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국장님, 가 곧 외국으로 나가서 국내에 거의 못 들어오게 될 것 같습니다. 앞으로 혹시 연락하실 일이 있으면 제 누님께 연락을 취해 주세요.’ 국내에 거의 못 들어오게 될것 같다는 메시지를 보며, 그가 왜 기증을 서둘렀는지 짐작이 갔다.

그에게 답문자를 보냈다. ‘국내에 거의 못 들어오신다니 아쉽습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오랜 인연같이 느껴지는데, 이리 기약없이 헤어지게 돼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네요. 어디서든 항상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그로부터 마지막 문자가 왔다. ‘저를 낳아주신 조상님들께서 쉬셨던 곳이 좋은 단체와 인연을 맺을 수 있어 감사하고 마음이 참 좋습니다. (중략) 저도 내셔널트러스트에 대한 관심의 끈 놓지 않겠습니다. 건강하시고 항상 세상의 빛이 되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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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세계내셔널트러스트대회 참가기
Common Threads; Different Patterns

 


공동집필: 조명래, 박도훈

매 2년 마다 열리는 세계내셔널트러스트대회가 영국내셔널트러스트 주최로 16회를 맞이하여 영국 캠브리지에서 개최되었습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영국내셔널트러스트로부터 2인의 초청을 받고 배청 이사님의 후원으로 조명래 공동대표와 박도훈 부장이 참여하였습니다. 또한 문화유산국민신탁의 문승현 팀장이 동행하여 한국에서는 모두 3인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2015년 9월7~11일에 진행된 이번 16회 세계대회 주제는 '공통의 실타래, 다른 무늬(Common Threads; Different Pattern)'였습니다. 직역하자면 그렇지만 뜻은 새겨봄직 합니다. 'Common Threads'는 '공통적 맥락'을 뜻하는 용어로 세계 각국의 내셔널트러스트가 추구하는 공동의 목표와 가치를 뜻하며 'Different Pattern'은 지역별로 다른 문화와 제도에서 나타난 '무늬' 즉 지역 특성을 가진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을 말합니다. ‘21세기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의 역할과 목적’이라는 질문으로 시작한 이번 대회는 우리가 보호하고 있는 유산을 잠식하는 개발압력과 전 지구적 위협을 극복할 대안과 전략을 공유하는 것에 집중하였습니다.
이번 대회는 호주, 미국, 캐나다, 이탈리아, 포루투갈, 버뮤다, 인도네시아, 슬로베니아, 체코, 한국, 중국, 일본, 인도, 우간다, 짐바브웨 등 50여 개 국 70여 단체, 200여명의 참가자가 등록하였으며 숙소는 캠브리지대학 킹스칼리지, 전체회의는 캠브리지대 웨스트로드 콘서트홀에서 열렸고 개별 활동 프로그램들은 캠브리지 근처에 위치한 영국 내셔널트러스트 사이트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영국NT대표 찰스 황태자의 영상 환영사

INTO 집행위원 및 임원진: 위원소개 링크


첫날(9월7일) 총회가 있었습니다. INTO(세계내셔널트러스트기구)의 경과보고와 정관에 따른 새로운 임원 선출이 있었습니다. 회장으로는 영국내셔널트러스트 전임 사무총장(2001-2012), 피오나 레이놀즈경(Dame Fiona Reynolds) (Dame:여성께 부여하는 Sir), 부회장으로 우간다의 에밀리 드레이니가 선출되었습니다. 사무총장으로는 캐서린 레오나드(1999년 영국 NT방문 때 첫 대면이 있어, 한국NT를 잘 기억함), 그리고 한국NT 조명래 대표를 포함한 12명의 집행위원이 선출되었습니다.
신임 피오나경은 취임사에서 “INTO회장이 된 것을 무한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영국NT 사무총장으로 있으면서 운 좋게도 다섯 번이나 ICNT(세계대회)를 참여했습니다. 재직 중에 INTO가 설립되고 글로벌 네트워크로 발돋움하는 용감한 도전을 보았습니다. 이제 그 관계를 더욱 새롭게 하고 협력해가는 기회를 즐기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오전 총회 이후, 개회기념 주제발표(NT운동의 전망과 도전) 및 강연이 오후까지 이어졌습니다. 영국내셔널트러스 대표(president)인 찰스 황태자의 영상 인사도 있었습니다. 저녁엔 킹스칼리지의 강당에서 축하 파티가 있었습니다.
 

캠브리지 킹스칼리지 강당은 영화 <해리포터>의 호그와트??

둘째 날(8일),  캠브리지 근방(동/북쪽) NT 사이트인 Anglesy Abbey(문화유산), Wicken Fen(영국 NT 최초 획득한 자연유산)을 방문한 후 현지에서 ‘문화정체성 지키기’라는 주제에 대한 토론이 있습니다. 글로벌화 되어가는 문화동화현상에 지역의 유형 혹은 무형의 인류문화이 사라져가는 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각 나라의 사례와 대안을 제시하는 토론이었습니다. 저녁엔 신임회장 주재로, '향후 INTO 활동방향/과제에 관한 간담회'가 있었습니다.
 

앵글 수도원

위켄팬 습지(영국최초의 자연유산)

영국내셔널트러스트 가게(각 사이트와 지역 명물, 공예품 등을 만날 수 있다)

Ickworth 장원

영국NT사이트 답사해설은 대부분 은퇴 시니어인 자원봉사자들이 맡는다.

주제별 그룹토론이 텐트별로 진행되었습니다. 관심있는 주제를 선택해 참여할 수 있었는데 다루고 싶은 주제가 몇개? 전부 다 필요해 ...ㅠㅠ 

  -젊은이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
  -브랜드 전달과 연관
  -펀드레이징 기법
  -자원봉사 활용하기
  -우리의 미래에 투자하기
  -법제와 거버넌스
  -캠페이너와 비평가와 같은 우리의 역할

셋째 날(9일), 캠브리지 근방 '뷰리 세인트 에드문즈(Bury St. Edmunds)의 NT 사이트(Theatre Royal, 18세기 최초 극장)에서 'Best Practices' 발표가 있었고, 장소를 다른 사이트인 Ickworth 장원으로 옮겼습니다. 저택과 정원 등을 답사하고, NT활동 관련된 주제(펀드레이징, 거버넌스, 소통 등) 그룹토론회가 정원의 텐트 속에서 오후 동안 열렸습니다. 이후 저녁 식사 전에 지역 미팅이 있었습니다. 아시아 지역모임에서는 한국, 타이완, 일본, 인도네시아, 인도 등이 참가했으며, 향후 아시아권 사이의 활동에 대한 의견 교환이 있었습니다. 한국이 처음으로 아시아 내셔널트러스트 회의를 개최한 후(2008), 후속 모임이 없음을 지적했고, 다른 나라가 이어서 개최할 것을 제안, 인도네시아에서 내년 1월에 아시아권 문화유산 커퍼런스를 개최하면서 아시아 내셔널트러스트운동 세션을 포함시켜 진행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아시아퍼시픽 지역모임 토론

넷째 날(10일), 캠브리지 근방(서쪽)의 대장원 Wimpole(NT 직원 42명, 자원봉사요원 500명)에서 NT가 추진하고 있는 친환경 농업활동에 대한 설명과 현장 토론이 있었습니다. 주제는 '땅과 경관과 자연'. 주로 이 사이트에서 추진하고 있는 '물살리기 캠페인'에 대한 토론과 농약과 화학비료로 침식되어가는 토질의 개선 등 농업활동에 대해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장원의 헛간에서 바비큐 파티가 있었습니다. 영국식 포크댄스를 배웠는데 모두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Wimpole Hall

동영상으로 보실까요? 올드한게 놀기 딱 좋았습니다.


 다섯째 날(11일),  다시 캠브리지대 콘서트홀에서 전체 마무리 회의가 열렸습니다. 전체 회의 전에 신임회장 중심으로 집행위원회가 열렸습니다.(우리가 일찍 떠나야 한다하여 오후 일정이 오전 일정으로 옮겨졌음) 12명의 집행위원들이 모두 참가한 첫 집행위원회에서는 집행위원회 운영에 관한 의견 교환이 있었습니다. 집행위원회에서 매 2개월마다 온라인 회의를 개최하며 일년에 한번씩 대면(face-to-face) 회의를 갖도록 합의하고 첫 회의는 11월6일에 하기로 했습니다. 이후 전체 회의가 시작되면서 특강이 있었고, 대회활동에 대한 간단한 평가가 있었으며, 신임회장의 인사말이 있었습니다. 신임회장은 '가족', '성공', '목소리' 3가지 키워드로 INTO를 이끌어가겠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끝으로 차기 회의개최국인 인도네시아 대표들의 수락인사, 문화공연 등이 있는 후, 대회가 공식 종결되었습니다.
 

차기 ICNT 개최국 인도네시아에서 축하공연을 마련했습니다.


이상이 간단한 16차 내셔널트러스트 세계 대회의 주요 내용입니다.
인상 깊은 것은 이번에 ‘루안 헤리티지재단’이 중국의 첫 INTO의 공식 멤버로 참여하였다는 것과 신생 동유럽의 ''체코 내셔널트러스''는 활동본부가 영국에 있으면서 글로벌 모금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국제적 구호활동 등도 지금은 국경이 따로 없는 시대이지만 자국의 유산보전을 위한 모금활동의 다양성에 대해서는 고정관념을 버려야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번 대회는 영국내셔널트러스트 중심으로 모든 게 다루어지다 보니, 우리 같은 신생단체들이 주체적으로 참가해 함께 하는 데는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 흐름과 동향, 다른 나라의 활동 등에 대한 직간접 체험은 우리의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을 다시 한 번 성찰하면서 한 걸음 더 나가게 하는 데는 적잖은 도움이 된 듯 합니다. 특히 향후 NT활동은 문화유산 확보와 보전에 더 역점을 두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고, 또한 국내 관련 단체들과의 협력도 더 강화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언제가 세계대회를 우리가 개최할 가능성도 꿈꾸어 봤습니다.

INTO 2015 세계대회 포스팅 : http://www.internationaltrusts.org/2015-conference-in-england 

INTO 총회 소식: http://www.internationaltrusts.org/14375

INTO 집행위원소개: http://www.internationaltrusts.org/about-into/executive-committ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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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생물다양성을 키우는 농업국제회의
(ICEBA : International Conference for Enhancing the Biodiversity in agriculture)

박도훈(자연유산부장)

ICEBA는?
아시아 몬순기후에 적응한 논 벼농사는 수 천 년 간 사람들에게 생존의 근거가 되었고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생태계유지와 뛰어난 경관을 형성해왔다. 반면 근대화·세계화의 시류 속에 농약과 화학비료에 의지하는 ‘관행농’이 주류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논습지에서 자생하는 생물종의 감소 및 멸종위기의 가속화로 인한 생태계의 불안정성과 토양의 황폐화가 아시아의 공통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생물다양성을 키우는 농업국제회의’는 지구환경에 있어 생물다양성을 키우는 논의 역할이 주목받고 있는 상황에서 논 생물다양성의 유지 및 향상에 관한 기능과 생물다양성을 제고하는 농법, 논 생물조사의 방법 등의 정보를 교환하고 토론하고자 논농사를 하고 있는 한국,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각국의 생물다양성을 향상을 도모하는 생산자, 농업단체, 지방지자체, NGO가 만나는 국제회의기구이다.
‘생물다양성을 키우는 농업국제회의’는 ‘한·중·일 환경창조형 벼농사 기술국제회의’와 ‘한일 논생물조사 교류회’ 등을 거쳐 2010년 토요카시(豊岡市), 2012년 사도시(佐渡市)에 이어 2014년 제3회 대회를 미야기현(宮城県) 오사키시(大崎市)에서 개최하게 되었다.

 

ICEBA 2014 (2014.12.6)
이번 ICEBA 2014는 아이쿱생협과 논습지네트워크의 참가단체 등 23명이 한국참가단으로 오사키 후루카와를 방문하였다. 제12차 생물다양성협약총회(CBD COP12)가 올해 한국에서 개최되고 이번 회의에서 다루어진 농업분야의 생물다양성과 지금까지의 농업국제회의에서 논의된 검증된 기술과 정책 등을 기초로 ①생물다양성을 키우는 농업기술 ②생물조사와 생물다양성을 키우는 농업기술에 대한 평가 ③생물다양성을 키우고 농업과 농촌을 지탱하는 지역 만들기의 3부문의 주제로 우리 삶과 주변 생물과의 공생과 발전적이고 실천적인 토론과 검토를 하기위해 열렸다.

본회의 내용정리

‘논에 생물이 사라진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경고’라고 한 나츠하리 요시히로 박사는 기조강연에서 논생태의 다면적 기능을 말하고 반면 농업이 생태계로부터 받고 있는 서비스에 주목하였다.

농업 생태계 서비스
1. 미생물이나 토양 동물, 식물에 의한 질소 고정이나 토양의 형성
2. 곤충이나 새에 의한 송분(수분)
3. 천적에 의한 해충 방제
4. 곤충이나 새에 의한 제초
5. 삼림에 의한 수자원 함양

무엇보다 농촌은 식자재를 생산하는 곳이 아닌 사람이 태어나 자라고 생활하는 곳이다. 논이나 농촌의 생태계가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 해도 지역을 지탱하는 역할을 발휘하는 곳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세션 1의 보고는 지역 생산자들이 친환경 농업을 위한 노력을 담고 있다. 농약저감을 위한 종자개량과 친환경 농업의 다양한 실천 사례를 들기도 하지만 관행농의 쌀가격은 폭락하는 반면 생물다양성 농법과 유기농쌀은 관행농 대비 2배의 생산자 가격을 유지하며 지탱하고 있는 사례는 우리에게도 희망적인 메시지였다. 미야기현 오사키시에서 전개하는 환경보전형농업 실천의 보고를 통해 기술적 과제를 공유하여 농약사용 횟수반감과 생물다양성을 키우는 농법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오누마시와 훗카이도에서도 모내기 후 논에 들어가지 않는 생물다양성 농법이 성공한 사례와 한국 홍성의 주정산 생산자, 중국 조아부 선생의 보고를 통해 생물다양성 농법의 기술적 포인트를 서로 공유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한국논습지네트워크 참가자와 함께>

세션 2에서는 생물조사와 생물다양성 농업기술에 대한 평가를 주제로 열렸다. 사람의 필요에 의해 생산하는 작물은 누천년 이를 배제하기 위한 노력을 해오다 드디어 화학합성농약의 시대가 되었다. 이에 대한 문제가 다시 농업과 인간에게 제기되기 시작하면서 그 반성으로 ‘종합유해생물관리’라는 개념이 생기고 단순히 유해한 생물과 그 천적들로 분류해 왔다. 논 생물은 5000종 이상이 정리되어 있다. 대부분 유익도 유해도 아니고 ‘그냥 벌레’, ‘그냥 생물’이다. 해충으로 알려진 종류들도 개체수가 적을 때는 그냥 벌레로 생각하면 유해 생물의 종류는 더 적어진다. ‘종합 유해생물 관리’에 양립하는 ‘종합 생물다양성 관리’가 제안되었다. 이를 어떻게 농업현장에서 구현할 것인가는 앞으로의 과제이다. 농업생물조사법과 평가, 생물다양성 농업기술의 관계에서 지속가능한 지역사회와 농업을 위한 합리적 방향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번 ICEBA 국제회의에서 생물다양성을 키우는 농업이란 무엇인가를 찾고자 많은 경험과 연구와 이론을 제시하였다. ‘친환경 농법’, ‘유기농’이라는 테마에서 ‘생물다양성 농법’으로 개념이 정리되어 가는 느낌이다. 인간을 기준으로 하여 인간의 생존환경을 유지한다는 명목의 ‘친환경’을 목적하였다면 이제 인간을 전제하는 것이 답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이다. 인간을 만물의 중심으로 놓았더니 인간이 위협을 받는다. 이러한 성찰은 현장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생명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태양의 빛, 물, 기름진 토양이 있으면 충분하고 이것으로도 감사해야 한다.

 

세계최초 람사르 논습지 ‘가부쿠리누마’를 가다

2014 ICEBA(12월6일)가 열리기 하루전, 참가자들은 가부쿠리누마로 향했다. 이곳은 람사르 등록습지로 게조누마와 함께 오사키시를 대표하는 철새인 쇠기러기 약 7만 마리의 보금자리이다. 가부쿠리누마는 옛날엔 키타가미가와(北上川) 본류의 자연유수지로서 아주 큰 늪이었다. 후에 많은 부분이 농지로 개간되어 현재는 그 일부가 남아있다. 백년전 미야기현 북부의 세포크평야에는 40개의 늪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37개 늪에서 개간이 이루어져 그 중 31개의 늪은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일본 국토지리원에 따르면 일본 전체에서 61%가 사라졌다고 한다. 미야기현에도 이미 92%의 습지가 소실되었다. 잃어버린 습지의 대부분은 논이 되었고 처음엔 무논(겨울 담수논)이 유지되었으나 점차 농지가 개량되어 대부분 마른 논이 되었다. 현재는 경작포기 논을 습지로 복원시키는 것과 휴경논에 연중 물을 대어 습지로 관리하며 수렁논은 겨울철에도 담수를 하는 관리를 실천하여 옛 가부쿠리누마로 되돌리기 위한 100년 계획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는 미야기현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가부쿠리누마 동편의 시라토리 지구는 1997년 논 50헥타르를 습지로 복원시켜 지금과 같이 수 만 마리 기러기들의 보금자리를 가꿀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겨울철 무논을 유지하는 것이 철새의 서식지를 확대에 효과적임을 깨닫게 되고 최근에 쌀 브랜드 가치 제고로 많은 농가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하게 되어 람사르조약 등록과 지금과 같은 우수한 생태를 가꾸게 되었다.  

잠시 담아온 영상을 감상해 보자.


<가부쿠리누마의 겨울 노을과 함께 늪으로 날아오는 쇠기러기 떼>

늪에 있는 쇠기러기는 일출에 일제히 날아올라 인근의 논습지와 들에서 지내다가 저녁 해질 무렵에 다시 늪으로 돌아온다. 노을을 배경으로 몇 만 마리의 쇠기러기가 지축을 흔드는 소리와 함께 날아오르는 모습은 하늘을 다 덮을 정도로 새까맣다. 이 장면을 보기위해 많은 사람들이 늪을 찾아온다.

<낮시간에 논에서 쉬고 있는 고니>

<밤이 오면 늪으로 날아드는 기러기>

 <어두워지면 늪으로 찾아오는 새들로 장관을 이룬다>

일본 미야기현, 타지리쵸의 가부쿠리누마와 그 주변의 광대한 논습지로 면적이 약 150헥타르에 달한다. 누마(늪)라고 말하지만 갈대와 줄이 덮고 있는 습지를 개간하여 생긴 논에 둘러싸여 있다. 쇠기러기, 청둥오리, 고니는 낮에 논습지에 있으며 밤에 늪으로 돌아와 쉰다. 쇠기러기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철새로 오사키시의 상징동물이다. 겨울이 되면 번식지의 시베리아로부터 일본으로 건너와 미야기현 북부나 이시카와현, 시마네현 등에서 월동한다. 일본 전체에 10만마리가 날아오지만 그중 9할은 미야기현의 습지에서 월동한다. 미야기현의 쇠기러기는 과거 최대 약 13만7천마리가 날아왔다고 한다. 1971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을 때, 수렵의 횡행으로 일본에 남은 쇠기러기는 센다이의 후쿠데초우에 있던 2000마리 뿐 이었다고 한다. 이 무리가 국도4호선 공사의 영향으로 이즈누마로 이동하여 이후 계속 이곳에 머물렀고, 가부쿠리누마에서는 1978년에 수백마리가 있었던 것으로 최초 확인되고 1996년에 미야기현 사냥우회가 수렵행위를 자제하게 되어 개체수가 급증하게 되었다. 가부쿠리에서는 많다고 느껴지지만 일본전체의 7할을 이곳에서 본다고 생각하면 많은 수라고 할 수 없다. 일본에 날아오는 쇠기러기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1971년에 비해 30배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정확한 이유는 아직 모른다고 한다. 번식을 많이 하기 때문이라고 쉽게 말하기도 하지만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개체수가 계속 줄고 있으며 일본에서도 서식지가 늘어난 것도 아니지만 개체수는 늘었다는 것이 아직 풀지 못한 숙제이다. 

<쇠기러기의 이동경로 4,000km>

<오사카시의 쇠기러기 마스코트 카부>

쇠기러기는 인근 논습지에 심어진 벼나 보리를 훼손하기도 한다. 집단으로 날아들기 때문에 피해도 심각하다. 언제 날아들지도 몰라 지키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죽일 수도 없다. 쇠기러기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고 있는 국가는 농작물 훼손에 대해 별다른 조치가 없지만 미야기현 자치단체에서는 ‘농작물훼손보상조례(식해보상조례)’를 만들어 보상하고 있지만 충분하지 못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곳의 쌀은 관행농쌀에 비해 2배 이상의 생산자 수매가를 책정하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한국의 유기농 상황을 생각하자면 만족할만 하지 않을까싶다.

일본의 밥맛은 아주 좋다. 한국에 살고 계시는 일본인 환경활동가가 말씀으로 일본인은 ‘밥맛에 매우 민감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가장 많이 소비되는 품종은 ‘고시히카리’이고 전체의 70%라고 한다. 한국, 중국, 일본은 밥에 대한 애착이 많은 나라다. 1인당 쌀소비량이 가장 많은 나라는 아직 한국이지만 90년대 초에 비해 약 절반으로 줄어 하락폭은 가장 크다. 갈수록 우리와 멀어지는 밥은 논습지의 현재 상황을 말하기도 한다. 지난 10년간 우리는 여의도 면적 약 200배의 논이 사라지고 약 1백만 명이 농사를 포기했다. 1인당 하루 밥 소비량은 고작 1.6공기이다. 쌀시장이 관세화로 전면 개방되고, 농업강국 미국, 중국과 FTA를 체결하였다. 나의 쌀소비가 식량주권을 지키고 내가 먹는 쌀이 논습지를 지킨다는 인식을 모두 갖게 되는 날이 오길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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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국내셔널트러스트 한국내셔널트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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