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금호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사무국장)


6 인문학강의가 진행된 25일, 전국이 장마권에 들었다. 일기예보는 당일 곳에 따라 폭우를 예보하고 있었다. 기상청 예보는 행사 시작 며칠 전부터 인문학 강의의 강행과 취소 사이에서 갈등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번 6월 망우리 인문학 강의는 홍익대부속고등학교 내셔널트러스트 동아리 학생들이 참여를 신청한 상태였다. 학생들이 망우리 인문학 강의를 접할 기회가 날아가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다.

다행히 인문학 강의 당일은 간간히 비를 뿌렸다. 예보대로 폭우가 내리지 않는다면 차라리 더운 날씨보다 훨씬 괜찮은 편이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리위원회 김영식 위원장(작가)이 답사 시작에 앞서 망우리에 대해 간단히 소개했다.

장마비가 가끔 뿌리는 날씨, 청소년들까지 참여한 가운데 망우리공원 인문학강의가 시작됐다.


망우리공원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소파 방정환

참석자들 중 일부가 아직은 앳띤 청소년들이기에 망우리에서 가장 친근하게 다가 온 인물은, 단연 소파 방정환 선생인 듯 싶었다. 다른 묘역에서 보인 진지한 태도는 찾아 볼 수 없고 천진하게 장난까지 친다. 방정환 선생하면 생각나는 게 무어냐는 김영식 작가의 질문에 이들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어린이날이요.”

변성기가 지난 굵은 목소리로 어린이날을 연호하는 게 그들도 우스웠던 모양이다. 청소년들 사이에서 킥킥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직은 어린 티를 벗지 않은 청소년들이기에 소파 방정환 선생은 망우리공원에서 가장 친근한 분이다.


김영식 작가는 방정환 묘의 조성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망우리에서 가장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은 방정환의 묘는, 1931년 방정환 사망후 홍제동에서 화장후 납골당에 안치돼 있다가 1936년 망우리 이곳에 안장된 것으로 전한다. 묘비 앞면에는 선여심동(仙如心童), 무동의이린어, 묘지환정방파소라고 적혀 있는데, 청소년들은 이게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알기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김영식 작가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 방법을 설명하고 비문에 얽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글씨는 당대 명필이며 독립운동가인 위창 오세창 선생이 썼습니다. 오세창 선생은 손병희 선생과 함께 3·1운동을 주도한 33인이며, 방정환 선생은 손병희 선생의 셋째 사위입니다. 그런 인연으로 묘비를 쓰게 되었고, 묘비를 쓰신 오세창 선생도 현재 망우리 묘역에 잠들어 계십니다.”


                            

소파 방정환(1899~1931)


살아서의 인연은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는 모양이다. 소파 방정환과 인연이 있는 인물중 망우리공원에 묻힌 분이 또 계신다. 소파가 1928년 개벽사를 운영하며 주최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계기로 등장한 한국화단의 거두 이인성이었다. 소파 방정환이 부재했다면 과연 화가로서 이인성의 미래를 장담할 수 있었을까.

 

잘 알려지지 않은 소파의 연인

아동문학가나 아동을 위한 운동가로 잘 알려진 소파 방정환. 하지만 김영식 작가는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를 소개한다.

“...소파 방정환의 연인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이 잘 모릅니다. 물론 소파가 손병희 선생의 셋째 따님과 결혼 후, 알게 된 인연이었기에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돼버렸죠. 그 연인의 이름은 신준려(신줄리아, 신형숙)3·1운동 당시, 이화학당 교사로 재직하다 투옥되어 7개월간 수감생활을 하기도 한 여성입니다. 1920년 잡지 [신여자]를 기획했는데, 당시 편집의 귀재로 평판이 높던 방정환을 편집고문으로 위촉하며 사귀게 된 것입니다...”

            

아동문학가로 알려진 소파는 당대 유명 출판인이자 언론인이며 베스트셀러 잡지의 발행인이기도 하다.


당시 소파의 글에서 신준려(줄리아)는 이니셜 ‘S'로 표기돼 [개벽] 4호의 추창수필 [秋窓隨筆]에 등장한다.

...1020, 등불을 가까이하고 독보(구니키다 돗포)의 병상록을 읽다가 언뜻 S를 생각하고 한참이나 멀거니 앉아 있었다. 독보가 말한 밭 있는 곳에 반드시 사람이 살고 사람이 사는 곳에 반드시 연애가 있다라고 한 그 구절 끝에 왜 이런 구절이 없는가 한다. ‘연애가 있는 곳에 반드시 실연이 동거한다. 아아, 인정의 무상함을 지금 새로 느끼는바 아니지만, S의 사랑을 노래하는 그 입으로서 어느 때일지 실연의 애가 나오지 아니할까아아, 사람 그리운 가을 만유가 잠든 야밤에 창밖에는 불어가는 가을 소리가 처연히 들리는데 부질없는 벌레가 잠자던 나를 또 울리는 구나.

당시 소파의 나이 22세 그리고 줄리아 23세로 뜨거운 사랑을 품었던 사이였지만, 소파는 손병희의 3녀와 결혼을 하고 아들까지 둔 처지였다. 결국 두 사람의 짧고도 아쉬운 사랑은 소파의 도쿄 유학과 줄리아의 미국유학으로 영영 이루어질 수 없게 된다.

소파 사망한 후 10여년이 지난 어느 날, 아들 방운영씨는 방정환의 묘역을 참배하는 양장 차림의 여성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다가서는 운용씨에게 유족인지 물었고 그렇다고 대답하자, 조용히 목례를 하고 멀어져 갔다. 후에 방운용씨는 방정환의 지인을 통해 인상착의를 확인하고 그녀가 바로 줄리아였음을 알게 된다.

소파의 묘비에는  '동심여선(童心如仙), 어린의동무 소파 방정환의 묘'라고 표기돼 있다.


아동문학가 이원수는 훗날 두 사람의 플라토닉한 사랑이 어린이를 위한 사랑으로 승화됐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김영식 작가는 "짧은 인생을 살다간 소파의 활동에 대해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고 어린이날을 만든 사람 혹은 아동문학가로 알고 있지만, 그는 다방면에 걸쳐 눈부신 활동을 전개했다"고 언급한다. 소파는 아동문학가 이전에 출판인이자 언론인이었으며 공전의 베스트셀러 잡지인 [학생], [신여성], [혜성], [개벽], [별건곤]등에 발행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소파가 선택한 새로운 사랑

소파가 출판인이자 언론인으로 눈부시게 활약을 펼쳤다지만 묘비에 새겨진 대로 방정환은 어린이의 동무이다. 때문에 성인 누구나 어린시절을 지나왔기에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망우리공원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은 단연 소파 방정환 선생이십니다. 종래 애들’, ‘애놈등으로 불리던 것을 1920[개벽]지에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192251어린이의 날을 발기 선포도 하셨고, 번안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발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1923년 개벽사에서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합니다. 잡지 [어린이]를 통해서 일본노래와 어른들 민요밖에 없던 시절, 동요운동도 벌이셨습니다. 당시 어린이에 노랫말을 기고한 어린이들 중, 이후 아동문학가나 시인으로 성장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소파가 발행한 잡지 [어린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아동문학가와 시인으로 성장했다.


김영식 작가의 말대로 [오빠생각]은 최순애가 11세에 [고향의 봄]15세의 이원수가 어린이에 응모해서 선정된 노랫말이다. 마산소년 이원수와 수원소녀 최순애는 어린이를 계기로 펜팔친구가 되었고, 서로 얼굴도 모르면서 결혼약속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펜팔한 지, 7년 후 수원역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이원수는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원수가 독서회를 통해 불온한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구속돼 1년간 복역을 했기 때문이었다. 최순애의 집안에서도 이원수와의 결혼을 반대하며 다른 혼처를 권했으나 그녀는 완강히 거부한다. 그리고 이원수가 석방되자마자 바로 결혼식을 치르게 된다.

      

[오빠생각]은 최순애가 11세에 [고향의 봄]은 15세의 이원수가 어린이에 응모해서 선정된 노랫말이다. 

둘은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성공한다. 


이밖에도 윤극영의 [설날][반달]을 비롯해, [고드름(유지영 작)], [따오기(한정동 작)], [봄편지(서덕출)]등도 모두 어린이를 통해 세상에 나와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다.

일제강점기 암울한 상황에서 어린이를 위한 잡지 간행이 순조로울 수만은 없었다. 소파는 기성세대의 변절, 무기력, 분열, 좌절감 등을 신세대에 대한 기대로 전환했다. 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소파는 어린이를 장차 조선독립의 역군이 될 인재를 키우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잡지 [어린이]는 일제의 검열에 걸려 기사가 삭제되는 일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그때마다 소파는 경찰서를 들락거려야 했고요. [왜정인물 1]에는 일본 경찰이 작성한 방정환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손병희의 3()용화의 남편이고 천도교이 중요임무를 전담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그리고 키는 52촌에 둥근 얼굴이고, 까만 피부에 비만이라는 기록까지 나오는데,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고 불온한 행동을 할 우려가 있음이라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소파 방정환 선생은 동화구연가로도 유명하다.

이화여자보통학교에서 전교 학생들에게 산드룡(신데렐라의 불어 발음)’을 이야기할 때, 학생들은 눈물이 줄줄 흘러 저고리에 비 오듯 하는 걸 씻지도 않고 들을 정도였고, 교사들마저 눈물을 훔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신데렐라가 의붓어머니에게 두들겨 맞는 구절에 이르자 여학생들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상갓집 같이 일제히 통곡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방정환 선생과 함께 아동문학가로 활동했던 후배 최신복 선생에 따르면, 소파의 강연회에 입회했던 순사가 소파의 강연에 감동해 눈물을 참지 못하고 방정환을 선생으로 모실 정도였다고 합니다.

망우리공원 인문학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그와 나 사이를 걷다'의 저자 김영식 작가


김영식 작가가 언급한 최신복 선생은 동아일보사 수원지국 기자에서 소파의 부탁을 받고 1929년 개벽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훗날 무덤도 없이 홍제동 납골당에 안치된 소파의 유골을 윤석중, 마해송 등과 함께 지금의 망우리공원에 모신다. 그 역시 194538세의 젊은 나이에 소파와 마찬가지로 과로로 유명을 달리 하는데, 방정환의 곁에 묻어 달라 유언했다. 최신복은 그가 죽기 전, 1939년 부친이 사망하자 수원의 선산을 놔두고 망우리공원 소파의 아래쪽에 묘를 썼다. 소파를 더 자주 찾아뵙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1942년 모친이 사망하자 역시 망우리공원 조부의 곁에 안장하였고, 자신의 갓난아기가 죽자 그 곁에 묻은 것으로 전한다. 이로써 소파를 존경했던 최신복으로 인해 3대가 망우리공원 소파의 묘 근처에 잠들게 된다.

소파가 사망한 것은 1931년이었다. 그는 각종 강연, 어린이 관련 행사기획, 집필, 잡지 간행 등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던 중 과로로 쓰러진다. 고혈압에 신장염이었으나 당시 의료기술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지는 못했다. 김영식 작가는 병상의 소파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어린이들을 잘 부탁한다.’말했다며 동화와도 같은 마지막 유언을 전했다.

여보게, 밖에 검정말이 끄는 검정 마차가 와서 검정 옷을 입은 마부가 기다리니 어서 가방을 내다주게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 남긴 것

훌륭한 인물의 업적은 인물과 업적의 내용에 가려져 그 의도나 동기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동기가 드러난다 한들, 표면적인 동기와 당사자가 결심을 품게 된 내재적 동기는 다를 수 있다.

앞서 밝혔듯이, 아동문학가 이원수 선생은 소파 방정환과 줄리아의 플라토닉한 사랑이 향후 어린이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되었다고 언급했다. 아내와 처자를 둔 소파의 처지였기에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으면서도, 두 사람 모두 해외 유학으로 관계가 정리된다. 요즘 드라마 형식을 빌리자면 불륜과 막장으로 끝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유학이 결코 자발적 결정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상상역시 과하지 않다. 하지만 이원수 선생의 말처럼 소파의 플라토닉한 사랑이 내재적 동기로 작용했고, 식민지 조국의 독립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어린이 운동 투신의 표면적 동기와 분명한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소파가 줄리아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대상을 달리할 뿐, 소파의 삶 내내 현재 진행형이었고, 모든 사랑이 그렇듯 그 완성을 갈구하게 된다. [어린이]를 통해 등단한 아동문학가 이원수와 최순애의 결혼은 소파가 사망한 지 5년 후인 1936년의 일이다. 하지만 얼굴도 서로 알지 못했고, 일제 강점기의 엄혹한 환경, 가족의 반대를 극복하고 이룬 운명같은 사랑은, 살아 생전 소파의 실천적 사랑과 무관하다 할 수 있을까.

소파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은 대상만을 달리한 채, 그의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


임종에 가까워질 때, ‘어린이들을 잘 부탁한다.’며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사랑한 대상에 대한 애틋함을 나타낸다. 죽음이란 누구도 피하지 못 할 두려움의 대상이며 생물학적 기능의 종료 상태이다. 하지만 소파였기에, 죽음이라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정서적으로 유약한 어린이들에게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여보게, 밖에 검정말이 끄는 검정 마차가 와서 검정 옷을 입은 마부가 기다리니 어서 가방을 내다주게

소파는 어린이들에게 말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죽음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 동화와도 같은 다른 세계 어디로 떠나가는 것이며, 마치 새로운 일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가방을 챙겨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소파가 배역에 충실한 연기자같이 검은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떠나면서 미완의 사랑은 그의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 어린이를 위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성사시키는 마침표가 찍어진 것이다.

 


망우리공원 보전 '같이가치' 모금 참여하기: https://together.kakao.com/fundraisings/24277


자료참조 '그와 나 사이를 걷다' (김영식 저/호메로스/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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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마지막주 토요일, 망우리공원은 버찌가 빨강게 물들자마자 검붉게 익어가고 있었다. 화사한 꽃이 예뻤던 4월도 잠깐, 어느새 열매는 삽시간에 익는다. 망우리가 근현대 역사인물이 잠든 특성 때문일까. 계절과 시간의 변화도 그들의 삶처럼 압축되어 나타난다.


오늘은 18명의 시민들과 함께 망우리 인문학 강의를 진행한다. 간혹, 참석하신 분들의 성향이나 직업, 나이에 따라 관심을 끄는 묘역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관심이란 한 인물에 대한 존경심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상황에 따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 드러나기도 한다. 사실, 위인에 대한 신비감과 무조건적 영웅시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위인역시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고, 그들의 삶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좀 더 견고하게 개선할 책임을 느낄 필요가 있다. 이를 떠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분의 잘잘못을 섣불리 논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이다.

 

승려의 묘 옆에 부인(人)의 묘가?

망우리공원 순환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도로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묘가 올려다 보인다. 20여 미터 완만한 계단을 오르면 예상치 못했던 장면이 나타난다. 바로 승려였던 만해와 그의 부인의 봉분이다. 비석에도 만해한용운선생묘라는 표기와 부인유씨재우(夫人兪氏在右)’라고 표기돼 틀림없는 한용운 선생의 묘임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김영식 작가가 재미있는 질문을 던진다.

그럼, 한용운 선생의 묘는 둘 중에 어떤 것일까요?


참가자들은 여러 추측이 이어진다. 김영식 작가 말에 따르면, 참배객들이 엉뚱한 봉분에 헌화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결국 오른쪽이라는 것은 우리가 묘를 바라본 입장에서가 아닌, 머리를 위로하고 누운 고인의 입장에서의 방향을 뜻한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18798, 충남 홍성군 결성면에서 태어납니다. 16살이던 1894년에 돌연 출가를 하게 됐는데요. 일설에 따르면 선생의 부인의 해산을 전후로, 시장에서 미역을 사오라는 부탁을 받고 나갔다가 그 길로 출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고향땅인 홍성을 찾지 않았고, 첫 번째 부인의 소생인 아드님과 대면하기조차 꺼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김영식 작가가 출가에 뒤이어 건국훈장인 대한민국장까지 수여받은 한용운 선생의 공로를 언급하였다. 하지만 부인의 봉분과 더불어 처음 알게 된 선생의 행적에 참가자들은 뜨악한 표정들이었. 게다가 승려임에도 두 차례의 결혼 경력은 지금이나 당시에도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임에 틀림없다. 

'상남자셨구나.' 

승려신분으로 독립운동에 그리고 두 차례의 결혼을 떠올리며 참가자들 사이에 묘한 웃음과 분위기가 감지된다.

김영식 작가가 고은 시인의 한용운 평전에서 지적된 내용을 언급한다. 『…연설에 뛰어나고 지조가 강해 지도자적인 능력을 갖추었으나, 수시로 파계를 한 승려답지 않은 행동, 첫 번째 처와 아들에 대한 무정한 처사, 문학적으로 자기보다 앞선 최남선에 대한 시기심...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한용운 평전은 위인의 무조건적인 신격화 또한 우리의 눈을 가리는 행위로 경계해야 할 점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용운 선생이 총독부에 보낸 탄원서와 조선불교유신론에서는 대처의 의미를 짐작할만하다조선불교의 부흥을 위해, 승려가 거지행각을 하면서 탁발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결혼도 하고 가정도 가져 안정된 바탕에서 승려생활을 해야 불교가 발전할 수있다는 소신이었다.


만해는 기미독립운동 민족대표의 33인 중 끝내 지조를 지킨 오세창 등과는 죽을 때까지 교류하였으나, 변절한 최린, 최남선과는 상종하지 않은 것으로 전한다. 한용운이 집을 비운 사이, 최린이 찾아와 딸에게 용돈을 주고 갔는데, 그 돈을 들고 최린의 집에 찾아가 내던진 일화는 만해의 비타협적 생각을 가히 짐작할만하다.

만해는 1944년 지병인 신경통으로 와병하다가 독립을 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시신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홍제동 화장터를 피해 미아리에서 불교식으로 화장을 하고 남은 유골을 망우리 묘지에 안장했다.

 

수채화같았지만 절망적이었던 사랑

1938년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한국명 이남덕)는 미술실기 수업이 끝나고 우연히 수돗가에서 나란히 서서 그와 붓을 빨게 되었다. 조선인 학생으로 2년 선배인 그는,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운동과 노래까지 잘해 당시 여학생들의 선망이 대상이었다. 수돗가에서 붓을 빨던 일을 계기로 둘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하지만 졸업과 동시에 그는 일제가 강점하고 있던 조선땅으로 귀국해야 했다. 편지를 주고 받으며 아쉬움을 달래던 마사코는 해방이 채 되기도 전인 19454월 혈혈단신 현해탄을 건너와 5, 그의 고향인 원산에서 결혼한다. 그의 남편의 이름은 이중섭.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부산과 제주를 전전하는 궁핍한 생활 끝에 병을 얻어 두 아들과 1952년 일본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1953년 친구의 도움으로 잠시 일본에서 가족들과 해후하였으나, 일시체류 신분이기에 다시 기약없는 이별을 맞아야 했다.

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다시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일본입국 비자를 받기 위한 이중섭의 노력은 절박한 것이었다.

마사코가 일본에서 어음을 주고 사 보낸 책을 이중섭이 팔았지만, 결국 판매대금은 그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후배가 중간에서 횡령을 한거죠. 그리고 이중섭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준게 1955년 서울과 대구에서 열린 이중섭 개인전이었습니다. 전시회는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그림을 외상으로 가져가 그림값을 지불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그림을 훔쳐가는 사람도 있었던 겁니다...

처지를 딱하게 생각한 친구들이 돈을 모아 밀항선을 타기를 권했지만, 그 돈마저 어떤 시인이 며칠만 쓰고 돌려준다며 가져가 결국 받지 못했다.

김영식 작가가 말을 잇는다.


화가 이중섭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그림 황소를 보면, 석양의 붉은색을 배경으로 누런 소가 슬픈 눈으로 우는 듯 하는 모습입니다만, 그게 바로 이중섭의 모습이었을 겁니다. 황소처럼 힘세고 야성적이지만, 온순한 성격의 이중섭은 세상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 후, 이중섭의 우울증은 극에 달했다. 일본에서 온 아내의 편지는 뜯지 않았고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황달, 영양실조, 간장염이 발병하게 된다. 그리고 1956년 서대문의 서울적십자병원에서 죽은 후, 무연고자로 처리돼 있다가 사흘 만에 고향 친구인 김병기에 발견된다. 그리고 홍제동 화장장에서 화장돼 유해의 반은 망우리에, 그리고 나머지는 일본의 가족들에게 전해진다. 

 

원했던 혹은 원치 않았던 '이별'의 엇갈린 운명

오로지 그림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던 이중섭에 비해 만해는 종교와 속세를 오가며 불교개혁운동과 독립운동을 벌인다. 1952년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가족과 생이별을 겪어야 했던 이중섭에 비해, 자기의사로 속세와 이별을 결심했던 만해의 경우는 다를지 모른다. 하지만 종교에 대한 귀의와 잔인한 시대의 가슴 아픈 이별도 저마다 타고난 운명을 넘어서지 못 하는 걸까?

대향 이중섭이 잠시 일본에서의 가족과 짧은 해후이후, 가족을 만나기 위한 노력은 필사적인 것이었다. 서울과 대구에서 개최한 개인전의 실패는 그를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하였다. 그리고 절박한 상황에서 시인이었던 친구의 배신은 의지할 곳 없는 중섭을 철저히 파괴해 버렸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은 시인 구상이 이중섭의 2주기 추도기에 기고한 동아일보 기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 세상에서는 중섭이 병들어 미쳐 죽었다고도 하고 굶어 죽었다고도 하고 자살했다고도 한다. 정신병원엘 두 차례나 입원까지 하였으니 병들어 미쳐 죽은 것도 사실이요. 먹을 것을 공궤치 못했으니 굶어 죽인 것도 진상이여, 발병 1년 반 그나마 식음을 완강히 거부했으니 자살했다 하여도 무방하리라. 그러나 그를 살게 하고 죽게 한 것은 오로지 고립이었다. 중섭은 너무나 그림밖에 몰랐다. 그의 생존의 무기란 유일 그림뿐이었다...”

고뇌하는 이중섭(친구이자 화가 한묵이 그린 스케치. 1954년 스케치)


출가를 통해 세상과 이별하고, 승려의 길을 선택한 만해 한용운의 삶도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았지만, 속세와 종교 사이에서 끊임없는 번뇌가 예상된다. 이미 한 차례의 결혼 이후 출가 그리고 재결혼 등은 승려의 파계를 논할 정도로 당시 시대에서는 파격적인 행동으로 보여 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교에 귀의한 몸으로,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의 지조를 지키기란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이중섭은 그렇게 그리워하던 가족들을 살아서 만나지 못했다. 그의 무덤에 세워진 비석은 사망 1년 후, 후배 차근호가 세운 것이다. 비석 오른편에 이중섭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아들 태현(야스가타)과 태성(야스나라)의 부둥켜안은 모습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만해 한용운 선생은 승려였으나, 결국 부인과 무덤을 나란히 하게 된다.

이중섭 묘비는 그가 사망한 지, 1년 후 차근호에 의해 세워졌다.


승려로서 속세와 이별을 했던 한용운 선생, 전쟁과 가난으로 인해 가족과 원치 않는 이별을 해야 했던 화가 이중섭. 원하던 원치 않았던 두 개의 이별의 결과, 설사 다른 시대를 살아갔을 지언정 확연하게 엇갈린 운명을 확인하게 된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세속적 삶의 만남에서 두 분의 생애가 다소나마 뒤바뀌었다면 어떨까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운명은 본래 희망한대로 이뤄지지 않는 인연과 같아 손길이 닿지 않는 아득한 곳에 있다며, 이중섭 묘비의 들꽃이 고개를 떨굴 뿐이다.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소처럼 걸음을 옮기면서 안간힘을 다해 제작을 계속하고 있소...(19541121일 일본의 아내에게 보낸 이중섭의 편지중)


자료참조 '그와 나 사이를 걷다' (김영식 저/호메로스/2015)

6월 망우리공원 인문학강의 신청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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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금호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사무국장


삶과 죽음 그리고 세대를 가르는 경계, 망우리.

젊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지명이고 30대 중 후반, 그러니까 80년대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공동묘지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망우리. 망우리는 그렇게 삶과 죽음을 나누는 장소이자 특정 세대를 가르는 경계이기도 하다. 근심을 잊는다는 뜻의 망우(忘憂)라는 지명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연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양에 새롭게 도읍을 세운 태조가 지금의 건원릉(구리시 인창동 소재)에 자신의 묘를 정하고 환궁하던 중, 이 고갯마루에서 이제야 오랜 근심을 잊겠다(忘憂)’고 말한 것이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여부를 떠나, 태조의 건원릉이 위치한 동구릉과 직선거리로 2km 남짓한 거리에 위치해 있어 망우리는 세인들이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1914년 일제가 단행한 행정구역 변경 이전만 하더라도 망우리(忘憂里)는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忘憂里面)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하사한 지명 그리고 인근의 동구릉과의 위치 등을 고려할 때 행정구역의 격이 그만큼 높았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일제는 양주군 구지면(九旨面)와 망우리면(忘憂里面)자를 따서 구리(九里)로 병합시킨다. 그리고 망우리면(忘憂里面)의 잔여 지역을 리() 단위인 현재의 망우리(忘憂里)로 귀속한다. 사실상 행정구역의 지위에서 강등당한 셈이다. 망우리의 수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일제는 경성의 묘지가 부족하자 1933년 망우리를 공동묘지로 조성하게 된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과 동구릉이 조성된 산줄기에 평민의 공동묘지를 만든 의도를 짐작 못할 바 아니다.

 

품위를 잃은 장소와 가치가 떨어진 인간의 공존

그 후, 정확히 40년 동안 공동묘지로 매장이 이루어졌던 망우리. 이제 사람들의 기억 속에 품위 있던 장소는 죽음과 어둠의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당시 대학생들이 미팅에서 망우리에 산다고 말하면 퇴짜 맞을 정도였다. 특히 60년대 70년대 산업화의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망우리는 원해서도 가고 원치 않아도 갈 수 있는 슬프고도 두려운 공간이었다.

오죽하면 동대문에서 망우리로 가는 시내버스 여차장이 청량리중량교망우리가요~” 라고 속사포 랩으로 행선지를 외치면, 사람들에게 환청처럼 다른 외침으로 들리기도 했다.

차라리죽으려고망우리가요~'

품위를 잃은 장소와 가치가 떨어진 인간이 시대를 공존하며 무수한 사연과 애환을 만들어 낸 곳. 망우리 인문학 강의는 차라리 죽으려 망우리행 버스에 몸을 싣는 것이다. 코트 주머니에 소주병을 꽂은 채 몸을 휘청거리며 지난시절 누군가 버스에 올랐던 것처럼, 현재의 나를 그곳에 묻기도 하고 삶을 물으러 떠나는 길이다.

 

망우리 인문학 강의를 열다.

4월 망우리 인문학 강의는 강남시문학회 회원을 비롯해 27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30일 진행됐다. 인문학강의는 망우리 근현대 역사인물의 묘역을 순례하며 그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세상과 사람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되짚어 보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결정적인 삶의 순간에 나를 대입해 시간과 공간 그리고 나와 그의 벽을 허무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다. 인문학 강의코스는 주로 이인성(화가)-도산 안창호(독립운동가)-태허 유상규(의사/독립운동가)-아사카와 다쿠미(총독부 산림청 직원/민예학자)-혜관 오긍선(의사/사회사업가)-소파 방정환(아동문학가)-최신복(아동문학가)-위창 오세창(서화가)-만해 한용운(독립운동가)-죽산 조봉암(독립운동가/정치가)-남파 박찬익(독립운동가)-최학송(문학인)-계영묵(문학인)-대향 이중섭(화가)-박인환(시인) 순으로 진행된다. 본 코스는 서울시가 현재 조성하고 있는 인문학길의 코스와 일치한다. 하지만 매번 동일한 코스와 인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와 참여자들의 관심도에 따라 코스 일부가 추가되거나 변경되기도 한다. 강의 일정은 상반기 5월과 6월 마지막주 토요일에 강의를 열게 된다.

인문학 강의의 강사는 망우리 근현대사 인물 소개서인 그와 나 사이를 걷다의 저자이자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리분과위원장인 김영식 작가가 진행한다.

             

그는 부산 출생이지만 4살 때 상경하여 망우리공원과 가까운 중랑구 중화동과 상봉동에서 대학 때까지 살았다. 2006년부터 일주일에 한 번꼴로 현재까지 500회 이상 망우리공원을 오르내리며 무덤의 비명과 근현대 인물들의 삶을 조명하였다.

 

조선이 낳은 비운의 천재화가 이인성

4월 망우리 인문학 강의에서 가장 주목받은 인물 중 한 사람이 바로 화가 이인성이다. 김영식 작가의 소개에 따르면, 화가 이인성은 1930년대 마라톤 영웅 손기정과 무용가 최승희만큼 유명한 존재였던 모양이다. 당시 어른들은 그림 그리는 아이에게 커서 이인성 될거냐?”라고 농담을 건넬 정도였다고 한다. 1912년 대구에서 출생한 이인성은 1928(17)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서 촌락의 풍경이라는 작품으로 특선을 차지하며 주목을 받게 된다. ‘세계아동예술전람회는 소파 방정환등이 운영하는 개벽사가 주최한 것인데, 어떤 면에서는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 이인성의 천재성을 발굴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타계한 지 20년 가까이 차이가 남에도, 방정환과 이인성은 모두 망우리공원에 잠들면서 사후까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화가를 환쟁이라고 천대하던 시절, 1929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계기로 이인성은 집안의 반대를 극복하고 당당히 소년 천재화가로 주목받는다. 그 후 2년에 걸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과 특선을 수상하게 되고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1932년 이인성 화가가 19세 되던 해,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일본 화가들을 제치고 입선을 거머쥔다. 이 일을 두고 김영식 작가는 김연아가 피겨 스케이팅에서 올림픽 금매달을 차지한 것과 같은 역사적 사건이라고 언급하였다.

일본 유학시절 만난 부인 김옥순은 학력이 일천한 이인성과 집안의 반대로 어렵게 결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1924년 부인이 결핵으로 짧은 생을 마치면서 실의에 빠진 이인성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된다. 걸핏하면 폭음과 주사(酒邪)를 일삼았던 것이다. 두 번째 결혼마저 실패하고 세 번째 결혼까지 치루지만, 1950년 어이없는 사고로 죽음을 당한다. 김영식 작가는 그 당시의 상황을 눈앞에 그려내듯 설명했다.

6·25 전쟁으로 어수선한 상황에 경찰의 불심검문이 수시로 이뤄지는 분위기였겠죠. 화가 이인성이 술에 취한 채, 거리를 걷다가 행색을 수상하게 여긴 경찰관에게 붙들린 거예요. 그런데 이인성이 술도 마셨겠다, 경찰관에게 다짜고짜 조선의 천재 이인성을 몰라보느냐.”고 호통을 친 겁니다. 주눅이든 경찰관이 이인성을 놔주고 경찰서로 돌아와 도대체 이인성이 누구냐?”고 물었겠죠. 그러자 주변에서 그 동네에 술주정뱅이 환쟁이가 있지...”라는 말을 들으니, 한낱 환쟁이에게 당한 일이 화가 난겁니다. 그래서 총을 소지하고 이인성의 집으로 찾아가 말다툼과 몸싸움을 벌이다가 실탄이 발사된 거죠. 결국 그 일로 이인성이 숨지고 맙니다. 그의 나이 38살이었습니다.

황당하기까지 한 조선의 천재 이인성의 죽음에 이르러 참가자들이 하는 탄식과 실소 그리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깊은 상실의 시대를 살다 간 시인 박인환

4월 인문학 강의에서 관심을 끌었던 다른 인물이 있다면, 코스의 마지막 묘역에서 만나는 시인 박인환이다. 아마도 단체로 참가신청을 하신 분들이 시문학회 회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화가 이중섭의 묘역에서 강의를 마치고 망우리 관리사무소 쪽으로 이동하다 보면, 오른편에 박인환의 연보비가 나타난다. 비석에는 그의 시 목마와 숙녀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비석의 맞은편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자 김영식 작가가 스마트폰에 저장된 노래를 틀었다. 박인희가 부른 세월이 가면이었다. 이 노래 가사도 명동의 선술집에서 박인환이 즉흥적으로 시를 짓고 이진섭이 곡을 붙여 그 자리에서 나애심이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진다.)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시()였다. 박인환의 묘 앞, 사각형의 묘비에도 시인 박인환의 묘라 적혀있고 그 밑으로 세월이 가면의 첫 문장이 새겨져 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이 시를 짓기 하루 전, 박인환은 첫 사랑이 묻혀 있는 망우리 묘지에 다녀갔다고 김영식 작가는 설명한다. 평소 술을 좋아했던 그였기에, 코트 주머니에 소주병을 꽂은 채 몸을 휘청거리며 망우리행 버스에 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유작시 세월이 가면을 완성한 사흘 후인 1956320, 만취한 채 집에 들어와 잠을 자다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31. 세탁소에 맡긴 봄 코트는 돈이 없어 찾지 못했고, 겨울 코트를 그대로 입은 채였다. 부음을 듣고 맨 먼저 달려온 친구 송지영이 박인환의 뜬 눈을 감겨주었다.

박인환의 또 다른 시 목마와 숙녀에 대한 김영식 작가의 설명이 이어진다. “도대체 목마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그리고 우연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된 고대 무덤의 부장품인 목마를 본 경험담 그리고 순명효 황후 장례행렬 사진 속에서 종이로 만든 백마를 통해 죽음의 동반자임을 설명했다. 고급진 문장과 달달한 시어(詩語)의 느낌과 달리 1950년대 전쟁의 비극과 죽음, 이별, 허무 등의 시대적 고뇌를 박인환의 탁월한 언어적 감수성을 통해 시로 형상화된 것이다.

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시에 사용된 박인환의 세련된 수사와 평소 그의 행색 등으로 인해 남성을 대표하는 속물로 문단의 비난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전쟁의 참혹한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현실인식이 강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덧붙였다.

그러한 이유에서 일까?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에 대한 오해는 필자의 고교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목마와 숙녀는 시화전의 단골 주제였고 교실마다 한 점씩 걸리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박인환이 작사한 세월이 가면을 부른 가수 박인희의 시낭송 음반도 유행이었다. 모국어지만 낭독하면 혀끝에서 감미롭게 굴려지는 시어(詩語)들이 마치 유창한 외국어를 구사하는 듯 했다. 알 듯 모를 듯 낭만적인 언어들은 지적 허영심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잠자리 뿔테안경을 쓴 친구가 같은 반에 늘 한 명쯤 있기 마련이다. 까칠하기로 유명한 국어선생님 수업시간에 이 친구가 목마와 숙녀의 시낭송을 자원했다. 목소리가 좋았던 친구는 자신의 낭송에 점점 도취돼 가는 듯 했다. 그렇게 시낭송이 끝났다. 선생님의 얼굴에 비웃음 혹은 경멸의 빛이 스쳐 지났다.

이 시가 그렇게 낭만적으로 읽히든?”

 

상실의 두 빛깔

4월 망우리 인문학 강의에서 관심을 가진 두 인물은 공교롭게도 '상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인성은 1942년 아내 김순옥의 사망으로 실의에 빠진다. 절망의 시간을 술로 보내던 화가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준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 최고의 화가라는 타이틀이었을 것이다. 술로 인해 타인과의 불화가 이어지고 괴팍한 성격에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수록, ‘조선의 천재 이인성이라는 변할 수 없는 사실에 집착했을 법하다. 오로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건 '영광스러운 과거' 밖에 없었던 가난한 현실이, 그를 비극적 운명으로 몰고가지 않았을까.

목마와 숙녀에서 시인 박인환은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라면서 2차 대전 후, 허무주의에 시달리다가 템즈강에 투신 자살한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상실을 추모한다. 그리고 6·25 전쟁 이후의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는’ 현실 속 상실감을 토로한다. 어쩌면 시인 박인환의 상실감은 뿌리 깊은 것인지도 모른다. 앞서 밝힌 것처럼 이미 20대에 첫사랑을 잃었고, 그 역시 세상과 작별하기 나흘 전, 망우리에 묻힌 첫사랑을 찾는다. 그녀의 묘를 찾은 다음날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가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처럼 보여지지 않는다.  '목마와 숙녀' 역시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인해, 시인 박인환이 지병처럼 앓고 있던 세상에 대한 상실감을 버지니아 울프의 죽음에 투영시킨 건 아닐까.   

인문학 강의의 마지막 코스인 박인환 시인의 묘역에 앉아 그와 이인성이 겪은 상실감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게 나라면?’이라 자문해 본다. 나역시 그들보다 뛰어난 인내와 처세를 발휘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30대에 요절한 두 천재들의 삶을 무어라 평가할 수 있을까? 하지만 누구도 타인의 삶을 평가할 자격은 없다. 살아있는 사람이 목마를 타고 떠난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럴 수 있겠다공감하며 그들의 삶에 고개 끄덕여 주는 것밖에.


자료참조 '그와 나 사이를 걷다' (김영식 저/호메로스/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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