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경기도 연천군 중면 횡산리 DMZ일원에 월동하기 위해 보금자리를 찾는 두루미는 400여 마리에 이릅니다. 멸종위기종 1급 두루미와 멸종위기종 2급 재두루미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두루미들은 왜 1600Km를 날아 연천에 오는 것일까요? 또 와서는 무얼 먹고 겨울을 날까요? 1년 중 7개월은 겨울인 시베리아에서 두루미가 5개월 동안 새끼를 기르고 가르치고 새끼가 하늘을 날아다닐 쯤, 시베리아는 혹독한 겨울이 오기 시작 합니다.

 

영하 40를 넘나드는 추위와 얼어버린 땅에서 먹이를 찾을 수 없게 되면 동토의 땅을 떠나 따뜻하고 먹이가 풍부한 남쪽으로 이동을 합니다.

 

연천 중면 횡산리 임진강 망제여울에서 대장정의 막을 내리고 지친 몸을 추스립니다. 1600km를 날아오면서 소비된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동물성 먹이인 작은 물고기와 다슬기 먹습니다. 그러나 주된 먹이는 탄수화물인 낙곡입니다. 율무와 벼 낙곡은 두루미들의 가장 주요한 에너지 공급원입니다.

 

임진강 민통선내 망제여울(구 빙애여울)

 

유조에게 여울에서 동물성 먹이 찾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두루미부부

 

하지만 두루미들의 겨울나기가 최근 들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율무와 벼 낙곡의 부족입니다. 추수가 끝나면 볏짚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대신 커다란 마시멜로 같이 생긴 '볏짚 곤포 사일리지'가 온 논에 널려 있습니다. 축산 농가의 사료용으로 사용되는 볏짚을 곤포사일리지로 만들어 한 개에 5만 원에 판매됩니다. 이렇게 볏짚을 거둬가게 되면 두루미가 먹는 낙곡이 많이 줄어듭니다.

 

곤포사일리지 만들기 전 볏짚을 말아놓은 모습

 

볏짚을 수거하지 않은 논과 수거한 논

 

1990년대 이전에는 농부들이 추수가 끝나면 볏짚을 그대로 깔아놓고 이듬해 농사를 위한 밑거름으로 사용했습니다. 두루미들은 수천 년 동안 그런 농업 환경에 적응해 낙곡을 먹어가며 연천에서 겨울을 지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서식 환경이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DMZ일원에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곳곳에 건축물이 들어서고 있으며, 논과 밭은 인삼밭으로 변해가면서 두루미는 먹이터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연천군 중면 횡산리 DMZ일원의 인삼밭

 

율무두루미 400여마리가 매년 겨울에 도래하는, 연천군 중면 횡산리 일원은 임진강 최상류에 DMZ일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2개의 여울과 여울 주변에 자리한 10만여평의 논과, 산간에 율무 밭이 넓게 산재해 있습니다. 넓은 논과 수백만평의 밭 두루미들이 한 겨울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볏짚은 가축 사료용으로 수거해가고 율무는 연작을 할 수 없어 해거리를 하고 있습니다.

 

해거리 때문에 율무농사를 짓지 않고 콩을 지은 밭에 율무두루미가 찾아왔습니다. 율무두루미들은 전년도의 기억을 가지고 율무밭을 찾아왔지만 보이는 것은 콩 타작을 하고 남은 부스러기뿐입니다.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묵정밭까지 걸어 올라가 보지만 잡풀뿐입니다. 사정은 이 곳 뿐만 아닙니다. 횡산리 이곳저곳 콩밭만 가득합니다.

 

2015년 10월 경작한 율무밭

2016년 경작하지 않은 율무밭

 

환경부는 지난 2002년부터 겨울 철새의 먹이 확보를 위해 '생물다양성관리계약' 제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논에 볏짚을 그대로 두게 하고 일정액을 보상해주는 '볏짚존치' 사업이 대표적입니다.

 

연천은 2013년부터 '생물다양성관리계약'을 임진강 일원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민통선내에 자리하고 있는 두루미 먹이터인 횡산리 10만평의 논은 축산농가가 곤포사일리지를 만들기 위해 논 소유자와 관리계약을 체결해서 두루미들의 먹이터인 횡산리에서 볏짚존치를 이행하지 못하고 있으며, 매년 반복되는 악순환 속에서 두루미들은 배고픔에 겨울을 나고 있습니다.

 

농가의 볏짚 수거가 계속 확산될 경우 겨울 철새의 먹이 확보는 심각한 위기에 놓일 수 있습니다.

겨울 철새 가운데 몸집이 가장 큰 두루미는 하루 약400g(4000립중)율무낙곡을 먹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400마리의 두루미가 율무낙곡400g을 먹을 경우 하루 160kg의 율무낙곡이 필요합니다.

 

두루미의 월동 기간인 10월말부터 이듬해 3월 하순까지 5, 150일을 생각해보면 약24톤의 율무와 낙곡이 필요한 셈입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 한탄강지키기운동본부와 연천군청에서 5개월간 두루미 먹이로 뿌려주는 4톤의 먹이와 '볏짚존치' 사업은 그야말로 '푸른바다속의 좁쌀'에 불과합니다.

 

많이 부족했지만 그나마 같이가치와 한 땀 한 땀 보태주신 여러분들의 정성이 두루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장정의 길에 체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의 손길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연천 율무두루미를 위한 땅 한 평 사기에도 많은 분들이 도움의 손길을 주고 있습니다.

 

201710월말 연천군 중면 임진강 최상류 망제여울에 두루미들이 유조를 데리고 돌아오게 하여 새로이 난 유조와 그들의 형제자매, 부모와 함께 임진강가에서 자유로운 삶은 가질 때, 두루미가 우리에게 주는 정서적, 문화적 풍요로움은 더욱 커져 갈 것입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 DMZ 위원회 백승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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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금호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사무국장)


6 인문학강의가 진행된 25일, 전국이 장마권에 들었다. 일기예보는 당일 곳에 따라 폭우를 예보하고 있었다. 기상청 예보는 행사 시작 며칠 전부터 인문학 강의의 강행과 취소 사이에서 갈등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번 6월 망우리 인문학 강의는 홍익대부속고등학교 내셔널트러스트 동아리 학생들이 참여를 신청한 상태였다. 학생들이 망우리 인문학 강의를 접할 기회가 날아가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다.

다행히 인문학 강의 당일은 간간히 비를 뿌렸다. 예보대로 폭우가 내리지 않는다면 차라리 더운 날씨보다 훨씬 괜찮은 편이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리위원회 김영식 위원장(작가)이 답사 시작에 앞서 망우리에 대해 간단히 소개했다.

장마비가 가끔 뿌리는 날씨, 청소년들까지 참여한 가운데 망우리공원 인문학강의가 시작됐다.


망우리공원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소파 방정환

참석자들 중 일부가 아직은 앳띤 청소년들이기에 망우리에서 가장 친근하게 다가 온 인물은, 단연 소파 방정환 선생인 듯 싶었다. 다른 묘역에서 보인 진지한 태도는 찾아 볼 수 없고 천진하게 장난까지 친다. 방정환 선생하면 생각나는 게 무어냐는 김영식 작가의 질문에 이들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어린이날이요.”

변성기가 지난 굵은 목소리로 어린이날을 연호하는 게 그들도 우스웠던 모양이다. 청소년들 사이에서 킥킥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직은 어린 티를 벗지 않은 청소년들이기에 소파 방정환 선생은 망우리공원에서 가장 친근한 분이다.


김영식 작가는 방정환 묘의 조성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망우리에서 가장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은 방정환의 묘는, 1931년 방정환 사망후 홍제동에서 화장후 납골당에 안치돼 있다가 1936년 망우리 이곳에 안장된 것으로 전한다. 묘비 앞면에는 선여심동(仙如心童), 무동의이린어, 묘지환정방파소라고 적혀 있는데, 청소년들은 이게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알기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김영식 작가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 방법을 설명하고 비문에 얽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글씨는 당대 명필이며 독립운동가인 위창 오세창 선생이 썼습니다. 오세창 선생은 손병희 선생과 함께 3·1운동을 주도한 33인이며, 방정환 선생은 손병희 선생의 셋째 사위입니다. 그런 인연으로 묘비를 쓰게 되었고, 묘비를 쓰신 오세창 선생도 현재 망우리 묘역에 잠들어 계십니다.”


                            

소파 방정환(1899~1931)


살아서의 인연은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는 모양이다. 소파 방정환과 인연이 있는 인물중 망우리공원에 묻힌 분이 또 계신다. 소파가 1928년 개벽사를 운영하며 주최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계기로 등장한 한국화단의 거두 이인성이었다. 소파 방정환이 부재했다면 과연 화가로서 이인성의 미래를 장담할 수 있었을까.

 

잘 알려지지 않은 소파의 연인

아동문학가나 아동을 위한 운동가로 잘 알려진 소파 방정환. 하지만 김영식 작가는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를 소개한다.

“...소파 방정환의 연인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이 잘 모릅니다. 물론 소파가 손병희 선생의 셋째 따님과 결혼 후, 알게 된 인연이었기에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돼버렸죠. 그 연인의 이름은 신준려(신줄리아, 신형숙)3·1운동 당시, 이화학당 교사로 재직하다 투옥되어 7개월간 수감생활을 하기도 한 여성입니다. 1920년 잡지 [신여자]를 기획했는데, 당시 편집의 귀재로 평판이 높던 방정환을 편집고문으로 위촉하며 사귀게 된 것입니다...”

            

아동문학가로 알려진 소파는 당대 유명 출판인이자 언론인이며 베스트셀러 잡지의 발행인이기도 하다.


당시 소파의 글에서 신준려(줄리아)는 이니셜 ‘S'로 표기돼 [개벽] 4호의 추창수필 [秋窓隨筆]에 등장한다.

...1020, 등불을 가까이하고 독보(구니키다 돗포)의 병상록을 읽다가 언뜻 S를 생각하고 한참이나 멀거니 앉아 있었다. 독보가 말한 밭 있는 곳에 반드시 사람이 살고 사람이 사는 곳에 반드시 연애가 있다라고 한 그 구절 끝에 왜 이런 구절이 없는가 한다. ‘연애가 있는 곳에 반드시 실연이 동거한다. 아아, 인정의 무상함을 지금 새로 느끼는바 아니지만, S의 사랑을 노래하는 그 입으로서 어느 때일지 실연의 애가 나오지 아니할까아아, 사람 그리운 가을 만유가 잠든 야밤에 창밖에는 불어가는 가을 소리가 처연히 들리는데 부질없는 벌레가 잠자던 나를 또 울리는 구나.

당시 소파의 나이 22세 그리고 줄리아 23세로 뜨거운 사랑을 품었던 사이였지만, 소파는 손병희의 3녀와 결혼을 하고 아들까지 둔 처지였다. 결국 두 사람의 짧고도 아쉬운 사랑은 소파의 도쿄 유학과 줄리아의 미국유학으로 영영 이루어질 수 없게 된다.

소파 사망한 후 10여년이 지난 어느 날, 아들 방운영씨는 방정환의 묘역을 참배하는 양장 차림의 여성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다가서는 운용씨에게 유족인지 물었고 그렇다고 대답하자, 조용히 목례를 하고 멀어져 갔다. 후에 방운용씨는 방정환의 지인을 통해 인상착의를 확인하고 그녀가 바로 줄리아였음을 알게 된다.

소파의 묘비에는  '동심여선(童心如仙), 어린의동무 소파 방정환의 묘'라고 표기돼 있다.


아동문학가 이원수는 훗날 두 사람의 플라토닉한 사랑이 어린이를 위한 사랑으로 승화됐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김영식 작가는 "짧은 인생을 살다간 소파의 활동에 대해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고 어린이날을 만든 사람 혹은 아동문학가로 알고 있지만, 그는 다방면에 걸쳐 눈부신 활동을 전개했다"고 언급한다. 소파는 아동문학가 이전에 출판인이자 언론인이었으며 공전의 베스트셀러 잡지인 [학생], [신여성], [혜성], [개벽], [별건곤]등에 발행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소파가 선택한 새로운 사랑

소파가 출판인이자 언론인으로 눈부시게 활약을 펼쳤다지만 묘비에 새겨진 대로 방정환은 어린이의 동무이다. 때문에 성인 누구나 어린시절을 지나왔기에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망우리공원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은 단연 소파 방정환 선생이십니다. 종래 애들’, ‘애놈등으로 불리던 것을 1920[개벽]지에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192251어린이의 날을 발기 선포도 하셨고, 번안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발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1923년 개벽사에서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합니다. 잡지 [어린이]를 통해서 일본노래와 어른들 민요밖에 없던 시절, 동요운동도 벌이셨습니다. 당시 어린이에 노랫말을 기고한 어린이들 중, 이후 아동문학가나 시인으로 성장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소파가 발행한 잡지 [어린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아동문학가와 시인으로 성장했다.


김영식 작가의 말대로 [오빠생각]은 최순애가 11세에 [고향의 봄]15세의 이원수가 어린이에 응모해서 선정된 노랫말이다. 마산소년 이원수와 수원소녀 최순애는 어린이를 계기로 펜팔친구가 되었고, 서로 얼굴도 모르면서 결혼약속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펜팔한 지, 7년 후 수원역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이원수는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원수가 독서회를 통해 불온한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구속돼 1년간 복역을 했기 때문이었다. 최순애의 집안에서도 이원수와의 결혼을 반대하며 다른 혼처를 권했으나 그녀는 완강히 거부한다. 그리고 이원수가 석방되자마자 바로 결혼식을 치르게 된다.

      

[오빠생각]은 최순애가 11세에 [고향의 봄]은 15세의 이원수가 어린이에 응모해서 선정된 노랫말이다. 

둘은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성공한다. 


이밖에도 윤극영의 [설날][반달]을 비롯해, [고드름(유지영 작)], [따오기(한정동 작)], [봄편지(서덕출)]등도 모두 어린이를 통해 세상에 나와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다.

일제강점기 암울한 상황에서 어린이를 위한 잡지 간행이 순조로울 수만은 없었다. 소파는 기성세대의 변절, 무기력, 분열, 좌절감 등을 신세대에 대한 기대로 전환했다. 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소파는 어린이를 장차 조선독립의 역군이 될 인재를 키우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잡지 [어린이]는 일제의 검열에 걸려 기사가 삭제되는 일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그때마다 소파는 경찰서를 들락거려야 했고요. [왜정인물 1]에는 일본 경찰이 작성한 방정환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손병희의 3()용화의 남편이고 천도교이 중요임무를 전담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그리고 키는 52촌에 둥근 얼굴이고, 까만 피부에 비만이라는 기록까지 나오는데,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고 불온한 행동을 할 우려가 있음이라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소파 방정환 선생은 동화구연가로도 유명하다.

이화여자보통학교에서 전교 학생들에게 산드룡(신데렐라의 불어 발음)’을 이야기할 때, 학생들은 눈물이 줄줄 흘러 저고리에 비 오듯 하는 걸 씻지도 않고 들을 정도였고, 교사들마저 눈물을 훔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신데렐라가 의붓어머니에게 두들겨 맞는 구절에 이르자 여학생들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상갓집 같이 일제히 통곡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방정환 선생과 함께 아동문학가로 활동했던 후배 최신복 선생에 따르면, 소파의 강연회에 입회했던 순사가 소파의 강연에 감동해 눈물을 참지 못하고 방정환을 선생으로 모실 정도였다고 합니다.

망우리공원 인문학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그와 나 사이를 걷다'의 저자 김영식 작가


김영식 작가가 언급한 최신복 선생은 동아일보사 수원지국 기자에서 소파의 부탁을 받고 1929년 개벽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훗날 무덤도 없이 홍제동 납골당에 안치된 소파의 유골을 윤석중, 마해송 등과 함께 지금의 망우리공원에 모신다. 그 역시 194538세의 젊은 나이에 소파와 마찬가지로 과로로 유명을 달리 하는데, 방정환의 곁에 묻어 달라 유언했다. 최신복은 그가 죽기 전, 1939년 부친이 사망하자 수원의 선산을 놔두고 망우리공원 소파의 아래쪽에 묘를 썼다. 소파를 더 자주 찾아뵙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1942년 모친이 사망하자 역시 망우리공원 조부의 곁에 안장하였고, 자신의 갓난아기가 죽자 그 곁에 묻은 것으로 전한다. 이로써 소파를 존경했던 최신복으로 인해 3대가 망우리공원 소파의 묘 근처에 잠들게 된다.

소파가 사망한 것은 1931년이었다. 그는 각종 강연, 어린이 관련 행사기획, 집필, 잡지 간행 등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던 중 과로로 쓰러진다. 고혈압에 신장염이었으나 당시 의료기술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지는 못했다. 김영식 작가는 병상의 소파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어린이들을 잘 부탁한다.’말했다며 동화와도 같은 마지막 유언을 전했다.

여보게, 밖에 검정말이 끄는 검정 마차가 와서 검정 옷을 입은 마부가 기다리니 어서 가방을 내다주게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 남긴 것

훌륭한 인물의 업적은 인물과 업적의 내용에 가려져 그 의도나 동기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동기가 드러난다 한들, 표면적인 동기와 당사자가 결심을 품게 된 내재적 동기는 다를 수 있다.

앞서 밝혔듯이, 아동문학가 이원수 선생은 소파 방정환과 줄리아의 플라토닉한 사랑이 향후 어린이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되었다고 언급했다. 아내와 처자를 둔 소파의 처지였기에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으면서도, 두 사람 모두 해외 유학으로 관계가 정리된다. 요즘 드라마 형식을 빌리자면 불륜과 막장으로 끝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유학이 결코 자발적 결정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상상역시 과하지 않다. 하지만 이원수 선생의 말처럼 소파의 플라토닉한 사랑이 내재적 동기로 작용했고, 식민지 조국의 독립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어린이 운동 투신의 표면적 동기와 분명한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소파가 줄리아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대상을 달리할 뿐, 소파의 삶 내내 현재 진행형이었고, 모든 사랑이 그렇듯 그 완성을 갈구하게 된다. [어린이]를 통해 등단한 아동문학가 이원수와 최순애의 결혼은 소파가 사망한 지 5년 후인 1936년의 일이다. 하지만 얼굴도 서로 알지 못했고, 일제 강점기의 엄혹한 환경, 가족의 반대를 극복하고 이룬 운명같은 사랑은, 살아 생전 소파의 실천적 사랑과 무관하다 할 수 있을까.

소파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은 대상만을 달리한 채, 그의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


임종에 가까워질 때, ‘어린이들을 잘 부탁한다.’며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사랑한 대상에 대한 애틋함을 나타낸다. 죽음이란 누구도 피하지 못 할 두려움의 대상이며 생물학적 기능의 종료 상태이다. 하지만 소파였기에, 죽음이라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정서적으로 유약한 어린이들에게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여보게, 밖에 검정말이 끄는 검정 마차가 와서 검정 옷을 입은 마부가 기다리니 어서 가방을 내다주게

소파는 어린이들에게 말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죽음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 동화와도 같은 다른 세계 어디로 떠나가는 것이며, 마치 새로운 일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가방을 챙겨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소파가 배역에 충실한 연기자같이 검은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떠나면서 미완의 사랑은 그의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 어린이를 위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성사시키는 마침표가 찍어진 것이다.

 


망우리공원 보전 '같이가치' 모금 참여하기: https://together.kakao.com/fundraisings/24277


자료참조 '그와 나 사이를 걷다' (김영식 저/호메로스/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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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마지막주 토요일, 망우리공원은 버찌가 빨강게 물들자마자 검붉게 익어가고 있었다. 화사한 꽃이 예뻤던 4월도 잠깐, 어느새 열매는 삽시간에 익는다. 망우리가 근현대 역사인물이 잠든 특성 때문일까. 계절과 시간의 변화도 그들의 삶처럼 압축되어 나타난다.


오늘은 18명의 시민들과 함께 망우리 인문학 강의를 진행한다. 간혹, 참석하신 분들의 성향이나 직업, 나이에 따라 관심을 끄는 묘역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관심이란 한 인물에 대한 존경심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상황에 따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 드러나기도 한다. 사실, 위인에 대한 신비감과 무조건적 영웅시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위인역시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고, 그들의 삶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좀 더 견고하게 개선할 책임을 느낄 필요가 있다. 이를 떠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분의 잘잘못을 섣불리 논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이다.

 

승려의 묘 옆에 부인(人)의 묘가?

망우리공원 순환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도로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묘가 올려다 보인다. 20여 미터 완만한 계단을 오르면 예상치 못했던 장면이 나타난다. 바로 승려였던 만해와 그의 부인의 봉분이다. 비석에도 만해한용운선생묘라는 표기와 부인유씨재우(夫人兪氏在右)’라고 표기돼 틀림없는 한용운 선생의 묘임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김영식 작가가 재미있는 질문을 던진다.

그럼, 한용운 선생의 묘는 둘 중에 어떤 것일까요?


참가자들은 여러 추측이 이어진다. 김영식 작가 말에 따르면, 참배객들이 엉뚱한 봉분에 헌화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결국 오른쪽이라는 것은 우리가 묘를 바라본 입장에서가 아닌, 머리를 위로하고 누운 고인의 입장에서의 방향을 뜻한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18798, 충남 홍성군 결성면에서 태어납니다. 16살이던 1894년에 돌연 출가를 하게 됐는데요. 일설에 따르면 선생의 부인의 해산을 전후로, 시장에서 미역을 사오라는 부탁을 받고 나갔다가 그 길로 출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고향땅인 홍성을 찾지 않았고, 첫 번째 부인의 소생인 아드님과 대면하기조차 꺼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김영식 작가가 출가에 뒤이어 건국훈장인 대한민국장까지 수여받은 한용운 선생의 공로를 언급하였다. 하지만 부인의 봉분과 더불어 처음 알게 된 선생의 행적에 참가자들은 뜨악한 표정들이었. 게다가 승려임에도 두 차례의 결혼 경력은 지금이나 당시에도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임에 틀림없다. 

'상남자셨구나.' 

승려신분으로 독립운동에 그리고 두 차례의 결혼을 떠올리며 참가자들 사이에 묘한 웃음과 분위기가 감지된다.

김영식 작가가 고은 시인의 한용운 평전에서 지적된 내용을 언급한다. 『…연설에 뛰어나고 지조가 강해 지도자적인 능력을 갖추었으나, 수시로 파계를 한 승려답지 않은 행동, 첫 번째 처와 아들에 대한 무정한 처사, 문학적으로 자기보다 앞선 최남선에 대한 시기심...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한용운 평전은 위인의 무조건적인 신격화 또한 우리의 눈을 가리는 행위로 경계해야 할 점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용운 선생이 총독부에 보낸 탄원서와 조선불교유신론에서는 대처의 의미를 짐작할만하다조선불교의 부흥을 위해, 승려가 거지행각을 하면서 탁발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결혼도 하고 가정도 가져 안정된 바탕에서 승려생활을 해야 불교가 발전할 수있다는 소신이었다.


만해는 기미독립운동 민족대표의 33인 중 끝내 지조를 지킨 오세창 등과는 죽을 때까지 교류하였으나, 변절한 최린, 최남선과는 상종하지 않은 것으로 전한다. 한용운이 집을 비운 사이, 최린이 찾아와 딸에게 용돈을 주고 갔는데, 그 돈을 들고 최린의 집에 찾아가 내던진 일화는 만해의 비타협적 생각을 가히 짐작할만하다.

만해는 1944년 지병인 신경통으로 와병하다가 독립을 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시신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홍제동 화장터를 피해 미아리에서 불교식으로 화장을 하고 남은 유골을 망우리 묘지에 안장했다.

 

수채화같았지만 절망적이었던 사랑

1938년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한국명 이남덕)는 미술실기 수업이 끝나고 우연히 수돗가에서 나란히 서서 그와 붓을 빨게 되었다. 조선인 학생으로 2년 선배인 그는,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운동과 노래까지 잘해 당시 여학생들의 선망이 대상이었다. 수돗가에서 붓을 빨던 일을 계기로 둘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하지만 졸업과 동시에 그는 일제가 강점하고 있던 조선땅으로 귀국해야 했다. 편지를 주고 받으며 아쉬움을 달래던 마사코는 해방이 채 되기도 전인 19454월 혈혈단신 현해탄을 건너와 5, 그의 고향인 원산에서 결혼한다. 그의 남편의 이름은 이중섭.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부산과 제주를 전전하는 궁핍한 생활 끝에 병을 얻어 두 아들과 1952년 일본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1953년 친구의 도움으로 잠시 일본에서 가족들과 해후하였으나, 일시체류 신분이기에 다시 기약없는 이별을 맞아야 했다.

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다시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일본입국 비자를 받기 위한 이중섭의 노력은 절박한 것이었다.

마사코가 일본에서 어음을 주고 사 보낸 책을 이중섭이 팔았지만, 결국 판매대금은 그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후배가 중간에서 횡령을 한거죠. 그리고 이중섭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준게 1955년 서울과 대구에서 열린 이중섭 개인전이었습니다. 전시회는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그림을 외상으로 가져가 그림값을 지불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그림을 훔쳐가는 사람도 있었던 겁니다...

처지를 딱하게 생각한 친구들이 돈을 모아 밀항선을 타기를 권했지만, 그 돈마저 어떤 시인이 며칠만 쓰고 돌려준다며 가져가 결국 받지 못했다.

김영식 작가가 말을 잇는다.


화가 이중섭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그림 황소를 보면, 석양의 붉은색을 배경으로 누런 소가 슬픈 눈으로 우는 듯 하는 모습입니다만, 그게 바로 이중섭의 모습이었을 겁니다. 황소처럼 힘세고 야성적이지만, 온순한 성격의 이중섭은 세상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 후, 이중섭의 우울증은 극에 달했다. 일본에서 온 아내의 편지는 뜯지 않았고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황달, 영양실조, 간장염이 발병하게 된다. 그리고 1956년 서대문의 서울적십자병원에서 죽은 후, 무연고자로 처리돼 있다가 사흘 만에 고향 친구인 김병기에 발견된다. 그리고 홍제동 화장장에서 화장돼 유해의 반은 망우리에, 그리고 나머지는 일본의 가족들에게 전해진다. 

 

원했던 혹은 원치 않았던 '이별'의 엇갈린 운명

오로지 그림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던 이중섭에 비해 만해는 종교와 속세를 오가며 불교개혁운동과 독립운동을 벌인다. 1952년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가족과 생이별을 겪어야 했던 이중섭에 비해, 자기의사로 속세와 이별을 결심했던 만해의 경우는 다를지 모른다. 하지만 종교에 대한 귀의와 잔인한 시대의 가슴 아픈 이별도 저마다 타고난 운명을 넘어서지 못 하는 걸까?

대향 이중섭이 잠시 일본에서의 가족과 짧은 해후이후, 가족을 만나기 위한 노력은 필사적인 것이었다. 서울과 대구에서 개최한 개인전의 실패는 그를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하였다. 그리고 절박한 상황에서 시인이었던 친구의 배신은 의지할 곳 없는 중섭을 철저히 파괴해 버렸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은 시인 구상이 이중섭의 2주기 추도기에 기고한 동아일보 기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 세상에서는 중섭이 병들어 미쳐 죽었다고도 하고 굶어 죽었다고도 하고 자살했다고도 한다. 정신병원엘 두 차례나 입원까지 하였으니 병들어 미쳐 죽은 것도 사실이요. 먹을 것을 공궤치 못했으니 굶어 죽인 것도 진상이여, 발병 1년 반 그나마 식음을 완강히 거부했으니 자살했다 하여도 무방하리라. 그러나 그를 살게 하고 죽게 한 것은 오로지 고립이었다. 중섭은 너무나 그림밖에 몰랐다. 그의 생존의 무기란 유일 그림뿐이었다...”

고뇌하는 이중섭(친구이자 화가 한묵이 그린 스케치. 1954년 스케치)


출가를 통해 세상과 이별하고, 승려의 길을 선택한 만해 한용운의 삶도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았지만, 속세와 종교 사이에서 끊임없는 번뇌가 예상된다. 이미 한 차례의 결혼 이후 출가 그리고 재결혼 등은 승려의 파계를 논할 정도로 당시 시대에서는 파격적인 행동으로 보여 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교에 귀의한 몸으로,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의 지조를 지키기란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이중섭은 그렇게 그리워하던 가족들을 살아서 만나지 못했다. 그의 무덤에 세워진 비석은 사망 1년 후, 후배 차근호가 세운 것이다. 비석 오른편에 이중섭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아들 태현(야스가타)과 태성(야스나라)의 부둥켜안은 모습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만해 한용운 선생은 승려였으나, 결국 부인과 무덤을 나란히 하게 된다.

이중섭 묘비는 그가 사망한 지, 1년 후 차근호에 의해 세워졌다.


승려로서 속세와 이별을 했던 한용운 선생, 전쟁과 가난으로 인해 가족과 원치 않는 이별을 해야 했던 화가 이중섭. 원하던 원치 않았던 두 개의 이별의 결과, 설사 다른 시대를 살아갔을 지언정 확연하게 엇갈린 운명을 확인하게 된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세속적 삶의 만남에서 두 분의 생애가 다소나마 뒤바뀌었다면 어떨까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운명은 본래 희망한대로 이뤄지지 않는 인연과 같아 손길이 닿지 않는 아득한 곳에 있다며, 이중섭 묘비의 들꽃이 고개를 떨굴 뿐이다.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소처럼 걸음을 옮기면서 안간힘을 다해 제작을 계속하고 있소...(19541121일 일본의 아내에게 보낸 이중섭의 편지중)


자료참조 '그와 나 사이를 걷다' (김영식 저/호메로스/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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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금호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사무국장


삶과 죽음 그리고 세대를 가르는 경계, 망우리.

젊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지명이고 30대 중 후반, 그러니까 80년대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공동묘지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망우리. 망우리는 그렇게 삶과 죽음을 나누는 장소이자 특정 세대를 가르는 경계이기도 하다. 근심을 잊는다는 뜻의 망우(忘憂)라는 지명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연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양에 새롭게 도읍을 세운 태조가 지금의 건원릉(구리시 인창동 소재)에 자신의 묘를 정하고 환궁하던 중, 이 고갯마루에서 이제야 오랜 근심을 잊겠다(忘憂)’고 말한 것이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여부를 떠나, 태조의 건원릉이 위치한 동구릉과 직선거리로 2km 남짓한 거리에 위치해 있어 망우리는 세인들이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1914년 일제가 단행한 행정구역 변경 이전만 하더라도 망우리(忘憂里)는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忘憂里面)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하사한 지명 그리고 인근의 동구릉과의 위치 등을 고려할 때 행정구역의 격이 그만큼 높았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일제는 양주군 구지면(九旨面)와 망우리면(忘憂里面)자를 따서 구리(九里)로 병합시킨다. 그리고 망우리면(忘憂里面)의 잔여 지역을 리() 단위인 현재의 망우리(忘憂里)로 귀속한다. 사실상 행정구역의 지위에서 강등당한 셈이다. 망우리의 수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일제는 경성의 묘지가 부족하자 1933년 망우리를 공동묘지로 조성하게 된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과 동구릉이 조성된 산줄기에 평민의 공동묘지를 만든 의도를 짐작 못할 바 아니다.

 

품위를 잃은 장소와 가치가 떨어진 인간의 공존

그 후, 정확히 40년 동안 공동묘지로 매장이 이루어졌던 망우리. 이제 사람들의 기억 속에 품위 있던 장소는 죽음과 어둠의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당시 대학생들이 미팅에서 망우리에 산다고 말하면 퇴짜 맞을 정도였다. 특히 60년대 70년대 산업화의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망우리는 원해서도 가고 원치 않아도 갈 수 있는 슬프고도 두려운 공간이었다.

오죽하면 동대문에서 망우리로 가는 시내버스 여차장이 청량리중량교망우리가요~” 라고 속사포 랩으로 행선지를 외치면, 사람들에게 환청처럼 다른 외침으로 들리기도 했다.

차라리죽으려고망우리가요~'

품위를 잃은 장소와 가치가 떨어진 인간이 시대를 공존하며 무수한 사연과 애환을 만들어 낸 곳. 망우리 인문학 강의는 차라리 죽으려 망우리행 버스에 몸을 싣는 것이다. 코트 주머니에 소주병을 꽂은 채 몸을 휘청거리며 지난시절 누군가 버스에 올랐던 것처럼, 현재의 나를 그곳에 묻기도 하고 삶을 물으러 떠나는 길이다.

 

망우리 인문학 강의를 열다.

4월 망우리 인문학 강의는 강남시문학회 회원을 비롯해 27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30일 진행됐다. 인문학강의는 망우리 근현대 역사인물의 묘역을 순례하며 그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세상과 사람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되짚어 보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결정적인 삶의 순간에 나를 대입해 시간과 공간 그리고 나와 그의 벽을 허무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다. 인문학 강의코스는 주로 이인성(화가)-도산 안창호(독립운동가)-태허 유상규(의사/독립운동가)-아사카와 다쿠미(총독부 산림청 직원/민예학자)-혜관 오긍선(의사/사회사업가)-소파 방정환(아동문학가)-최신복(아동문학가)-위창 오세창(서화가)-만해 한용운(독립운동가)-죽산 조봉암(독립운동가/정치가)-남파 박찬익(독립운동가)-최학송(문학인)-계영묵(문학인)-대향 이중섭(화가)-박인환(시인) 순으로 진행된다. 본 코스는 서울시가 현재 조성하고 있는 인문학길의 코스와 일치한다. 하지만 매번 동일한 코스와 인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와 참여자들의 관심도에 따라 코스 일부가 추가되거나 변경되기도 한다. 강의 일정은 상반기 5월과 6월 마지막주 토요일에 강의를 열게 된다.

인문학 강의의 강사는 망우리 근현대사 인물 소개서인 그와 나 사이를 걷다의 저자이자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리분과위원장인 김영식 작가가 진행한다.

             

그는 부산 출생이지만 4살 때 상경하여 망우리공원과 가까운 중랑구 중화동과 상봉동에서 대학 때까지 살았다. 2006년부터 일주일에 한 번꼴로 현재까지 500회 이상 망우리공원을 오르내리며 무덤의 비명과 근현대 인물들의 삶을 조명하였다.

 

조선이 낳은 비운의 천재화가 이인성

4월 망우리 인문학 강의에서 가장 주목받은 인물 중 한 사람이 바로 화가 이인성이다. 김영식 작가의 소개에 따르면, 화가 이인성은 1930년대 마라톤 영웅 손기정과 무용가 최승희만큼 유명한 존재였던 모양이다. 당시 어른들은 그림 그리는 아이에게 커서 이인성 될거냐?”라고 농담을 건넬 정도였다고 한다. 1912년 대구에서 출생한 이인성은 1928(17)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서 촌락의 풍경이라는 작품으로 특선을 차지하며 주목을 받게 된다. ‘세계아동예술전람회는 소파 방정환등이 운영하는 개벽사가 주최한 것인데, 어떤 면에서는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 이인성의 천재성을 발굴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타계한 지 20년 가까이 차이가 남에도, 방정환과 이인성은 모두 망우리공원에 잠들면서 사후까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화가를 환쟁이라고 천대하던 시절, 1929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계기로 이인성은 집안의 반대를 극복하고 당당히 소년 천재화가로 주목받는다. 그 후 2년에 걸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과 특선을 수상하게 되고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1932년 이인성 화가가 19세 되던 해,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일본 화가들을 제치고 입선을 거머쥔다. 이 일을 두고 김영식 작가는 김연아가 피겨 스케이팅에서 올림픽 금매달을 차지한 것과 같은 역사적 사건이라고 언급하였다.

일본 유학시절 만난 부인 김옥순은 학력이 일천한 이인성과 집안의 반대로 어렵게 결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1924년 부인이 결핵으로 짧은 생을 마치면서 실의에 빠진 이인성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된다. 걸핏하면 폭음과 주사(酒邪)를 일삼았던 것이다. 두 번째 결혼마저 실패하고 세 번째 결혼까지 치루지만, 1950년 어이없는 사고로 죽음을 당한다. 김영식 작가는 그 당시의 상황을 눈앞에 그려내듯 설명했다.

6·25 전쟁으로 어수선한 상황에 경찰의 불심검문이 수시로 이뤄지는 분위기였겠죠. 화가 이인성이 술에 취한 채, 거리를 걷다가 행색을 수상하게 여긴 경찰관에게 붙들린 거예요. 그런데 이인성이 술도 마셨겠다, 경찰관에게 다짜고짜 조선의 천재 이인성을 몰라보느냐.”고 호통을 친 겁니다. 주눅이든 경찰관이 이인성을 놔주고 경찰서로 돌아와 도대체 이인성이 누구냐?”고 물었겠죠. 그러자 주변에서 그 동네에 술주정뱅이 환쟁이가 있지...”라는 말을 들으니, 한낱 환쟁이에게 당한 일이 화가 난겁니다. 그래서 총을 소지하고 이인성의 집으로 찾아가 말다툼과 몸싸움을 벌이다가 실탄이 발사된 거죠. 결국 그 일로 이인성이 숨지고 맙니다. 그의 나이 38살이었습니다.

황당하기까지 한 조선의 천재 이인성의 죽음에 이르러 참가자들이 하는 탄식과 실소 그리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깊은 상실의 시대를 살다 간 시인 박인환

4월 인문학 강의에서 관심을 끌었던 다른 인물이 있다면, 코스의 마지막 묘역에서 만나는 시인 박인환이다. 아마도 단체로 참가신청을 하신 분들이 시문학회 회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화가 이중섭의 묘역에서 강의를 마치고 망우리 관리사무소 쪽으로 이동하다 보면, 오른편에 박인환의 연보비가 나타난다. 비석에는 그의 시 목마와 숙녀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비석의 맞은편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자 김영식 작가가 스마트폰에 저장된 노래를 틀었다. 박인희가 부른 세월이 가면이었다. 이 노래 가사도 명동의 선술집에서 박인환이 즉흥적으로 시를 짓고 이진섭이 곡을 붙여 그 자리에서 나애심이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진다.)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시()였다. 박인환의 묘 앞, 사각형의 묘비에도 시인 박인환의 묘라 적혀있고 그 밑으로 세월이 가면의 첫 문장이 새겨져 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이 시를 짓기 하루 전, 박인환은 첫 사랑이 묻혀 있는 망우리 묘지에 다녀갔다고 김영식 작가는 설명한다. 평소 술을 좋아했던 그였기에, 코트 주머니에 소주병을 꽂은 채 몸을 휘청거리며 망우리행 버스에 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유작시 세월이 가면을 완성한 사흘 후인 1956320, 만취한 채 집에 들어와 잠을 자다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31. 세탁소에 맡긴 봄 코트는 돈이 없어 찾지 못했고, 겨울 코트를 그대로 입은 채였다. 부음을 듣고 맨 먼저 달려온 친구 송지영이 박인환의 뜬 눈을 감겨주었다.

박인환의 또 다른 시 목마와 숙녀에 대한 김영식 작가의 설명이 이어진다. “도대체 목마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그리고 우연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된 고대 무덤의 부장품인 목마를 본 경험담 그리고 순명효 황후 장례행렬 사진 속에서 종이로 만든 백마를 통해 죽음의 동반자임을 설명했다. 고급진 문장과 달달한 시어(詩語)의 느낌과 달리 1950년대 전쟁의 비극과 죽음, 이별, 허무 등의 시대적 고뇌를 박인환의 탁월한 언어적 감수성을 통해 시로 형상화된 것이다.

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시에 사용된 박인환의 세련된 수사와 평소 그의 행색 등으로 인해 남성을 대표하는 속물로 문단의 비난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전쟁의 참혹한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현실인식이 강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덧붙였다.

그러한 이유에서 일까?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에 대한 오해는 필자의 고교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목마와 숙녀는 시화전의 단골 주제였고 교실마다 한 점씩 걸리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박인환이 작사한 세월이 가면을 부른 가수 박인희의 시낭송 음반도 유행이었다. 모국어지만 낭독하면 혀끝에서 감미롭게 굴려지는 시어(詩語)들이 마치 유창한 외국어를 구사하는 듯 했다. 알 듯 모를 듯 낭만적인 언어들은 지적 허영심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잠자리 뿔테안경을 쓴 친구가 같은 반에 늘 한 명쯤 있기 마련이다. 까칠하기로 유명한 국어선생님 수업시간에 이 친구가 목마와 숙녀의 시낭송을 자원했다. 목소리가 좋았던 친구는 자신의 낭송에 점점 도취돼 가는 듯 했다. 그렇게 시낭송이 끝났다. 선생님의 얼굴에 비웃음 혹은 경멸의 빛이 스쳐 지났다.

이 시가 그렇게 낭만적으로 읽히든?”

 

상실의 두 빛깔

4월 망우리 인문학 강의에서 관심을 가진 두 인물은 공교롭게도 '상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인성은 1942년 아내 김순옥의 사망으로 실의에 빠진다. 절망의 시간을 술로 보내던 화가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준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 최고의 화가라는 타이틀이었을 것이다. 술로 인해 타인과의 불화가 이어지고 괴팍한 성격에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수록, ‘조선의 천재 이인성이라는 변할 수 없는 사실에 집착했을 법하다. 오로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건 '영광스러운 과거' 밖에 없었던 가난한 현실이, 그를 비극적 운명으로 몰고가지 않았을까.

목마와 숙녀에서 시인 박인환은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라면서 2차 대전 후, 허무주의에 시달리다가 템즈강에 투신 자살한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상실을 추모한다. 그리고 6·25 전쟁 이후의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는’ 현실 속 상실감을 토로한다. 어쩌면 시인 박인환의 상실감은 뿌리 깊은 것인지도 모른다. 앞서 밝힌 것처럼 이미 20대에 첫사랑을 잃었고, 그 역시 세상과 작별하기 나흘 전, 망우리에 묻힌 첫사랑을 찾는다. 그녀의 묘를 찾은 다음날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가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처럼 보여지지 않는다.  '목마와 숙녀' 역시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인해, 시인 박인환이 지병처럼 앓고 있던 세상에 대한 상실감을 버지니아 울프의 죽음에 투영시킨 건 아닐까.   

인문학 강의의 마지막 코스인 박인환 시인의 묘역에 앉아 그와 이인성이 겪은 상실감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게 나라면?’이라 자문해 본다. 나역시 그들보다 뛰어난 인내와 처세를 발휘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30대에 요절한 두 천재들의 삶을 무어라 평가할 수 있을까? 하지만 누구도 타인의 삶을 평가할 자격은 없다. 살아있는 사람이 목마를 타고 떠난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럴 수 있겠다공감하며 그들의 삶에 고개 끄덕여 주는 것밖에.


자료참조 '그와 나 사이를 걷다' (김영식 저/호메로스/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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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천 답사, 나는 부끄러워졌다

영주출신으로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이 많았던 답사

이튿날(2일) 아침 박 선생은 일찍 일어나서 물새를 보러가고 나는 늦잠을 잤다. 7시가 다 되어 일어나 세수를 한 다음, 아침을 준비했다. 아침이라고 해야 라면에 밥을 한 공기씩 말아, 김치와 함께 먹는 것이 전부였지만 꿀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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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깝작도요새 내성천을 거닐면서 발견
ⓒ 박용훈



후식으로 커피를 한 잔하고는 오전 8시 40분경에 무섬마을에서 출발하여 물길을 따라 4KM정도 아래에 있는 문수면 조제리까지 천천히 걸었다. 무섬마을 아래쪽에 별로 필요도 없어 보이는 순전히 관광객을 위한 외나무다리가 하나 더 만들어져서 있어 마음이 아팠다. 외부인의 방문이 늘어날지는 몰라도, 또 다른 자연 파괴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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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등할미새 내성천
ⓒ 박용훈



아무튼 박 선생과 나는 오후 5시까지 중간에 식사시간 30분을 제외하고는 계속 걸었으니 8시간 정도 쉬지 않고 나무그늘도 없는 모래사장과 물속을 걸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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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마물떼새 내성천
ⓒ 박용훈



무릎까지 오는 긴 고무장화, 모자와 선글라스, 선크림까지 얼굴과 목, 손과 팔에 잔뜩 바르고 나갔다. 온도계가 한낮에는 25℃를 나타내고 있었지만, 체감 온도는 30℃는 넘을 것 같았다. 반팔과 긴팔을 번갈아 가면서 입고 벗고 하면서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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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종 내성천에서
ⓒ 박용훈



'4KM의 거리를 물길을 걷는다고 하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 것이 아니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면 답은 간단하다. 박 선생은 카메라에 GPS(Global Positioning System, 위성에서 보내는 신호를 수신해 사용자의 현재 위치를 계산하는 위성항법시스템)까지 장착하여 지난 사진을 확인해가면서 과거와 현재의 변화된 모습을 비교하는 사진을 찍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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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훈 선생 초록사진작가
ⓒ 김수종



덕분에 놀랍도록 변한 모래사장의 풍경과 내성천의 오늘을 비교 확인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GPS를 사용해도 약간의 위치 차이와 특히 각도를 맞추는 일은 쉽지 않아서 포인트를 정하고도 3~4번씩 자리이동과 위치확인 및 각도를 조절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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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교 사진 옛 사진과 현재의 모습의 비교
ⓒ 김수종



생각보다는 지루한 작업이었지만 예전 사진을 보면서 감사하게 따라 다녔다. 그리고 정말 많이 놀랐다. '내성천이 습지가 되고 산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눈물이 났다. "영주댐이 건설되면서 2012~13년 집중적으로 댐 상하부에서 골재채취를 했고, 내성천은 더 빨리 파괴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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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교 사진 정말 모래사장이 많이 줄었다
ⓒ 김수종



나는 지난 2011년 봄, 홍의락 국회의원, 환경연합 염형철 사무총장 등과 함께 봉화군 해저리에서 무섬마을까지 내성천을 따라 걸은 적이 있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보니 나름 당시에는 모래강이 살아있었던 최후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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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슬기 다슬기도 조금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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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은 곳곳에서 악취도 나고, 모래사장은 여뀌와 버드나무가 자라고, 물고기와 물새도 많이 줄었다. 특히 조개류는 그 수가 더 많이 줄었다고 한다. 수달도, 먹황새도 줄었다. 모래유입이 줄어드니 생태계가 전반적으로 급속하게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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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뀌와 버드나무 이제는 버드나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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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인지 박 선생은 "아무리 목이 말라도 냇물을 그냥 마시지는 마세요, 배탈이 나거나 두드러기가 나는 경우도 있어요"라고 했다. 중간에 목이 말랐던 나는 박 선생 몰래 냇물을 조금 마셔봤지만, 다행스럽게도 배탈은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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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달, 고라니, 황새 발자국 역시 짐승들이 많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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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물길을 따라 걸으면서 박 선생에게 어린 시절 영주 시내를 관통하는 서천과 이곳 내성천에 수영하던 기억과 물고기를 잡던 이야기를 했다. 민물고기 이야기를 하다가 운 좋게 중지 정도 되는 크기의 모래무지를 한 마리 발견했다. 잡아서 사진을 찍고 놓아 주었다. 그리고 재첩과 다슬기도 조금 주웠다. 

따라 다니는 나는 조금 지루하고 덥고 힘들었다. 하지만 너무도 묵묵히 좌표를 찾고 사진을 찍으면서 다니는 박 선생의 모습에 감동하여 힘들어도 힘들다는 내색 없이 따라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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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첩 작은 재첩이 조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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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간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나는 그의 정성과 내성천에 대한 깊은 애정도 발견했다. "이제 거의 희망이 없어진 내성천에서는 올해를 마지막으로 사진기록 작업을 끝낼 예정이다"고 했다. 이제는 파괴된 내성천의 주인인 영주출신으로 너무 마음이 아팠다. 

하긴 자신의 고향 마을까지 수몰지로 만든 현역 국회의원이나, 국가사업이라며 당연히 하자고 선동했던 전임 시장에 비하면, 가끔이라도 찾고 안타까워하는 내가 조금은 나을 수도 있다고 자족해 보기도 한다. 아무튼 안타깝고 부끄럽고 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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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떡 서울에서 산 떡으로 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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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시간 가깝게 물과 모래밭을 오가면 사진 작업을 하고는 잠시 쉬면서 서울에서 가져온 떡을 두 조각씩 나누어 물과 커피와 함께 점심을 했다. 이동식으로는 정말 떡이 최고다. "아직은 날이 서늘하지만, 한여름에는 막걸리 냄새가 나는 발효된 술떡 밖에는 먹을 것이 없다"고 했다. 술떡을 좋아하는 나는 영주에 유명한 기지떡(술떡)집이 여러 곳 있다고 소개를 했다.

박 선생은 "영주시는 문화유산인 부석사, 소수서원 같은 것을 관광자원으로 집중 홍보하고 있다. 하지만 영주에는 자연유산인 소백산과 내성천이 주는 혜택이 더 크다. 물론 가능성도 더 많은데, 이것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에는 무섬마을도 한옥보다는 모래사장이 더 중요하다. 특히 세계적인 모래하천인 내성천을 보호하는 일에 영주댐 철거는 필수적인 사항이다"라고 영주사람이 나를 꾸짖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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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섬마을 새로만든 외나무다리 조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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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나도 많은 것을 배웠다. 물길을 따라 내려가면서 왼편의 석탑천 유출구부터 4~5KM는 안동 땅이고, 오른편은 전부 영주 땅인데, 안동은 주로 바위와 자갈이 많고, 영주는 모래뿐이다. 안동에서 보면 산이 막혀있고, 영주는 바로 앞에 냇물이 펼쳐지는 모래사장이다. 가뭄도 막아주고, 농사에도 큰 보탬이 되고, 물고기도 많았던 내성천은 영주사람들에게는 보물이었다.

그런데 그 보물 망치는 일을 영주사람들이 주도했다. 특히 지역의 유력인사들이 앞장을 서서 댐건설을 주창했으니 정말 답답한 꼴이다. 모래강은 풀이 자라고 나무까지 자라는 습지가 되면 다시 원상회복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제라도 영주댐을 없애지 않으면 1조 원을 들어 지은 영주댐이 후일 10배~100배 이상의 피해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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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뀌 온통 풀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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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답답한 마음을 안고 식사를 마치고는 다시 천천히 물길을 따라 두어 시간을 더 걸어 조제리에 도착하니 오후 5시다. 영주로 가는 시내버스는 7시에 온다고 하여, 바로 석탑교 다리를 건너 안동시 북후면 석탑리로 가서 안동시내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안동시외버스터미널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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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래무지 중지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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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영주와 예천을 흐르는 세계적인 모래강인 내성천, 그리고 그 중앙에 자리하여 모래의 이동을 막고 있는 완공직전의 영주댐. 반드시 후손들에게 소중하게 물려주어야 하는 고귀한 우리의 자연유산, 그리고 물길을 따라 느낄 수 있는 유교문화. 정말 생각이 많아졌고 마음 아팠고 공부할 것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낀 낙동강 상류의 내성천 답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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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근대건축, 용산을 중심으로

 

그림1. 용산신학교(1892)와 성당

 

나는 지난 2009년에『서울의 근대건축』이란 제목의 도집에 감수자의 한 사람으로 관여한 바가 있다. 이 도집은 1년 이상의 준비를 거쳐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간행한 것으로, 2010년 3월에 들어서 배부하기 시작하였다.『 서울의근대건축』은서울시의문화재인번사창, 뚝도수원지제1정수장, 승동교회, 천도교중앙대교당,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 구 배재학당 동관, 구세군중앙회관, 광통관, 구 동아일보 사옥, 구 제일은행 본점을 다루며 풍부한 사진과 도면, 인터뷰 등을 수록하였다. 도집의 간행과정을 감수하면서, 각기 다른 이유로 서울의 문화재가 된 이 10개소의 근대건축을 어떤 일관된 관점으로 다루는 논문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서울의 근대사를 서술하면서 이런저런 건물이 나타났다고 건물에 관한 기술을 외삽(外揷)하는 기술방식을 취하거나 어떤 방식으로 누구에 의해서 근대건축이 유입되었는가를 찾는, 곧 출자(出自)를 묻는 기술방식을 취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근대건축 전개의 동인을 건축 안에서 찾아서 기술하기란 비교적 어려운 작업인 것 같다.


여기에서 한국근대건축의 특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이러한 특성은 한국근대건축 만의것이 아니라 식민지를 거친 여러 나라들의 근대건축이 갖는 공통된 특성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 점에서 한국근대건축사에서 용산이 차지하는 위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용산은 근대의 문명이 집중된 장소이면서 식민통치를 위하여 개발된 식민지 도시로서 한국근대건축의 특성을 집약적으로 압축하고 있다.


용산은 조선시대부터 수운(水運)이 발달하고 물산(物産)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주요한 창고와 그 관리시설들이 용산에 입지하였다. 한강변의 여러 포구 중에서 용산이 도성으로 가는 최단 거리 길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말의 개항은 용산 일대의 변화를 가져왔다. 1882년의‘조일수호조규 속약’과‘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그리고 그 후의 조약들은 양화진(楊花津)과 한양에서 외국 상인들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1883년에는 개시장(開市場)이 양화진에서 용산으로 이전하게 되어, 용산은 외국상인 진출의 교두보가 되었다. 1890년대에 들어서는 인천에서 용산까지 증기선이 운항하기 시작했다. 1898년에는 화폐를 주조하는 전환국이 인천에서 용산의 군자감으로 이전하였다. 우편과 전신도 용산에 들어와서 용산우편수취소(1899)와 용산전신수취소(1902)가 생겨났다. 1903년에는 한성전기회사 제2발전소가 청암동에 자리잡았다. 한편, 한양 도성의 남부에 살던 가톨릭교도들은 1839년의 기해박해 때 당고개(堂峴)에서 순교하였다. 지금의 신계동(新契洞)에 속하는 당고개는 서소문, 절두산, 새남터와 더불어 4대 순교성지이다. 이후 가톨릭은 지금의 원효로에 1892년에 용산신학교를 세우고 1907년에는 성당을 건립하였다. (그림 1)

 

 그림2. 용산역(1906)

그림3. 조선총독관저(1912)


용산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철도였다. 1899년 경인선 철도공사 때 한강철교 가설공사를 시작하여 1900년 7월에 완성되었다. 이와 더불어 간이 용산역이 1899년에 건립되었다. 1900년 1월에 용산과 도성을 잇는 궤도전차가 놓였다.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로 용산은 경원선과 경의선의 시발점이 되어서 한반도의 철도 중심지가 되었다. 1905년 6월에는 용산역 서쪽으로 대규모의 열차수리공장(뒤의 서울철도공작창)이 세워졌고, 1906년에는 용산역이 서양식 목조로 완성되었다. (그림 2) 1907년 12월에는 용산동인병원(뒤의 철도병원)이 설립되었고, 아울러 만주철도관리국, 철도학교, 철도사택 등도 용산에 세워졌다. 한편 1912년에는총독관저가 가타야마 도우쿠마(片山東熊)의 설계로 철도사택 북쪽에 유럽풍으로 화려하게 지어졌다. (그림 3)

 

그림4. 경성전차안내도(1929)중의 용산 일대

 

용산에는 일본인들이 19세기말부터 거주하여 지금의 원효로를 중심으로 영정(榮町, 사카에마치), 미생정(彌生町, 야요이쪼) 등의 마을을 이루고, 거류민회를 조직하였다. 거류민회는 1906년부터 일본인 거류민단으로 바뀌었고, 1903년에는 일본인만 다니는 용산공립심상소학교가 설립되었다. 일본인들이 거주하면서 용산 일대에는 학교, 사찰, 신사, 유곽 등이 들어섰다. 이후에 용산은 식민지 도시로서의 모습을 갖춰갔다. (그림 4) 한편, 1925년의 을축대홍수는 용산 일대에 피해를 주었고 주변의 하천을 정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군은 1894년 청일전쟁 때 효창원 일대를 숙영지로 삼아 기지를 두고, 만리창에 임시사령부(假司令部)를 둔 적이 있다. 이후에 1904년 러일전쟁 때 한국주차군사령부를 두면서, 일본군은 용산 일대의 300만평을 군사기지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대규모의 군사기지는 일본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1906년 4월부터 사격장, 사령부, 사령관 관저, 위수병원, 병영, 창고, 무기고, 연병장, 형무소 등 수 많은 군사관련시설이 건립되었다. 1916년부터 일본군은 한반도에 2개 사단(師團)을 상주(常駐)시켰고, 사령부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용산에 두었다. 일제는 도성의 바로 밑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철도(경의선₩경원선)를 이용하여 만주 또는 러시아 등의 국경으로 병력을 쉽게 파견할 수 있는 구상으로 용산의 군사기지를 완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용산의 군사 기지는 비단 한반도뿐만이 아니라 동아시아를 염두에 두고 건립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용산 기지는 1945년에 미군이 인계하여 지금까지도 군사기지로 사용하고 있다. 미군은 일본군의 시설을 인수하여 사용하면서 내부는 바꾸었지만 외관은 대체로 그대로 놔두었다. 붉은 벽돌로 지은 주요한 군사시설들은 앞으로 보존활용의 여부가 문제가 될 것이다. (그림 5) 아울러 방대한 면적의 용산기지는 공원화의 방향을 두고 커다란 논란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림5. 용산 북쪽기지 벽돌 건물의 일부


용산은 한국 근대의 흔적들을 간직하면서 일제시대에 형성된 도시계획의 골격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용산은 이제까지 철도기지, 군사기지로 사용되면서 서울의 성장과 발달을 차단하여 왔다. 이제 도성에서 가깝고 평탄한데다가 대규모 토지이기까지 한 용산 지역은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 용산은 그 과거의 흔적들을 어떻게 간직하고 또 지워야 할 것인가?

 

- 글: 우동선ㅣ 한국종합예술학교 건축과 교수

- 이 글은 2010년 내셔널트러스트 매거진 15호를 통해 소개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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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조선의 수도로 500여년을 지냈고, 대한제국의 황도를 거쳐 일제강점의 수난과 동족상잔의 비극 그리고 보릿고개를 극복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한 때 치욕스러운 시기도 있었지만, 긴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자랑스러운 발자취와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해도 하등의 지나침이 없다. 그러한 서울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서울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도성이 전조후시(前朝後市) 좌묘우사(左廟右社 - 궁궐을 중심으로 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직, 남쪽에 관청, 북쪽에 시장을 배치)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도성 안에서 경복궁과 육조거리(1395년 태조의 명으로 조성된 거리로, 광화문 좌우에 관아가 배치되었다) 그리고 종묘와 사직단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 뿐일까?

 

하늘에서 바라본 서울전경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서울,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잘 알아야만 할 것 같은 서울이지만,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한양이 만들어졌을 당시 서울의 영역과 조영(造營)에 담긴 뜻을 제대로 알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는 서울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높음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역사문화도시인 서울에는 가치가 높은 수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한양 조성 당시에 만들어진 성곽과 궁궐을 비롯하여 지난 600여년 동안 서울이 만들어온 문화유산은 유형에서 무형, 동산에서 부동산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고, 이들의 가치에 의해 서울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평가되어왔다. 그렇다면 서울 자체의 가치에 의해서 평가될 수는 없는 것일까?


유사 이래 도시는 삶의 근간이 되어 왔고, 삶의 근간으로서의 도시의 중요성은 근대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자체를 문화유산으로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지구상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많은 도시가 있지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도시의 대부분은 역사문화유산을 담고 있는 그릇으로서의 가치가 평가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문화유산으로서의 도시 자체가 평가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살아 쉼쉬는 도시에서는 더욱 그렇다.


우선 서울을 문화유산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서울을 역성혁명을 통해 수립된 조선의 수도라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왕조의 계보가 달라졌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불교를 국가이데올로기로 하는 나라에서 유교를 국가이데올로기로 하는 나라로의 전환이라는 틀에서 조선을 바라보면,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변화가 생긴다.

유교이데올로기와 도성의 공간구조 (밑그림제작: 이상구)


나라를 세운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새로운 국가이데올로기를 백성 모두가 공유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지는 일일 것이다. 지배자의 이데올로기를 백성들이 함께한다면 그 이상의 튼튼한 기반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교이데올로기의 틀을 확고하게 세우기 위해 조선의 사대부들은 무슨 고민을 했을까? 행정시스템을 유교체제로 바꾸고 행정의 수반을 유교사상에 충실한 사람으로 앉히면 그들의 꿈이 이루어질까? 적어도 조선을 열었던 사대부들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듯 하다. 그들은 백성 모두의 삶이 유교사상으로 충만할 때 유교국가로서 조선의 틀이 완성된다고 생각했고, 그 고민의 해법을 도시에서 찾았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유교의 기본 덕목이라고 할 수 있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도시공간속에 펼쳐놓은 것이다.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의 출입문에 유교의 덕목을 담아 성의 안팎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유교의 덕목을 가슴깊이 새기도록 만들었다.‘ 仁’을 흥하게하는 흥인지문(興仁之門), '義'를 돈독하게 하는 돈의문(敦義門), '禮'를 숭상하는 숭례문(崇禮門),‘ 智’를 널리 퍼트리는 홍지문(弘智門),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성의 중심의 종루에는‘信’을 담은 보신각(普信閣)을 두어 매시간 그 뜻이 도성에 퍼지도록 한 것이다. 유교이데올로기를 도시의 일상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도시공간을 계획한 것이다. 얼마나 획기적인 아이디어인가?

지구상에 최초로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했던 소련의 사회주의자들은, ‘도시와건축’이 자본주의 인간을 사회주의 인간으로 바꾸기 위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를 사회적응축기(Social Condenser)라 불렀다. 그리고 그때의 성과중의 하나인 나르콤핀공동주택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한 시도가 추진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서양보다 500년 전에 이미 조선에서 불교형 인간을 유교형 인간으로 바꾸기 위해 도시의 역할을 인지하고 이러한 생각을 실천에 옮긴 서울의 도성계획이 세계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갖는지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경조오부도에 나온 도성과 성저십리

 

다음으로 한양의 영역에 대해서 살펴보자. 많은 사람들이 4대문과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성 안이 한양의 영역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한양의 영역은 도성과 성저십리까지를 포괄하는 지역이었다. 동쪽으로는 중량천변까지 서쪽으로는 홍제천 그리고 남쪽으로는 한강에 이르는 지역까지를 포함하는 지역을 말한다. 도성의 공간에 대해서는 어떻게 계획되었고 지난 600여년 동안 어떠한 변화를 겪어왔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탓에 비교적 상세하게 그 내용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양을 구성하는 또 다른 축이었던 성저십리가 어떤 곳이었고, 어떠한 변화를 겪어왔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조선시대의 성저십리가 어떤 곳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경국대전과 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에 남아있다. 18세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산금표 도에는 금장(禁葬)과 금송(禁松)이 행해지는 영역이 표시되어있다. 금장제도란 도성과 성저십리에 묘를 만들지 못하게 하는 제도였고, 금송제도란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는 제도였다. 이 제도는 성저십리에 사람의 거주를 극히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성저십리를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곳으로 만들었다. 왜 조선정부는 도성보다 넓은 땅을 한양의 행정구역에 포함시키면서 성저십리 안에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정책을 폈을까? 그 답은 도성의 보호였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도성의 무분별한 확장을 막고 성저십리내에 시가지의 형성을 제한함으로써 한양을 보호하는 정책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개발제한구역’ 즉 그린벨트를 연상시킨다. 1972년에 도입된 그린벨트 덕분에 1960년대이후 무분별하게 확장되어 오던 서울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고, 오늘의 서울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린벨트의 긍정적인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유럽에서 처음으로 도입된 그린벨트 정책은 산업혁명으로 피폐해진 도시환경을 되살리기 위한 환경정책의 일환이었다는 점을 감안 한다면, 산업혁명도 없던 600년 전에 수도를 만들면서 도시를 쾌적하게 보호하기 위해 그린벨트를 설치 하였다는 것은 도시계획적 측면에서 매우 뛰어남은 물론 서울이 선견지명이 있는 도시계획을 갖춘 도시였음을 의미한다. 시가지와 그린벨트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서울은 도시와 자연생태가 공존할 수 있는 도시로 계획되었던 것이다.


그린벨트 제도의 도입과 도시를 통해 새로운 국가 이데올로기의 성공적인 정착을 꾀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성리학자들의 생각이 그대로 투영되었고, 600년 전 ‘前朝後市左廟右社’의 도시계획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살아 쉼쉬는 도시, 그리고 도시와 자연이 어우러진 서울은 서울에 담긴 수많은 역사문화자산을 넘어 도시 자체가 갖는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에 의해 새롭게 평가될 때 역사도시 문화도시로서의 격을 한 껏 높일 수 있을 것이다.

 

- 글: 안창모 | 경기대학교 건축대학원 교수

- 이 글은 2010년 내셔널트러스트 매거진 15호를 통해 소개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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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어릴 때 시골에서 살았다. 집에서 농사를 짓지는 않았지만 논두렁길을 걸을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음을 나중서 알았다. 개구리밥을 손으로 건져 올릴 수 있었던 것이. 바람에 일렁이는 벼의 물결을 볼 수 있었던 것이. 추수해 쌓아놓은 노적가리 위에서 구를 수 있었던 것이. 꽝꽝 언 논에서 썰매를 탈 수 있었던 것이 축복이었음을 알았다. 

뒷집과는 담을 헐어 하나의 낮은 담을 사이로 하고 살았다. 까치발 높이의 담 너머론 늦잠 잔 엄마를 대신해 김 모락모락 나는 밥공기가 건네지기도 하고 부침개가 냄새와 동시에 넘어오기도 했다. 엄마도 마실 가고 오빠와 동생도 골목으로 놀러나간 날 마루에 혼자 앉아 집을 보고 있으면 앞문으로 아이들이 우르르 뛰어 들어와 뒷문으로 우르르 달려 나가곤 했다. 그게 지름길이었고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내 아이들에게도 도심 속에서 고향과 같은 마을을 주고 싶어 성미산마을로 이사왔다. ‘넌고향이어디니?’ 물음에 서울이요’ 답하는 아이들은 고향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었기 때문이다. 둘째가 태어나던 해 세 살 된 큰 아이를 공동육아어린이집에 보내며 인연을 맺게 된 성미산마을. 아이들은 마을의 품에서 자라 어느덧 아홉 살 일곱 살이 되었다. 오며 가며 만나는 어른들이 내 아이들의 이름이 뭔지, 나이는 몇인지, 부모는 누군지, 사는 곳은 어딘지 안다는 건 참 마음 든든한 일이다. 그렇게 이름이라도 불러주고 머리라도 한번 쓰다듬어 주고 관심 주는 관계를 맺어준 게 아이들에게 무엇보다 큰 선물을 한 거 같다는 생각이다.

마을사람 중 누가 제일 좋아?”

몇 년 전 둘째 아이 어린이집 등원 길에 물은 적이 있다. 아이는 활짝 웃으며 답 했었다.

. 마을사람 다 좋아.”

 

성미산마을과 성미산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성미산마을인지 정확하게 아는 이는 없다. 행정구역상의 명칭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미산 정상에 배수지를 만들고 아파트를 지으려는 시도에 맞서 성미산을 지켜내는 주민들의 활약을 지켜보며 밖에서 붙여준 이름이기 때문이다. 성미산마을이 어디냐고, 구성 주민들은 몇이냐고, 지나가는 누굴 잡고 물어보든 같지 않은 대답을 할 게 뻔하다. 서울시 마포구 성미산마을은 어떻게 생겨나게 된 걸까.

십오 년 전. 도시에서 생태적으로 아이들을 키워보겠다는 사람들이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찾아 모여들었다. 아이들이 자람에 따라 방과 후 어린이집을 만들고 건강과 환경에 좋을 먹을 거리를 생각하며 생협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협동의 힘으로 2001년부터 삼 년여에 걸친 싸움 끝에 성미산을 지켜냈다.

벌목 당시의 성미산

전설처럼 내려오는 성미산 싸움 얘기들은 참 감동적이다. 기습적으로 산의 나무를 베어내는 것을 막기 위해 산 정상에 천막을 치고 조를 짜서 지켰다. 명절에도 산 위에 공동 차례상을 차리며 산을 비우지 않았다. 포클레인 삽날을 가로막고 전기톱날에 몸을 던지는 물리적 저항을 했다. 그러는 한편 성미산 음악회 등을 통해 성미산을 사랑하는 마음을 외부에 전하는 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 공청회를 열어 배수지 공사가 필요하지 않음을 객관적 수치로도 밝혀냈다. 그리고 마침내는 지켜냈다.

되살아난 성미산 


주민들은 성미산을 지켜내며 산만 지켜낸 게 아니었다. 겨울 혹한 천막 안에서 의지한 건 작은 갈탄 난로 하나가 아니라 서로의 체온이고 열정이었다. 천막 안에서 나눈 얘기들은, 함께 꾼 꿈들은 이후 현실로 하나하나 빛을 발하고 있다. 대안학교, 마을카페, 공동체방송, 마을재사용가게, 마을극장 등을 만들었다. 이제 지역화폐가 그 첫발을 떼고 있으며 4월이면 마을식당도 문을 연다. 또 준비모임인 의료생협도 곧 준비라는 수식어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이렇듯 대안적인 실험들을 본격적으로 벌일 수 있도록 뒷심이 되어준 성미산. 성미산마을 사람들에게 성미산은 그냥 산이 아니다. 마을의 상징이요 마을의 자존심이다. 마을의 당산과도 같은 존재다.


動産이 아닌 마을동산의 가치

어쩌면 운이 좋은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에게 또 하나의 선물인 성미산을 줄 수 있다는 게. 내가 어릴 적 뛰어놀던 고향의 옥녀봉 같은 동산이 이사 온 마을에 있다는 게 말이다. 그런데 운이 좋아 그런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성미산은 절로 지켜진 게 아니니 말이다. 목숨 건 성미산 대첩을 통해 성미산을 우리들에게 주민들에게 후대에게 물려준 노력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성미산 지키기는 마침표를 찍었을까. 또다시 바람 앞의 촛불, 포클레인삽날 앞의 성미산이 되어있다. 홍익학원에서 그 작은 산의 일부를 깎아 초중고를 이전해 오려 하고 있는 것이다. 마포구청도 서울시청도 초중고를 이전해 주는 대가로 홍익학원 소유의 나머지 땅을 공시지가로 매입한다는 셈속이다. 성미산생태공원화에 드는 예산은 줄이고 생색만 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웃은 사촌이라 하지요. 멀리 있는 친척도 사촌만은 못 해요라는 가사가 있다. 멀리 있는 명산보다 동네의 동산이 더 가치 있을 수 있다는 얘기도 맥을 같이 한다. 어른 아이 할 거 없이 즐겨 찾는, 매일 오르는 동네 뒷산의 가치를 과연 얼마라고 값을 매길 수 있는 것일까.

한강으로 이어지는 생태축에도 마포에 하나 남은 자연산인 성미산은 주요한 노릇을 한다고 한다. 단절된 생태계를 잇는 비오톱 1등급지로 천연기념물 붉은배새매가 머무는 곳이기도 하다. 비오톱이란 나무, 곤충, 미생물 등 다양한 생물종의 공동 서식장소를 말한단다. 산을 뭉갠 뒤에 옥상에 나무 심고 운동장에 잔디를 깔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얘기다. ‘내 돈 주고 샀으니 내 마음대로라는 식으로 산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일까. 산의 주인은 산에 살고 있는 동식물, 산을 거쳐 가는 조류, 산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 산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앞으로의 세대까지 포함하는 것이 아닐까.

성미산이 사유지로 있는 한 돈으로만 보고 계산기를 두들기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개발보다 환경으로 얻게 될 경제적 가치는 뒤로 한 채 말이다. 부디 전체가 공유지로 매입되어 생태공원이 되길 바란다. 사람은 개발의 삽질로 산 하나 쉽게 파괴할 능력자이지만 파괴한 산을 다시 만들지는 못하는 무능력자이기도 하다. 더 이상 산에 구멍을 뚫고 숲을 뭉개고 강을 막고 바다를 메우며 발전을 얘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연의 선물은 내가 받았다고 내가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같이 쓰고 물려 쓰는 것이란 건 이제 내 일곱 살 둘째 아이도 안다.

 


 ◎ 서울 성미산 가는 방법서울지하철 6호선 망원역 1번 출구에서 직진 → 우체국사거리에서 우회전 후 300미터 직진 → 성서초등학교 정문 쪽으로 성미산 올라가는 길

 ◎ 성미산 마을은 7회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보전대상지 시민공모전2009, 이곳만은 꼭 지키자!에서 산림청장상을 수상한 곳입니다.


 

※본 글은 2010년 봄에 쓰여진 글입니다. 2010년 중순에는 홍익재단의 기습벌목과 공사가 진행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한 내용 및 성미산에 대한 소식은 <긴급>성미산 기습벌목, 공사시작 , 성미산대책위원회 블로그 등을 참고하세요.



<내셔널트러스트가 추천하는 NT여행지>

-13호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내셔널트러스트 여행: "사라져 가는 고귀한 자연의 가치를 살리는 것"

-17호아리랑학교 추억의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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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콕, 내셔널트러스트가
보전하는 영화 속 마을: 해리포터를 만나러 영국으로 고고!

 

 

영국 내셔널트러스트가 지키고 있는 자연과 문화유산 중에 그 어느 것 하나 아름답고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도 아름다움과 소중함이 유독이 빼어난 곳을 꼽으라면 레이콕(Lacock)이란 마을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의 유일한 ‘내셔널트러스트 마을’인 레이콕은 마을 전체가 내셔널트러스트의 소유다. 중세마을의 풍경이 마치 냉동된 듯이 남아 있고 그에 상응하는 일상 문화가 온전히 보전되어 . 덕택에 레이콕은 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무대가 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헤리포터의 촬영세트가 되면서 세계적인 유명세를 탔다.


레이콕은 런던에서 서쪽으로 17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역사도시 바스(Bath)인근의 전원에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은 동편에 있는 레이콕 사원이 13세기에 지어지면서 사원의 장원에 딸린 일꾼들이 거주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조성되었다. 마을의 건축물은 750여년의 역사를 머금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각의 세기를 살아온 흔적들이 아기자기하게 새겨져 있다.


레이콕 사원의 건립자는 헨리 3세 시절 솔즈베리(Salisbury) 백작부인인 엘라(Ela)라는 사람이다. 남편 윌리암 롱제스피(William Longespee)는 헨리 2세의 서자로서 권리장전(Magna Carta) 체결에 참여했던 막강한 인물이었다. 엘라는 함께 시간을 보낸 남편의 마음 속에 있던 신앙적 시설의 하나로 레이콕 사원을 건립했다. 건립 당시 영국 왕실은 각종 건축 부자재를 하사했다.


여자 수도원인 레이콕 사원에는 15~25명 남짓한 수녀가 있었지만 가사나 구제활동이 많아지면서 평수녀(lay sisters)가 급격히 늘었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장원에 속한 소작농이었다. 사원과 영주는 이들에게 많은 시혜를 베풀었는데, 당시로선 그 평판이 인근에 자자했다. 레이콕의 마을 공동체가 오래 동안 지켜진 데에는 이 같은 배경이 있다. 이러한 생산관계와 풍족한 농토 덕분에 레이콕은 중세 내내 양모 생산지로 유명했다.

 

 

 


레이콕 마을을 만들고 지탱해온 레이콕 사원은, 헨리 8세가 전국의 수도원 376개를 철폐할 때인 1595년, 궁중의 요직을 맡고 있던 윌리암 샤링톤(William Sharington)에게 불하되었다. 부유한 노폭가문(Norfolk Family) 출신인 윌리암은 일찍이 이탈리아를 방문해 깊은 감명을 받을 정도로 출중한 예술적 감각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원의 이층만 주거용으로 바꾸고 회랑이 있는 일층의 중세풍 사원 공간은 그대로 보존했다. 아울러 8각형 3층탑과 르네상스식 굴뚝 등을 첨가하여 건물의 미관도 향상시켰다.


그러나 자식이 없었던 윌리암은 남자 형제인 헨리경(Sir Henry)에게 레이콕의 소유권을 넘겼다. 그리고 헨리의 막내 딸 올리버(Olive)가 존 탈보트 경(John Talbot) 집안으로 시집을 가면서 레이콕은 탈보트 가문의 소유로 다시 넘어갔다. 레이콕 사원은 그 이후 주인의 취향에 따라 늘 변경되었다. 특히 1750년대 존 아이보리 탈보트(John Ivory Talbot)가 60여 년 간 주인으로 사는 동안 사원은 고딕(Gothick) 풍으로 대대적으로 바뀌었다. 지금의 고풍스러운 모습은 이 때 꾸며진 것이다.


18세기 이후 레이콕의 모습은 그대로 멈추어 있다. 이는 소유주인 탈보트 가문이 개발의 압력을 줄곧 막아왔던 노력의 결과다. 철도가 마을근방으로 통과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레이콕은 산업혁명의 열풍으로 부터 비켜설 수 있었다. 사각 형태의 도로를 따라 건물이 배열된 마을의 구조와 모습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보전을 위한 바로 이러한 노력의 소산이다.

 

 

19세기 중반 레이콕 사원은 근대 사진술을 탄생시킨 산실이었다. 1835년 당시 이곳에 거주하던 윌리암 헨리 폭스 탈보트(William Henry Fox Talbot)는 사원 1층의 격자형 창문을 통해 비춰진 거꾸로 선 그림자를 네거티브(음화)로 찍는 데 성공했다. 그전에 그는 화학처리 한 그림종이에 물체를 얹어 햇볕을 쪼여 모양을 본뜬 뒤 이를 다시 화학처리 하여 본래 모양을 구현하는 포토제닉 드로잉(photogenic drawing)기술을 개발한 적이 있다. 이 기술과 1835년의 네거티브 촬영 기술을 합쳐, 그는 1840년에 근대 사진의 원형인‘네가 포지법’을 발명했다. 레이콕 사원 입구엔 근대 사진의 역사를 보여주는 ‘폭스 탈보트 박물관’이 있다.


이러한 이력을 간직한 레이콕은 20세기 들어 소유주인 탈보트 가문이 계속 유지 관리하기가 힘든 상황을 맞게 되었다. 경제력의 약화, 과중한 세금, 시설의 노후화 등으로 영국의 전통 귀족들은 보유한 대저택이나 장원을 유지하기가 벅차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노동당 정부가 도입한 고율의 상속세는 재산을 보유하는 것은 물론이고 상속조차 힘들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정부는 내셔널트러스트에게 재산을 증여하면, 소유권은 내셔널트러스트로 넘어가더라도, 일정한 조건 하에서 원 소유주가 계속 거주하도록 허용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문화유산에 해당하는 많은 대저택들이 이렇게 해서 ‘국민을 위한 영구보전’을 전제로 내셔널트러스트로 증여되었다. 레이콕의 경우도, 1944년 당시 소유주였던 마틸다 탈보트 여사에 의해 사원과 함께 마을 전체가 내셔널트러스트로 기증되었다. 탈보트 집안의 사람들은 아직도 사원의 일부에서 계속 살고 있다.

 

레이콕 마을의 전경

 

레이콕 마을에는 약 86 가구가 살고 있다. 이들은 모두 내셔널트러스트가 소유한 주택 등을 임대하여 사는 세입자들이다. 이들을 받아드릴 때 내셔널트러스트는 엄격한 심사를 거치고, 또한 건물의 이용이나 거주하는 방식에 대해 서약을 받는다. 세입자를 뽑을 때 특히 마을 사람들의 후손들이 우대를 받는다. 이는 본래 살았던 사람들이 마을 보전에 더 적극적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말하자면,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의 직계 자손들이 집과 마을의 풍습을 그대로 지키는 조건으로 임대하여 살게 함으로써 마을의 건축물과 마을의 생활습속을 함께 보전해 가는 것이 내셔널트러스트가 레이콕을 지키는 비법인 셈이다. 내셔널트러스트는 세입자들이 내는 임대료에서 마을관리 경비의 60% 이상을 충당하고 있다.

 

 

 

- 글: 조명래 | 단국대 교수,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이사

- 이 글은 2009년 여름에 내셔널트러스트 매거진 12호를 통해 소개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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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계사이트 정선 아리랑학교 추억의 박물관을 만나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와 연계 사이트로 인연을 맺게 된 ‘아리랑학교 추억의 박물관’은 정선아리랑연구소(소장:진용선)에서 운영하는 강원도 최초 근·현대사 자료 전문 박물관이다. 2004년 문화관광부 복권기금 지원을 받아 2005년 2월 개관한 추억의 박물관은 기획 전시 중심의 작은 박물관으로 정선아리랑연구소에서 소장하고 있는 2만2천 여 점의 근현대사 자료를 다양한 주제의 전시로 만나날 수 있는 곳이다. 딱지, 노래책, 삐라, 음반, 아리랑 등 다양하고 이색적인 특별전시회를 열어 많은 사람들과 국내외 언론의 관심을 받고 있으며 현재는 6·25전쟁 60주년 기념 기획전 ‘아리랑의 기억’전이 열리고 있다. 아리랑연구자로서 ‘색동’에 푹 빠져있던 진용선 소장에게 ‘왜 추억의 박물관인가’ 물어보았다.

 

 추억의 박물관 '아리랑학교'“어릴 때부터 제가 모았던 자료들을 혼자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니라 지역과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1997년 폐교(매화분교)를 활용하여 아리랑학교를 운영하였는데, 이러한 폐교를 통한 문화활동은 항상 공공성을 지닙니다. 누가 무엇으로 사용하던지 폐교는 그 지역문화의 중심이었으며, 지금도 그런 의미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잠시 머무르는 사람으로서 아리랑연구소가 있는 것일 뿐입니다. 시골 혹은 산길을 걷다가 박물관이 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딱지, 삐라, 아리랑, 음반, 학용품 등을 다양한 자료를 모두 포괄할 수 있는 박물관으로 ‘추억의 박물관’을 개관하였습니다.”

추억의 자료들로 가득차 있는 박물관

2005년 개관할 당시 인터넷 엠파스 ‘가보고 싶은 박물관’ 설문조사에서 3위를 차지하며 많은 관람객들이 몰리기도 했는데, 탄광촌이자 폐광지역인 이곳에 박물관이 들어선 이후 지역주민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정선이라는 좁은 지역에서 일을 하면서 어려움이 많습니다. ‘사촌토지구입 배탈증’이라고, 남이 잘되는 것을 자기가 손해를 보지 않는 데도 그것을 못 봐주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역의 여론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초기 아리랑 학교 복권기금을 지원 받았을 때 고생했지만,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고 지역주민에게 힘을 주기 위해 ‘딱지’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신동읍 마트에서 2,000원 이상의 물건을 구입하면 딱지를 주는 데 이것으로 박물관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어린 시절 누구나 가지고 놀았음직한 딱지로 물건도 사고 박물관도 구경하고. 참 재미있고 의미 있는 아이디어인 것 같아 미소가 절로 난다. 이러한 문화유산과 지역에 대한에 대한 진용선 소장의 관심과 행동은 계속된다.

2006년 10월 정선군과 철도시설관리공단은 지역주민과 아무런 협의 없이 50여년이 넘은 정선에서 가장 오래된 함백역을 철거하였다. 함백역은 탄광촌 주민의 추억과 아픔, 그리고 삶이 깃든 공간이자 석탄산업화 시대를 대표하는 근대문화유산이었다. 함백역 철거가 지역주민의 의지와 상관없이 진행되자 주민들의 반발을 일으켰고 진용선 소장은 역사 철거로 인해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주민들과 함께 함백역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십시일반의 성금과 벽돌을 모아 2008년 11월 함백역을 복원하였다. 주민의 역량으로 어렵게 복원된 함백역과 인근 지역을 국가기록원에서는 ‘기록사랑마을 1호’로 지정하였으며, 현재 지역주민이 명예 역장으로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지역주민에 의한 함백역 복원운동의 영향으로 이후 일방적인 간이역 철거는 사라졌다고 한다. 또한 10월부터 함백 폐광지역이 정선군 ‘탄광촌 근·현대마을’ 추진사업으로 선정되어 새로운 문화유산 보존사업에 주민들의 역량을 모으고 있다.

지역주민과 함께 할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 ‘아리랑연구소 추억의 박물관’은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을까? 진 소장은 ‘주민 역량강화’를 힘주어 말한다.
“어떤 이는 창조적인 소수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지역주민의 역량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이 지역이 발전하려면 지역주민의 역량이 높아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좁은 지역에서의 정치적 파벌이 없어져야 합니다. 지역주민의 힘을 하나로 모아서 지역의 동력으로 삼아야 합니다. 함백지역은 아리랑학교, 함백역 복원 등 이러한 역량이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지역경제와 연결되어 지역에 큰 혜택과 연결이 된다면 주민 역량은 큰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특히 문화관광 분야는 관주도로 하지 않으면 시간이 오래 걸려서야 자리 잡는데, 이것을 인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장기적으로 보아야 하고, 이런 것을 벗어나려면 주민의 ‘마인드’라는 역량이 강화되어야 한다,”

문화재가 되어버린(?) 선데이서울

 

추억의 그 봉투...

 옛날 담배들

 진용선 관장님이 어릴적 쓰시던 책상과 추억의 물품들을 그 시절 그대로 재현, 전시되어 있었다.

진용선 관장님과 김금호 사무국장

주민 역량을 높이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아리랑연구소에서는 주민 아카데미를 고민하고 있다. 2011년 20주년을 맞이하는 아리랑연구소는 앞으로의 20년을 준비하고 있다. 그동안 매진해왔던 아리랑연구를 ‘게릴라 전시’ 등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방법으로 만나는 것이다. 아리랑연구 학자로서, 그리고 지역문화운동의 일꾼으로서 진용선 소장에게 10년을 맞이하는 (사)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게 하고 싶은 말을 부탁했다.

“내셔널트러스트 10년은 누가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굉장히 긍정적이며 바람직한 운동입니다. 지역의 문화유산, 자연유산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가치 창출을 하는데 최고의 기여를 했다는데 누구도 부정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의 10년을 바라보면,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이 지역과 밀착을 해서 지역 스스로 해결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강화시킬 수 있는 지원과 활동이 필요합니다. 지역주민과 밀착하여, 주민 속에서 텀벙 빠져서 지역문제를 해결하고 이끌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조금 방관자적인 입장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잘해왔지만 그들만의 리그가 되지 않고 지역과 밀착하여 젖어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리랑 학교 :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 방제1리 162-1  033)378-7856 www.ararian.com

글 · 김영주/ 한국내셔널트러스트 간사

* 이 글은 2008년 가을에 내셔널트러스트 매거진 17호를 통해 소개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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