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마지막주 토요일, 망우리공원은 버찌가 빨강게 물들자마자 검붉게 익어가고 있었다. 화사한 꽃이 예뻤던 4월도 잠깐, 어느새 열매는 삽시간에 익는다. 망우리가 근현대 역사인물이 잠든 특성 때문일까. 계절과 시간의 변화도 그들의 삶처럼 압축되어 나타난다.


오늘은 18명의 시민들과 함께 망우리 인문학 강의를 진행한다. 간혹, 참석하신 분들의 성향이나 직업, 나이에 따라 관심을 끄는 묘역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관심이란 한 인물에 대한 존경심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상황에 따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 드러나기도 한다. 사실, 위인에 대한 신비감과 무조건적 영웅시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위인역시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고, 그들의 삶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좀 더 견고하게 개선할 책임을 느낄 필요가 있다. 이를 떠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분의 잘잘못을 섣불리 논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이다.

 

승려의 묘 옆에 부인(人)의 묘가?

망우리공원 순환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도로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묘가 올려다 보인다. 20여 미터 완만한 계단을 오르면 예상치 못했던 장면이 나타난다. 바로 승려였던 만해와 그의 부인의 봉분이다. 비석에도 만해한용운선생묘라는 표기와 부인유씨재우(夫人兪氏在右)’라고 표기돼 틀림없는 한용운 선생의 묘임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김영식 작가가 재미있는 질문을 던진다.

그럼, 한용운 선생의 묘는 둘 중에 어떤 것일까요?


참가자들은 여러 추측이 이어진다. 김영식 작가 말에 따르면, 참배객들이 엉뚱한 봉분에 헌화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결국 오른쪽이라는 것은 우리가 묘를 바라본 입장에서가 아닌, 머리를 위로하고 누운 고인의 입장에서의 방향을 뜻한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18798, 충남 홍성군 결성면에서 태어납니다. 16살이던 1894년에 돌연 출가를 하게 됐는데요. 일설에 따르면 선생의 부인의 해산을 전후로, 시장에서 미역을 사오라는 부탁을 받고 나갔다가 그 길로 출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고향땅인 홍성을 찾지 않았고, 첫 번째 부인의 소생인 아드님과 대면하기조차 꺼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김영식 작가가 출가에 뒤이어 건국훈장인 대한민국장까지 수여받은 한용운 선생의 공로를 언급하였다. 하지만 부인의 봉분과 더불어 처음 알게 된 선생의 행적에 참가자들은 뜨악한 표정들이었. 게다가 승려임에도 두 차례의 결혼 경력은 지금이나 당시에도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임에 틀림없다. 

'상남자셨구나.' 

승려신분으로 독립운동에 그리고 두 차례의 결혼을 떠올리며 참가자들 사이에 묘한 웃음과 분위기가 감지된다.

김영식 작가가 고은 시인의 한용운 평전에서 지적된 내용을 언급한다. 『…연설에 뛰어나고 지조가 강해 지도자적인 능력을 갖추었으나, 수시로 파계를 한 승려답지 않은 행동, 첫 번째 처와 아들에 대한 무정한 처사, 문학적으로 자기보다 앞선 최남선에 대한 시기심...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한용운 평전은 위인의 무조건적인 신격화 또한 우리의 눈을 가리는 행위로 경계해야 할 점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용운 선생이 총독부에 보낸 탄원서와 조선불교유신론에서는 대처의 의미를 짐작할만하다조선불교의 부흥을 위해, 승려가 거지행각을 하면서 탁발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결혼도 하고 가정도 가져 안정된 바탕에서 승려생활을 해야 불교가 발전할 수있다는 소신이었다.


만해는 기미독립운동 민족대표의 33인 중 끝내 지조를 지킨 오세창 등과는 죽을 때까지 교류하였으나, 변절한 최린, 최남선과는 상종하지 않은 것으로 전한다. 한용운이 집을 비운 사이, 최린이 찾아와 딸에게 용돈을 주고 갔는데, 그 돈을 들고 최린의 집에 찾아가 내던진 일화는 만해의 비타협적 생각을 가히 짐작할만하다.

만해는 1944년 지병인 신경통으로 와병하다가 독립을 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시신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홍제동 화장터를 피해 미아리에서 불교식으로 화장을 하고 남은 유골을 망우리 묘지에 안장했다.

 

수채화같았지만 절망적이었던 사랑

1938년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한국명 이남덕)는 미술실기 수업이 끝나고 우연히 수돗가에서 나란히 서서 그와 붓을 빨게 되었다. 조선인 학생으로 2년 선배인 그는,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운동과 노래까지 잘해 당시 여학생들의 선망이 대상이었다. 수돗가에서 붓을 빨던 일을 계기로 둘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하지만 졸업과 동시에 그는 일제가 강점하고 있던 조선땅으로 귀국해야 했다. 편지를 주고 받으며 아쉬움을 달래던 마사코는 해방이 채 되기도 전인 19454월 혈혈단신 현해탄을 건너와 5, 그의 고향인 원산에서 결혼한다. 그의 남편의 이름은 이중섭.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부산과 제주를 전전하는 궁핍한 생활 끝에 병을 얻어 두 아들과 1952년 일본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1953년 친구의 도움으로 잠시 일본에서 가족들과 해후하였으나, 일시체류 신분이기에 다시 기약없는 이별을 맞아야 했다.

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다시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일본입국 비자를 받기 위한 이중섭의 노력은 절박한 것이었다.

마사코가 일본에서 어음을 주고 사 보낸 책을 이중섭이 팔았지만, 결국 판매대금은 그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후배가 중간에서 횡령을 한거죠. 그리고 이중섭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준게 1955년 서울과 대구에서 열린 이중섭 개인전이었습니다. 전시회는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그림을 외상으로 가져가 그림값을 지불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그림을 훔쳐가는 사람도 있었던 겁니다...

처지를 딱하게 생각한 친구들이 돈을 모아 밀항선을 타기를 권했지만, 그 돈마저 어떤 시인이 며칠만 쓰고 돌려준다며 가져가 결국 받지 못했다.

김영식 작가가 말을 잇는다.


화가 이중섭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그림 황소를 보면, 석양의 붉은색을 배경으로 누런 소가 슬픈 눈으로 우는 듯 하는 모습입니다만, 그게 바로 이중섭의 모습이었을 겁니다. 황소처럼 힘세고 야성적이지만, 온순한 성격의 이중섭은 세상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 후, 이중섭의 우울증은 극에 달했다. 일본에서 온 아내의 편지는 뜯지 않았고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황달, 영양실조, 간장염이 발병하게 된다. 그리고 1956년 서대문의 서울적십자병원에서 죽은 후, 무연고자로 처리돼 있다가 사흘 만에 고향 친구인 김병기에 발견된다. 그리고 홍제동 화장장에서 화장돼 유해의 반은 망우리에, 그리고 나머지는 일본의 가족들에게 전해진다. 

 

원했던 혹은 원치 않았던 '이별'의 엇갈린 운명

오로지 그림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던 이중섭에 비해 만해는 종교와 속세를 오가며 불교개혁운동과 독립운동을 벌인다. 1952년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가족과 생이별을 겪어야 했던 이중섭에 비해, 자기의사로 속세와 이별을 결심했던 만해의 경우는 다를지 모른다. 하지만 종교에 대한 귀의와 잔인한 시대의 가슴 아픈 이별도 저마다 타고난 운명을 넘어서지 못 하는 걸까?

대향 이중섭이 잠시 일본에서의 가족과 짧은 해후이후, 가족을 만나기 위한 노력은 필사적인 것이었다. 서울과 대구에서 개최한 개인전의 실패는 그를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하였다. 그리고 절박한 상황에서 시인이었던 친구의 배신은 의지할 곳 없는 중섭을 철저히 파괴해 버렸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은 시인 구상이 이중섭의 2주기 추도기에 기고한 동아일보 기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 세상에서는 중섭이 병들어 미쳐 죽었다고도 하고 굶어 죽었다고도 하고 자살했다고도 한다. 정신병원엘 두 차례나 입원까지 하였으니 병들어 미쳐 죽은 것도 사실이요. 먹을 것을 공궤치 못했으니 굶어 죽인 것도 진상이여, 발병 1년 반 그나마 식음을 완강히 거부했으니 자살했다 하여도 무방하리라. 그러나 그를 살게 하고 죽게 한 것은 오로지 고립이었다. 중섭은 너무나 그림밖에 몰랐다. 그의 생존의 무기란 유일 그림뿐이었다...”

고뇌하는 이중섭(친구이자 화가 한묵이 그린 스케치. 1954년 스케치)


출가를 통해 세상과 이별하고, 승려의 길을 선택한 만해 한용운의 삶도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았지만, 속세와 종교 사이에서 끊임없는 번뇌가 예상된다. 이미 한 차례의 결혼 이후 출가 그리고 재결혼 등은 승려의 파계를 논할 정도로 당시 시대에서는 파격적인 행동으로 보여 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교에 귀의한 몸으로,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의 지조를 지키기란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이중섭은 그렇게 그리워하던 가족들을 살아서 만나지 못했다. 그의 무덤에 세워진 비석은 사망 1년 후, 후배 차근호가 세운 것이다. 비석 오른편에 이중섭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아들 태현(야스가타)과 태성(야스나라)의 부둥켜안은 모습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만해 한용운 선생은 승려였으나, 결국 부인과 무덤을 나란히 하게 된다.

이중섭 묘비는 그가 사망한 지, 1년 후 차근호에 의해 세워졌다.


승려로서 속세와 이별을 했던 한용운 선생, 전쟁과 가난으로 인해 가족과 원치 않는 이별을 해야 했던 화가 이중섭. 원하던 원치 않았던 두 개의 이별의 결과, 설사 다른 시대를 살아갔을 지언정 확연하게 엇갈린 운명을 확인하게 된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세속적 삶의 만남에서 두 분의 생애가 다소나마 뒤바뀌었다면 어떨까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운명은 본래 희망한대로 이뤄지지 않는 인연과 같아 손길이 닿지 않는 아득한 곳에 있다며, 이중섭 묘비의 들꽃이 고개를 떨굴 뿐이다.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소처럼 걸음을 옮기면서 안간힘을 다해 제작을 계속하고 있소...(19541121일 일본의 아내에게 보낸 이중섭의 편지중)


자료참조 '그와 나 사이를 걷다' (김영식 저/호메로스/2015)

6월 망우리공원 인문학강의 신청하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한국내셔널트러스트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얼굴없는 목소리만 믿고 움직여야 했던 함평 임야의 기증

1월초, 전남 함평 소재의 임야와 토지를 기증하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당시 기부의사를 짤막하게 밝힐 때만 해도 사실, 성사될지 의심스러웠다. 적어도 자신의 자산을 기증한다면, 만날 약속을 정하거나 아니면 방문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증대상인 임야와 토지가 가족 공동소유라 했다. 가족들이 공동으로 소유한 상속자산은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고, 누구 한사람이라도 반대하면 기증은 불가능하게 된다. 최대한 성의를 다해 기증의 절차를 설명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어렵겠다’ 는 회의감이 밀려왔다. 전화를 걸어 온 이 남성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어쩌면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사람이거나 다소 치기에 휩싸인 상태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이 남성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기증에 대해 가족들 모두의 동의를 얻었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 기증하면 영구보전이 가능한 지 재차 물어왔다. 현재 보전상태를 확인한 후, 결정할 수 있다고 전과 동일한 답변을 드렸다. 그러자 그는 확인해 줄 수 있냐고 했다. 조용한 말투였지만 서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전화상으로 통성명만 했을 뿐, 한 번도 본적 없는 사람의 말만 믿고 함평까지 내려가는 길은 불안과 공허감이 꼬리를 물었다. 게다가 혼자만의 답사가 아닌, 운영위원장님을 비롯해 숲 전문가들까지 대동하는 터라 부담이 더했다. 약속이 어긋나기라도 한다면 사리분별도 못하는 실없는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8시간이 넘도록 바쁜 분들을 고속도로에 묶어 놓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미래를 위해 새로운 가능성에 기대를 걸다

비록 전화상의 약속이었으나, 대상지역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는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임야의 면적은 67,835(20,550)로 필지의 최정상부는 해발 310m의 높이에 위치해 있다. 멀리 함평 앞바다의 풍경이 내려다보이고 선산으로 이용했다는 말처럼 볕이 좋은 남향이었다. 임야의 일부가 선산으로 이용된 흔적도 보이지만 묘는 모두 이장된 상태였다. 임야의 식생은 주로 소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그 외 사스레나무, 송악, 비목, 감태나무, 춘란 등 난대 식물들도 넓게 분포했다

이병천(산과자연의친구 우이령사람들)회장님은 과거 편백나무로 수종갱신을 시도했다가 화강암 지반 탓에 실패한 지역이라고 설명하셨다회장님의 말대로임야 곳곳에 유려한 모양의 화강암 바위들이 넓게 펼쳐져 숲의 운치를 더하고 있었다일반적인 산지의 나무와 달리화강암반에 뿌리내린 소나무들은 몸통과 줄기가 휘어지고 얽혀 수형이 아름다웠다.

전문가들의 평가는 현재의 숲 보전상태가 좋다는 점에 이견이 없었다. 그리고 당장 이용이 불가능하더라도 미래의 활용가치를 염두에 두자고 입을 모았다지리적으로도 영광과 무안사이에 위치하면서 서해안을 끼고 있어 생태적 주제가 풍부한 곳이라는 장점도 언급됐다향후 내셔널트러스트가 전국적으로 확산된다면 이 임야를 남부지역 현장 교육장으로 활용하기에 적합하다는 의견도 제시됐다그리고 함께 기증을 약속한 농지(총 2,427/약 735)와 연계한 생태탐방과 숲체험힐링프로그램 등 다양한 시민교육의 장으로 활용가능성도 타진하였다.


복잡하고 번거로운 기증절차를 묵묵히 감수해 주었던 가족들

2월 개최된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이사회에서 함평 임야와 농지의 수탁이 최종 승인됐다. 좋은 취지의 기증이지만 이전등기를 위해서는 복잡한 증여절차를 거쳐야 했다. 법무사가 소유권이전에 필요한 서류를 확인해 주는 며칠사이, 또 연락이 왔다. 얼굴도 모르는 이 남성은 평소처럼 조용한 목소리로, 가능한 3월 초 안에 모든 증여절차를 마무리하고 싶다고 했다. 무엇이 그리 급한 걸까? 담당 법무사를 채근해 서류준비를 준비하면서, 등기이전은 실제소유주를 모두 만나 증여의사를 확인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참 복잡한 절차가 아닐 수 없었다. 함평의 임야와 토지는 78세인 어머니와 40대의 세 자녀의 공동소유다. 함께 거주하는 것조차 불투명한 이들을, 한날한시 한곳에 모여 달라는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끼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사회에서는 좋은 일을 하면서도 감내해야 할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하지만 기증하겠다고 밝힌 남성은 여러 가지 복잡한 서류와 가족들의 면담에 불편한 내색조차 드러내지 않았다전화상의 늘 평온한 목소리 그대로 어려운 부탁을 받아들였다.


믿으니까요(Trust), 믿으니까 할 수 있었던 겁니다

기증의사를 밝힌 얼굴도 모르는 남성과 그 가족들을 만나는 날. 소유권 이전등기를 위해 법무사님을 대동한 자리에 맏형을 제외한 가족 세분을 만날 수 있었다. 어느 가족이나 서로 비슷한 이미지와 분위기를 갖기 마련인데, 모두 순하고 반듯한 인상이었다. 특히 어머님은 80을 앞둔 나이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전화상의 목소리만 들었던 이모씨(44)를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눴다. 그는 형제들 중 막내였다.

법무사님이 함평 임야와 토지의 이전에 대한 동의여부를 확인하는 것을 시작으로 각종 서류에 날인이 이루어졌다. 가족들은 도장을 내주며 조용히 날인된 서류를 돌려보았다. 서류의 날인이 끝나고 소유권 이전 절차에 대한 설명이 진행됐다. 그리고 비로소 기증한 자산을 단체가 영원히 보전하겠다는 협약서의 내용을 설명하고 가족 모두의 날인이 이뤄졌다.

날인이 끝난 후,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일을 하셨으니 이번 기증에 대해서 가족들의 이름과 얼굴이라도 알리고 싶다는 바람을 말씀드렸다그러자 가족 모두 수줍은 듯 웃었고이씨의 누나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사실상 이번 기증에 대해 사진 한 장 이름 석 자도 남기지 않겠다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태도였다짧은 순간, 가족들 사이에 흐르고 있는 세상에 대한 공통된 이해와 서로간의 신뢰를 느낄수 있었다그 견고한 유대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처럼 여겨졌다

막내 이씨가 나직하게 말했다가족들의 이름과 얼굴이 공개되길 원치 않으며그 외 드러난 사실관계만을 알려주길 희망한다는 내용이었다이씨의 누나는 오히려, 이런 기회를 제공한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게 감사드린다고 전했다어머니는 자녀들의 고조부부터 잠들었던 곳이라 100년 가까이 집안 대대로 상속되었던가족들에게 의미있는 장소라고 말씀하셨다현재 묘는 모두 이장됐으나, 이곳의 처분이 자손으로서 도리가 아님에 가족 모두 공감했다 덧붙이셨다그리고 기증한 것이 오히려 흡족하며처음 마음 그대로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영원히 보전해 주길 당부하셨다막내 이씨는 그 자리에 없던 맏형의 이야기도 전했다맏형은 한국내셔널트러스트로부터 전달받은 기증협약서를 읽어본 후기증을 결정한 건 참 잘한 일이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쉽지 않은 결정을 해주신 가족들에게 감사를 드렸을 때막내 이씨의 말이 각자(刻字)처럼 마음속에 한 글자씩 새겨진다.

믿으니까요(Trust), 믿으니까 할 수 있었던 겁니다.”



가족간 유산을 둘러싼 분쟁은 우리현실에서 흔한 일이다그럼에도 이씨 가족들이 살아온 삶 속에서 어떤 계기 혹은 가치가 서로간의 견고한 결속을 이루었는지 궁금했다하지만 현재 이들 사이에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교감이, 어쩌면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안으며 살아 온 기억의 축척일 수도 혹은 종교적 신념일 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엇이든 묻거나 건드리지 않는 것이 이 가족에 대한 예의라는 확신이 들었다다만 이씨의 누나가 막내를 가리키며 우리 동생도 과거사회를 위해 특별한 봉사활동을 했었다고 말해 궁금증을 유발했는데이씨가 수줍게 웃으며 손사래로 누나의 말을 제지했다.

함평 임야와 토지를 기증한 가족들과의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일 수 있는 만남은가족들 사이에 흐르는 화목함 이상의 신뢰를 느끼며 아쉽게 끝을 맺었다. 

 

에필로그

그날 밤, 막내 이씨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국장님, 가 곧 외국으로 나가서 국내에 거의 못 들어오게 될 것 같습니다. 앞으로 혹시 연락하실 일이 있으면 제 누님께 연락을 취해 주세요.’ 국내에 거의 못 들어오게 될것 같다는 메시지를 보며, 그가 왜 기증을 서둘렀는지 짐작이 갔다.

그에게 답문자를 보냈다. ‘국내에 거의 못 들어오신다니 아쉽습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오랜 인연같이 느껴지는데, 이리 기약없이 헤어지게 돼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네요. 어디서든 항상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그로부터 마지막 문자가 왔다. ‘저를 낳아주신 조상님들께서 쉬셨던 곳이 좋은 단체와 인연을 맺을 수 있어 감사하고 마음이 참 좋습니다. (중략) 저도 내셔널트러스트에 대한 관심의 끈 놓지 않겠습니다. 건강하시고 항상 세상의 빛이 되어 주세요.’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한국내셔널트러스트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옷걸이 The Warming Hanger

루마니아에서 노숙자들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자선단체 "Samusocial"는 매년 추위때문에 죽는 수 많은 노숙자들을 위해 빠르고 저렴하게 그들을 도울 방법을 생각했는데요.

바로 The Warming Hanger 캠페인 입니다. 

 

시민단체에서 일 하시거나 캠페인을 진행해 보신 분이라면 모금을 하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모금을 하기 위해 사용하는 홍보비 예산 부족으로 현실에 부딪히는 단체들도 많을거라 생각됩니다. 

Samusocial 단체는 645.92유로(한화 약 97만원) 이라는 금액으로 25만명의 사람들에게 홍보되어 약 1톤의 헌 옷을 기부 받아 수백명의 노숙자들에게 전해져 그들이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위의 결과는 불과 2달도 되지 않은 기간에 이뤄낸 성과입니다.

 

 

그들은 캠페인을 어떻게 진행 하였을까요?

루마니아에서는 매년 추위로 인해 수백명의 노숙자가 사망하고 있으나 수용시설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Samusocial 단체도 예산 부족으로 인해 노숙자들을 위한 대책 마련이 어려운 상황에서 적은 돈으로 진행할 수 있고, 어려운 경기 상황에서도 모금보다 효과적으로 사람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는 기부 방안을 기획했습니다.

바로 헌 옷 기부 캠페인 The Warming Hanger 입니다.

Samusocial 단체는 드라이 클리닝 체인점 2곳과 제휴하여 고객들이 옷을 찾아갈 때 쓰이는 옷걸이에 입지 않는 헌 옷 기부를 요청하는 메세지를 부착 하였습니다.

메세지를 본 고객들은 다음 체인점 방문 시, 입지 않는 헌옷을 가져와 체인점을 통해 쉽게 기부를 했습니다.  
 

 

영하 20도 밑으로 기온이 떨어지면

 

 

대피소에 수용되지 못하는 노숙자들은 죽음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는 겨우 330개 대피소가 있으며 5000명 정도 밖에 노숙자를 수용할 수 없습니다.

 

 

올해도 겨울이 가까워 왔지만 Samusocial의 예산은 거의 바닥이 났습니다.

 

 

그래서 빠르고 효과적이며 비용도 적게들면서 

 

 

추위로부터 그들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까요?

 

 

이 어려운 시기에 돈을 기부하라고 하면 사람들은 쉽게 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돈 대신 노숙자들을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는 무언가를 요청한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누구나가 적어도 입지 않는 옷 한벌쯤은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것을 좋은 일에 쓰지 않으시나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노숙자들을 쉽게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우리는 드라이클리닝 체인점 두 곳과 제휴를 맺고

 

 

헌 옷 기부를 독려하는 메세지를 옷걸이에 붙였습니다.

 

 

"이 옷걸이에 걸린 헌 옷이(노숙자를 위한) 방한복이 됩니다."

 

 

고객들은 맡긴 옷을 찾아갈 때

 

 

우리의 메세지를 보고

 

 

다시 체인점 방문할 때 헌 옷을 가져와

 

 

기부했습니다.  

 

 

노숙자들에게 올해 겨울은 희망적입니다.

 

 

이 캠페인에는 겨우 645.92EURO(한화 약 97만원)의 예산이 소요됐을 뿐이지만

 

 

캠페인을 시작한지 채 2개월도 안되어 90여 자루이상

 

 

 약 1톤의 헌 옷을 기부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옷들은 수백명의 노숙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다양한 매체와 언론을 통해 이 사실이 보도되었을 뿐 아니라  

 

 

캠페인이 진행 되는 동안 Samusocial의 웹사이트와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새로운 방문자가 약 73% 증가하였으며

 

 

총 25만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이 캠페인이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캠페인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사람들은 체인점을 통해 헌 옷을 기부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캠페인을 진행한 단체는 적은 비용으로,
기부를 하는 사람들은 손쉽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빠르게 전달된 이 캠페인은 참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돈 뿐만 아니라 다른 것을 손쉽게 기부하는 캠페인이 진행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래는 The Warming Hanger 캠페인과 관련된 영상입니다.

 

참고 사이트  

http://www.ibelieveinadv.com/2012/02/samusocial-the-warming-hanger/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appypanchok&logNo=100152533964

http://olpost.com/r/4444783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한국내셔널트러스트 한국내셔널트러스트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