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금호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사무국장)


6 인문학강의가 진행된 25일, 전국이 장마권에 들었다. 일기예보는 당일 곳에 따라 폭우를 예보하고 있었다. 기상청 예보는 행사 시작 며칠 전부터 인문학 강의의 강행과 취소 사이에서 갈등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번 6월 망우리 인문학 강의는 홍익대부속고등학교 내셔널트러스트 동아리 학생들이 참여를 신청한 상태였다. 학생들이 망우리 인문학 강의를 접할 기회가 날아가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다.

다행히 인문학 강의 당일은 간간히 비를 뿌렸다. 예보대로 폭우가 내리지 않는다면 차라리 더운 날씨보다 훨씬 괜찮은 편이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리위원회 김영식 위원장(작가)이 답사 시작에 앞서 망우리에 대해 간단히 소개했다.

장마비가 가끔 뿌리는 날씨, 청소년들까지 참여한 가운데 망우리공원 인문학강의가 시작됐다.


망우리공원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소파 방정환

참석자들 중 일부가 아직은 앳띤 청소년들이기에 망우리에서 가장 친근하게 다가 온 인물은, 단연 소파 방정환 선생인 듯 싶었다. 다른 묘역에서 보인 진지한 태도는 찾아 볼 수 없고 천진하게 장난까지 친다. 방정환 선생하면 생각나는 게 무어냐는 김영식 작가의 질문에 이들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어린이날이요.”

변성기가 지난 굵은 목소리로 어린이날을 연호하는 게 그들도 우스웠던 모양이다. 청소년들 사이에서 킥킥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직은 어린 티를 벗지 않은 청소년들이기에 소파 방정환 선생은 망우리공원에서 가장 친근한 분이다.


김영식 작가는 방정환 묘의 조성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망우리에서 가장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은 방정환의 묘는, 1931년 방정환 사망후 홍제동에서 화장후 납골당에 안치돼 있다가 1936년 망우리 이곳에 안장된 것으로 전한다. 묘비 앞면에는 선여심동(仙如心童), 무동의이린어, 묘지환정방파소라고 적혀 있는데, 청소년들은 이게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알기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김영식 작가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 방법을 설명하고 비문에 얽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글씨는 당대 명필이며 독립운동가인 위창 오세창 선생이 썼습니다. 오세창 선생은 손병희 선생과 함께 3·1운동을 주도한 33인이며, 방정환 선생은 손병희 선생의 셋째 사위입니다. 그런 인연으로 묘비를 쓰게 되었고, 묘비를 쓰신 오세창 선생도 현재 망우리 묘역에 잠들어 계십니다.”


                            

소파 방정환(1899~1931)


살아서의 인연은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는 모양이다. 소파 방정환과 인연이 있는 인물중 망우리공원에 묻힌 분이 또 계신다. 소파가 1928년 개벽사를 운영하며 주최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계기로 등장한 한국화단의 거두 이인성이었다. 소파 방정환이 부재했다면 과연 화가로서 이인성의 미래를 장담할 수 있었을까.

 

잘 알려지지 않은 소파의 연인

아동문학가나 아동을 위한 운동가로 잘 알려진 소파 방정환. 하지만 김영식 작가는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를 소개한다.

“...소파 방정환의 연인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이 잘 모릅니다. 물론 소파가 손병희 선생의 셋째 따님과 결혼 후, 알게 된 인연이었기에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돼버렸죠. 그 연인의 이름은 신준려(신줄리아, 신형숙)3·1운동 당시, 이화학당 교사로 재직하다 투옥되어 7개월간 수감생활을 하기도 한 여성입니다. 1920년 잡지 [신여자]를 기획했는데, 당시 편집의 귀재로 평판이 높던 방정환을 편집고문으로 위촉하며 사귀게 된 것입니다...”

            

아동문학가로 알려진 소파는 당대 유명 출판인이자 언론인이며 베스트셀러 잡지의 발행인이기도 하다.


당시 소파의 글에서 신준려(줄리아)는 이니셜 ‘S'로 표기돼 [개벽] 4호의 추창수필 [秋窓隨筆]에 등장한다.

...1020, 등불을 가까이하고 독보(구니키다 돗포)의 병상록을 읽다가 언뜻 S를 생각하고 한참이나 멀거니 앉아 있었다. 독보가 말한 밭 있는 곳에 반드시 사람이 살고 사람이 사는 곳에 반드시 연애가 있다라고 한 그 구절 끝에 왜 이런 구절이 없는가 한다. ‘연애가 있는 곳에 반드시 실연이 동거한다. 아아, 인정의 무상함을 지금 새로 느끼는바 아니지만, S의 사랑을 노래하는 그 입으로서 어느 때일지 실연의 애가 나오지 아니할까아아, 사람 그리운 가을 만유가 잠든 야밤에 창밖에는 불어가는 가을 소리가 처연히 들리는데 부질없는 벌레가 잠자던 나를 또 울리는 구나.

당시 소파의 나이 22세 그리고 줄리아 23세로 뜨거운 사랑을 품었던 사이였지만, 소파는 손병희의 3녀와 결혼을 하고 아들까지 둔 처지였다. 결국 두 사람의 짧고도 아쉬운 사랑은 소파의 도쿄 유학과 줄리아의 미국유학으로 영영 이루어질 수 없게 된다.

소파 사망한 후 10여년이 지난 어느 날, 아들 방운영씨는 방정환의 묘역을 참배하는 양장 차림의 여성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다가서는 운용씨에게 유족인지 물었고 그렇다고 대답하자, 조용히 목례를 하고 멀어져 갔다. 후에 방운용씨는 방정환의 지인을 통해 인상착의를 확인하고 그녀가 바로 줄리아였음을 알게 된다.

소파의 묘비에는  '동심여선(童心如仙), 어린의동무 소파 방정환의 묘'라고 표기돼 있다.


아동문학가 이원수는 훗날 두 사람의 플라토닉한 사랑이 어린이를 위한 사랑으로 승화됐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김영식 작가는 "짧은 인생을 살다간 소파의 활동에 대해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고 어린이날을 만든 사람 혹은 아동문학가로 알고 있지만, 그는 다방면에 걸쳐 눈부신 활동을 전개했다"고 언급한다. 소파는 아동문학가 이전에 출판인이자 언론인이었으며 공전의 베스트셀러 잡지인 [학생], [신여성], [혜성], [개벽], [별건곤]등에 발행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소파가 선택한 새로운 사랑

소파가 출판인이자 언론인으로 눈부시게 활약을 펼쳤다지만 묘비에 새겨진 대로 방정환은 어린이의 동무이다. 때문에 성인 누구나 어린시절을 지나왔기에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망우리공원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은 단연 소파 방정환 선생이십니다. 종래 애들’, ‘애놈등으로 불리던 것을 1920[개벽]지에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192251어린이의 날을 발기 선포도 하셨고, 번안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발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1923년 개벽사에서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합니다. 잡지 [어린이]를 통해서 일본노래와 어른들 민요밖에 없던 시절, 동요운동도 벌이셨습니다. 당시 어린이에 노랫말을 기고한 어린이들 중, 이후 아동문학가나 시인으로 성장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소파가 발행한 잡지 [어린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아동문학가와 시인으로 성장했다.


김영식 작가의 말대로 [오빠생각]은 최순애가 11세에 [고향의 봄]15세의 이원수가 어린이에 응모해서 선정된 노랫말이다. 마산소년 이원수와 수원소녀 최순애는 어린이를 계기로 펜팔친구가 되었고, 서로 얼굴도 모르면서 결혼약속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펜팔한 지, 7년 후 수원역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이원수는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원수가 독서회를 통해 불온한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구속돼 1년간 복역을 했기 때문이었다. 최순애의 집안에서도 이원수와의 결혼을 반대하며 다른 혼처를 권했으나 그녀는 완강히 거부한다. 그리고 이원수가 석방되자마자 바로 결혼식을 치르게 된다.

      

[오빠생각]은 최순애가 11세에 [고향의 봄]은 15세의 이원수가 어린이에 응모해서 선정된 노랫말이다. 

둘은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성공한다. 


이밖에도 윤극영의 [설날][반달]을 비롯해, [고드름(유지영 작)], [따오기(한정동 작)], [봄편지(서덕출)]등도 모두 어린이를 통해 세상에 나와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다.

일제강점기 암울한 상황에서 어린이를 위한 잡지 간행이 순조로울 수만은 없었다. 소파는 기성세대의 변절, 무기력, 분열, 좌절감 등을 신세대에 대한 기대로 전환했다. 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소파는 어린이를 장차 조선독립의 역군이 될 인재를 키우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잡지 [어린이]는 일제의 검열에 걸려 기사가 삭제되는 일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그때마다 소파는 경찰서를 들락거려야 했고요. [왜정인물 1]에는 일본 경찰이 작성한 방정환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손병희의 3()용화의 남편이고 천도교이 중요임무를 전담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그리고 키는 52촌에 둥근 얼굴이고, 까만 피부에 비만이라는 기록까지 나오는데,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고 불온한 행동을 할 우려가 있음이라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소파 방정환 선생은 동화구연가로도 유명하다.

이화여자보통학교에서 전교 학생들에게 산드룡(신데렐라의 불어 발음)’을 이야기할 때, 학생들은 눈물이 줄줄 흘러 저고리에 비 오듯 하는 걸 씻지도 않고 들을 정도였고, 교사들마저 눈물을 훔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신데렐라가 의붓어머니에게 두들겨 맞는 구절에 이르자 여학생들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상갓집 같이 일제히 통곡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방정환 선생과 함께 아동문학가로 활동했던 후배 최신복 선생에 따르면, 소파의 강연회에 입회했던 순사가 소파의 강연에 감동해 눈물을 참지 못하고 방정환을 선생으로 모실 정도였다고 합니다.

망우리공원 인문학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그와 나 사이를 걷다'의 저자 김영식 작가


김영식 작가가 언급한 최신복 선생은 동아일보사 수원지국 기자에서 소파의 부탁을 받고 1929년 개벽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훗날 무덤도 없이 홍제동 납골당에 안치된 소파의 유골을 윤석중, 마해송 등과 함께 지금의 망우리공원에 모신다. 그 역시 194538세의 젊은 나이에 소파와 마찬가지로 과로로 유명을 달리 하는데, 방정환의 곁에 묻어 달라 유언했다. 최신복은 그가 죽기 전, 1939년 부친이 사망하자 수원의 선산을 놔두고 망우리공원 소파의 아래쪽에 묘를 썼다. 소파를 더 자주 찾아뵙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1942년 모친이 사망하자 역시 망우리공원 조부의 곁에 안장하였고, 자신의 갓난아기가 죽자 그 곁에 묻은 것으로 전한다. 이로써 소파를 존경했던 최신복으로 인해 3대가 망우리공원 소파의 묘 근처에 잠들게 된다.

소파가 사망한 것은 1931년이었다. 그는 각종 강연, 어린이 관련 행사기획, 집필, 잡지 간행 등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던 중 과로로 쓰러진다. 고혈압에 신장염이었으나 당시 의료기술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지는 못했다. 김영식 작가는 병상의 소파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어린이들을 잘 부탁한다.’말했다며 동화와도 같은 마지막 유언을 전했다.

여보게, 밖에 검정말이 끄는 검정 마차가 와서 검정 옷을 입은 마부가 기다리니 어서 가방을 내다주게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 남긴 것

훌륭한 인물의 업적은 인물과 업적의 내용에 가려져 그 의도나 동기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동기가 드러난다 한들, 표면적인 동기와 당사자가 결심을 품게 된 내재적 동기는 다를 수 있다.

앞서 밝혔듯이, 아동문학가 이원수 선생은 소파 방정환과 줄리아의 플라토닉한 사랑이 향후 어린이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되었다고 언급했다. 아내와 처자를 둔 소파의 처지였기에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으면서도, 두 사람 모두 해외 유학으로 관계가 정리된다. 요즘 드라마 형식을 빌리자면 불륜과 막장으로 끝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유학이 결코 자발적 결정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상상역시 과하지 않다. 하지만 이원수 선생의 말처럼 소파의 플라토닉한 사랑이 내재적 동기로 작용했고, 식민지 조국의 독립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어린이 운동 투신의 표면적 동기와 분명한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소파가 줄리아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대상을 달리할 뿐, 소파의 삶 내내 현재 진행형이었고, 모든 사랑이 그렇듯 그 완성을 갈구하게 된다. [어린이]를 통해 등단한 아동문학가 이원수와 최순애의 결혼은 소파가 사망한 지 5년 후인 1936년의 일이다. 하지만 얼굴도 서로 알지 못했고, 일제 강점기의 엄혹한 환경, 가족의 반대를 극복하고 이룬 운명같은 사랑은, 살아 생전 소파의 실천적 사랑과 무관하다 할 수 있을까.

소파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은 대상만을 달리한 채, 그의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


임종에 가까워질 때, ‘어린이들을 잘 부탁한다.’며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사랑한 대상에 대한 애틋함을 나타낸다. 죽음이란 누구도 피하지 못 할 두려움의 대상이며 생물학적 기능의 종료 상태이다. 하지만 소파였기에, 죽음이라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정서적으로 유약한 어린이들에게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여보게, 밖에 검정말이 끄는 검정 마차가 와서 검정 옷을 입은 마부가 기다리니 어서 가방을 내다주게

소파는 어린이들에게 말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죽음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 동화와도 같은 다른 세계 어디로 떠나가는 것이며, 마치 새로운 일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가방을 챙겨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소파가 배역에 충실한 연기자같이 검은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떠나면서 미완의 사랑은 그의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 어린이를 위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성사시키는 마침표가 찍어진 것이다.

 


망우리공원 보전 '같이가치' 모금 참여하기: https://together.kakao.com/fundraisings/24277


자료참조 '그와 나 사이를 걷다' (김영식 저/호메로스/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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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마지막주 토요일, 망우리공원은 버찌가 빨강게 물들자마자 검붉게 익어가고 있었다. 화사한 꽃이 예뻤던 4월도 잠깐, 어느새 열매는 삽시간에 익는다. 망우리가 근현대 역사인물이 잠든 특성 때문일까. 계절과 시간의 변화도 그들의 삶처럼 압축되어 나타난다.


오늘은 18명의 시민들과 함께 망우리 인문학 강의를 진행한다. 간혹, 참석하신 분들의 성향이나 직업, 나이에 따라 관심을 끄는 묘역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관심이란 한 인물에 대한 존경심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상황에 따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 드러나기도 한다. 사실, 위인에 대한 신비감과 무조건적 영웅시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위인역시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고, 그들의 삶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좀 더 견고하게 개선할 책임을 느낄 필요가 있다. 이를 떠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분의 잘잘못을 섣불리 논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이다.

 

승려의 묘 옆에 부인(人)의 묘가?

망우리공원 순환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도로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묘가 올려다 보인다. 20여 미터 완만한 계단을 오르면 예상치 못했던 장면이 나타난다. 바로 승려였던 만해와 그의 부인의 봉분이다. 비석에도 만해한용운선생묘라는 표기와 부인유씨재우(夫人兪氏在右)’라고 표기돼 틀림없는 한용운 선생의 묘임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김영식 작가가 재미있는 질문을 던진다.

그럼, 한용운 선생의 묘는 둘 중에 어떤 것일까요?


참가자들은 여러 추측이 이어진다. 김영식 작가 말에 따르면, 참배객들이 엉뚱한 봉분에 헌화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결국 오른쪽이라는 것은 우리가 묘를 바라본 입장에서가 아닌, 머리를 위로하고 누운 고인의 입장에서의 방향을 뜻한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18798, 충남 홍성군 결성면에서 태어납니다. 16살이던 1894년에 돌연 출가를 하게 됐는데요. 일설에 따르면 선생의 부인의 해산을 전후로, 시장에서 미역을 사오라는 부탁을 받고 나갔다가 그 길로 출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고향땅인 홍성을 찾지 않았고, 첫 번째 부인의 소생인 아드님과 대면하기조차 꺼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김영식 작가가 출가에 뒤이어 건국훈장인 대한민국장까지 수여받은 한용운 선생의 공로를 언급하였다. 하지만 부인의 봉분과 더불어 처음 알게 된 선생의 행적에 참가자들은 뜨악한 표정들이었. 게다가 승려임에도 두 차례의 결혼 경력은 지금이나 당시에도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임에 틀림없다. 

'상남자셨구나.' 

승려신분으로 독립운동에 그리고 두 차례의 결혼을 떠올리며 참가자들 사이에 묘한 웃음과 분위기가 감지된다.

김영식 작가가 고은 시인의 한용운 평전에서 지적된 내용을 언급한다. 『…연설에 뛰어나고 지조가 강해 지도자적인 능력을 갖추었으나, 수시로 파계를 한 승려답지 않은 행동, 첫 번째 처와 아들에 대한 무정한 처사, 문학적으로 자기보다 앞선 최남선에 대한 시기심...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한용운 평전은 위인의 무조건적인 신격화 또한 우리의 눈을 가리는 행위로 경계해야 할 점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용운 선생이 총독부에 보낸 탄원서와 조선불교유신론에서는 대처의 의미를 짐작할만하다조선불교의 부흥을 위해, 승려가 거지행각을 하면서 탁발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결혼도 하고 가정도 가져 안정된 바탕에서 승려생활을 해야 불교가 발전할 수있다는 소신이었다.


만해는 기미독립운동 민족대표의 33인 중 끝내 지조를 지킨 오세창 등과는 죽을 때까지 교류하였으나, 변절한 최린, 최남선과는 상종하지 않은 것으로 전한다. 한용운이 집을 비운 사이, 최린이 찾아와 딸에게 용돈을 주고 갔는데, 그 돈을 들고 최린의 집에 찾아가 내던진 일화는 만해의 비타협적 생각을 가히 짐작할만하다.

만해는 1944년 지병인 신경통으로 와병하다가 독립을 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시신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홍제동 화장터를 피해 미아리에서 불교식으로 화장을 하고 남은 유골을 망우리 묘지에 안장했다.

 

수채화같았지만 절망적이었던 사랑

1938년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한국명 이남덕)는 미술실기 수업이 끝나고 우연히 수돗가에서 나란히 서서 그와 붓을 빨게 되었다. 조선인 학생으로 2년 선배인 그는,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운동과 노래까지 잘해 당시 여학생들의 선망이 대상이었다. 수돗가에서 붓을 빨던 일을 계기로 둘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하지만 졸업과 동시에 그는 일제가 강점하고 있던 조선땅으로 귀국해야 했다. 편지를 주고 받으며 아쉬움을 달래던 마사코는 해방이 채 되기도 전인 19454월 혈혈단신 현해탄을 건너와 5, 그의 고향인 원산에서 결혼한다. 그의 남편의 이름은 이중섭.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부산과 제주를 전전하는 궁핍한 생활 끝에 병을 얻어 두 아들과 1952년 일본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1953년 친구의 도움으로 잠시 일본에서 가족들과 해후하였으나, 일시체류 신분이기에 다시 기약없는 이별을 맞아야 했다.

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다시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일본입국 비자를 받기 위한 이중섭의 노력은 절박한 것이었다.

마사코가 일본에서 어음을 주고 사 보낸 책을 이중섭이 팔았지만, 결국 판매대금은 그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후배가 중간에서 횡령을 한거죠. 그리고 이중섭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준게 1955년 서울과 대구에서 열린 이중섭 개인전이었습니다. 전시회는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그림을 외상으로 가져가 그림값을 지불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그림을 훔쳐가는 사람도 있었던 겁니다...

처지를 딱하게 생각한 친구들이 돈을 모아 밀항선을 타기를 권했지만, 그 돈마저 어떤 시인이 며칠만 쓰고 돌려준다며 가져가 결국 받지 못했다.

김영식 작가가 말을 잇는다.


화가 이중섭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그림 황소를 보면, 석양의 붉은색을 배경으로 누런 소가 슬픈 눈으로 우는 듯 하는 모습입니다만, 그게 바로 이중섭의 모습이었을 겁니다. 황소처럼 힘세고 야성적이지만, 온순한 성격의 이중섭은 세상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 후, 이중섭의 우울증은 극에 달했다. 일본에서 온 아내의 편지는 뜯지 않았고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황달, 영양실조, 간장염이 발병하게 된다. 그리고 1956년 서대문의 서울적십자병원에서 죽은 후, 무연고자로 처리돼 있다가 사흘 만에 고향 친구인 김병기에 발견된다. 그리고 홍제동 화장장에서 화장돼 유해의 반은 망우리에, 그리고 나머지는 일본의 가족들에게 전해진다. 

 

원했던 혹은 원치 않았던 '이별'의 엇갈린 운명

오로지 그림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던 이중섭에 비해 만해는 종교와 속세를 오가며 불교개혁운동과 독립운동을 벌인다. 1952년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가족과 생이별을 겪어야 했던 이중섭에 비해, 자기의사로 속세와 이별을 결심했던 만해의 경우는 다를지 모른다. 하지만 종교에 대한 귀의와 잔인한 시대의 가슴 아픈 이별도 저마다 타고난 운명을 넘어서지 못 하는 걸까?

대향 이중섭이 잠시 일본에서의 가족과 짧은 해후이후, 가족을 만나기 위한 노력은 필사적인 것이었다. 서울과 대구에서 개최한 개인전의 실패는 그를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하였다. 그리고 절박한 상황에서 시인이었던 친구의 배신은 의지할 곳 없는 중섭을 철저히 파괴해 버렸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은 시인 구상이 이중섭의 2주기 추도기에 기고한 동아일보 기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 세상에서는 중섭이 병들어 미쳐 죽었다고도 하고 굶어 죽었다고도 하고 자살했다고도 한다. 정신병원엘 두 차례나 입원까지 하였으니 병들어 미쳐 죽은 것도 사실이요. 먹을 것을 공궤치 못했으니 굶어 죽인 것도 진상이여, 발병 1년 반 그나마 식음을 완강히 거부했으니 자살했다 하여도 무방하리라. 그러나 그를 살게 하고 죽게 한 것은 오로지 고립이었다. 중섭은 너무나 그림밖에 몰랐다. 그의 생존의 무기란 유일 그림뿐이었다...”

고뇌하는 이중섭(친구이자 화가 한묵이 그린 스케치. 1954년 스케치)


출가를 통해 세상과 이별하고, 승려의 길을 선택한 만해 한용운의 삶도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았지만, 속세와 종교 사이에서 끊임없는 번뇌가 예상된다. 이미 한 차례의 결혼 이후 출가 그리고 재결혼 등은 승려의 파계를 논할 정도로 당시 시대에서는 파격적인 행동으로 보여 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교에 귀의한 몸으로,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의 지조를 지키기란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이중섭은 그렇게 그리워하던 가족들을 살아서 만나지 못했다. 그의 무덤에 세워진 비석은 사망 1년 후, 후배 차근호가 세운 것이다. 비석 오른편에 이중섭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아들 태현(야스가타)과 태성(야스나라)의 부둥켜안은 모습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만해 한용운 선생은 승려였으나, 결국 부인과 무덤을 나란히 하게 된다.

이중섭 묘비는 그가 사망한 지, 1년 후 차근호에 의해 세워졌다.


승려로서 속세와 이별을 했던 한용운 선생, 전쟁과 가난으로 인해 가족과 원치 않는 이별을 해야 했던 화가 이중섭. 원하던 원치 않았던 두 개의 이별의 결과, 설사 다른 시대를 살아갔을 지언정 확연하게 엇갈린 운명을 확인하게 된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세속적 삶의 만남에서 두 분의 생애가 다소나마 뒤바뀌었다면 어떨까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운명은 본래 희망한대로 이뤄지지 않는 인연과 같아 손길이 닿지 않는 아득한 곳에 있다며, 이중섭 묘비의 들꽃이 고개를 떨굴 뿐이다.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소처럼 걸음을 옮기면서 안간힘을 다해 제작을 계속하고 있소...(19541121일 일본의 아내에게 보낸 이중섭의 편지중)


자료참조 '그와 나 사이를 걷다' (김영식 저/호메로스/2015)

6월 망우리공원 인문학강의 신청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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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금호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사무국장


삶과 죽음 그리고 세대를 가르는 경계, 망우리.

젊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지명이고 30대 중 후반, 그러니까 80년대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공동묘지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망우리. 망우리는 그렇게 삶과 죽음을 나누는 장소이자 특정 세대를 가르는 경계이기도 하다. 근심을 잊는다는 뜻의 망우(忘憂)라는 지명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연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양에 새롭게 도읍을 세운 태조가 지금의 건원릉(구리시 인창동 소재)에 자신의 묘를 정하고 환궁하던 중, 이 고갯마루에서 이제야 오랜 근심을 잊겠다(忘憂)’고 말한 것이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여부를 떠나, 태조의 건원릉이 위치한 동구릉과 직선거리로 2km 남짓한 거리에 위치해 있어 망우리는 세인들이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1914년 일제가 단행한 행정구역 변경 이전만 하더라도 망우리(忘憂里)는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忘憂里面)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하사한 지명 그리고 인근의 동구릉과의 위치 등을 고려할 때 행정구역의 격이 그만큼 높았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일제는 양주군 구지면(九旨面)와 망우리면(忘憂里面)자를 따서 구리(九里)로 병합시킨다. 그리고 망우리면(忘憂里面)의 잔여 지역을 리() 단위인 현재의 망우리(忘憂里)로 귀속한다. 사실상 행정구역의 지위에서 강등당한 셈이다. 망우리의 수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일제는 경성의 묘지가 부족하자 1933년 망우리를 공동묘지로 조성하게 된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과 동구릉이 조성된 산줄기에 평민의 공동묘지를 만든 의도를 짐작 못할 바 아니다.

 

품위를 잃은 장소와 가치가 떨어진 인간의 공존

그 후, 정확히 40년 동안 공동묘지로 매장이 이루어졌던 망우리. 이제 사람들의 기억 속에 품위 있던 장소는 죽음과 어둠의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당시 대학생들이 미팅에서 망우리에 산다고 말하면 퇴짜 맞을 정도였다. 특히 60년대 70년대 산업화의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망우리는 원해서도 가고 원치 않아도 갈 수 있는 슬프고도 두려운 공간이었다.

오죽하면 동대문에서 망우리로 가는 시내버스 여차장이 청량리중량교망우리가요~” 라고 속사포 랩으로 행선지를 외치면, 사람들에게 환청처럼 다른 외침으로 들리기도 했다.

차라리죽으려고망우리가요~'

품위를 잃은 장소와 가치가 떨어진 인간이 시대를 공존하며 무수한 사연과 애환을 만들어 낸 곳. 망우리 인문학 강의는 차라리 죽으려 망우리행 버스에 몸을 싣는 것이다. 코트 주머니에 소주병을 꽂은 채 몸을 휘청거리며 지난시절 누군가 버스에 올랐던 것처럼, 현재의 나를 그곳에 묻기도 하고 삶을 물으러 떠나는 길이다.

 

망우리 인문학 강의를 열다.

4월 망우리 인문학 강의는 강남시문학회 회원을 비롯해 27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30일 진행됐다. 인문학강의는 망우리 근현대 역사인물의 묘역을 순례하며 그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세상과 사람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되짚어 보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결정적인 삶의 순간에 나를 대입해 시간과 공간 그리고 나와 그의 벽을 허무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다. 인문학 강의코스는 주로 이인성(화가)-도산 안창호(독립운동가)-태허 유상규(의사/독립운동가)-아사카와 다쿠미(총독부 산림청 직원/민예학자)-혜관 오긍선(의사/사회사업가)-소파 방정환(아동문학가)-최신복(아동문학가)-위창 오세창(서화가)-만해 한용운(독립운동가)-죽산 조봉암(독립운동가/정치가)-남파 박찬익(독립운동가)-최학송(문학인)-계영묵(문학인)-대향 이중섭(화가)-박인환(시인) 순으로 진행된다. 본 코스는 서울시가 현재 조성하고 있는 인문학길의 코스와 일치한다. 하지만 매번 동일한 코스와 인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와 참여자들의 관심도에 따라 코스 일부가 추가되거나 변경되기도 한다. 강의 일정은 상반기 5월과 6월 마지막주 토요일에 강의를 열게 된다.

인문학 강의의 강사는 망우리 근현대사 인물 소개서인 그와 나 사이를 걷다의 저자이자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리분과위원장인 김영식 작가가 진행한다.

             

그는 부산 출생이지만 4살 때 상경하여 망우리공원과 가까운 중랑구 중화동과 상봉동에서 대학 때까지 살았다. 2006년부터 일주일에 한 번꼴로 현재까지 500회 이상 망우리공원을 오르내리며 무덤의 비명과 근현대 인물들의 삶을 조명하였다.

 

조선이 낳은 비운의 천재화가 이인성

4월 망우리 인문학 강의에서 가장 주목받은 인물 중 한 사람이 바로 화가 이인성이다. 김영식 작가의 소개에 따르면, 화가 이인성은 1930년대 마라톤 영웅 손기정과 무용가 최승희만큼 유명한 존재였던 모양이다. 당시 어른들은 그림 그리는 아이에게 커서 이인성 될거냐?”라고 농담을 건넬 정도였다고 한다. 1912년 대구에서 출생한 이인성은 1928(17)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서 촌락의 풍경이라는 작품으로 특선을 차지하며 주목을 받게 된다. ‘세계아동예술전람회는 소파 방정환등이 운영하는 개벽사가 주최한 것인데, 어떤 면에서는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 이인성의 천재성을 발굴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타계한 지 20년 가까이 차이가 남에도, 방정환과 이인성은 모두 망우리공원에 잠들면서 사후까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화가를 환쟁이라고 천대하던 시절, 1929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계기로 이인성은 집안의 반대를 극복하고 당당히 소년 천재화가로 주목받는다. 그 후 2년에 걸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과 특선을 수상하게 되고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1932년 이인성 화가가 19세 되던 해,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일본 화가들을 제치고 입선을 거머쥔다. 이 일을 두고 김영식 작가는 김연아가 피겨 스케이팅에서 올림픽 금매달을 차지한 것과 같은 역사적 사건이라고 언급하였다.

일본 유학시절 만난 부인 김옥순은 학력이 일천한 이인성과 집안의 반대로 어렵게 결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1924년 부인이 결핵으로 짧은 생을 마치면서 실의에 빠진 이인성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된다. 걸핏하면 폭음과 주사(酒邪)를 일삼았던 것이다. 두 번째 결혼마저 실패하고 세 번째 결혼까지 치루지만, 1950년 어이없는 사고로 죽음을 당한다. 김영식 작가는 그 당시의 상황을 눈앞에 그려내듯 설명했다.

6·25 전쟁으로 어수선한 상황에 경찰의 불심검문이 수시로 이뤄지는 분위기였겠죠. 화가 이인성이 술에 취한 채, 거리를 걷다가 행색을 수상하게 여긴 경찰관에게 붙들린 거예요. 그런데 이인성이 술도 마셨겠다, 경찰관에게 다짜고짜 조선의 천재 이인성을 몰라보느냐.”고 호통을 친 겁니다. 주눅이든 경찰관이 이인성을 놔주고 경찰서로 돌아와 도대체 이인성이 누구냐?”고 물었겠죠. 그러자 주변에서 그 동네에 술주정뱅이 환쟁이가 있지...”라는 말을 들으니, 한낱 환쟁이에게 당한 일이 화가 난겁니다. 그래서 총을 소지하고 이인성의 집으로 찾아가 말다툼과 몸싸움을 벌이다가 실탄이 발사된 거죠. 결국 그 일로 이인성이 숨지고 맙니다. 그의 나이 38살이었습니다.

황당하기까지 한 조선의 천재 이인성의 죽음에 이르러 참가자들이 하는 탄식과 실소 그리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깊은 상실의 시대를 살다 간 시인 박인환

4월 인문학 강의에서 관심을 끌었던 다른 인물이 있다면, 코스의 마지막 묘역에서 만나는 시인 박인환이다. 아마도 단체로 참가신청을 하신 분들이 시문학회 회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화가 이중섭의 묘역에서 강의를 마치고 망우리 관리사무소 쪽으로 이동하다 보면, 오른편에 박인환의 연보비가 나타난다. 비석에는 그의 시 목마와 숙녀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비석의 맞은편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자 김영식 작가가 스마트폰에 저장된 노래를 틀었다. 박인희가 부른 세월이 가면이었다. 이 노래 가사도 명동의 선술집에서 박인환이 즉흥적으로 시를 짓고 이진섭이 곡을 붙여 그 자리에서 나애심이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진다.)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시()였다. 박인환의 묘 앞, 사각형의 묘비에도 시인 박인환의 묘라 적혀있고 그 밑으로 세월이 가면의 첫 문장이 새겨져 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이 시를 짓기 하루 전, 박인환은 첫 사랑이 묻혀 있는 망우리 묘지에 다녀갔다고 김영식 작가는 설명한다. 평소 술을 좋아했던 그였기에, 코트 주머니에 소주병을 꽂은 채 몸을 휘청거리며 망우리행 버스에 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유작시 세월이 가면을 완성한 사흘 후인 1956320, 만취한 채 집에 들어와 잠을 자다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31. 세탁소에 맡긴 봄 코트는 돈이 없어 찾지 못했고, 겨울 코트를 그대로 입은 채였다. 부음을 듣고 맨 먼저 달려온 친구 송지영이 박인환의 뜬 눈을 감겨주었다.

박인환의 또 다른 시 목마와 숙녀에 대한 김영식 작가의 설명이 이어진다. “도대체 목마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그리고 우연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된 고대 무덤의 부장품인 목마를 본 경험담 그리고 순명효 황후 장례행렬 사진 속에서 종이로 만든 백마를 통해 죽음의 동반자임을 설명했다. 고급진 문장과 달달한 시어(詩語)의 느낌과 달리 1950년대 전쟁의 비극과 죽음, 이별, 허무 등의 시대적 고뇌를 박인환의 탁월한 언어적 감수성을 통해 시로 형상화된 것이다.

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시에 사용된 박인환의 세련된 수사와 평소 그의 행색 등으로 인해 남성을 대표하는 속물로 문단의 비난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전쟁의 참혹한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현실인식이 강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덧붙였다.

그러한 이유에서 일까?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에 대한 오해는 필자의 고교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목마와 숙녀는 시화전의 단골 주제였고 교실마다 한 점씩 걸리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박인환이 작사한 세월이 가면을 부른 가수 박인희의 시낭송 음반도 유행이었다. 모국어지만 낭독하면 혀끝에서 감미롭게 굴려지는 시어(詩語)들이 마치 유창한 외국어를 구사하는 듯 했다. 알 듯 모를 듯 낭만적인 언어들은 지적 허영심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잠자리 뿔테안경을 쓴 친구가 같은 반에 늘 한 명쯤 있기 마련이다. 까칠하기로 유명한 국어선생님 수업시간에 이 친구가 목마와 숙녀의 시낭송을 자원했다. 목소리가 좋았던 친구는 자신의 낭송에 점점 도취돼 가는 듯 했다. 그렇게 시낭송이 끝났다. 선생님의 얼굴에 비웃음 혹은 경멸의 빛이 스쳐 지났다.

이 시가 그렇게 낭만적으로 읽히든?”

 

상실의 두 빛깔

4월 망우리 인문학 강의에서 관심을 가진 두 인물은 공교롭게도 '상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인성은 1942년 아내 김순옥의 사망으로 실의에 빠진다. 절망의 시간을 술로 보내던 화가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준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 최고의 화가라는 타이틀이었을 것이다. 술로 인해 타인과의 불화가 이어지고 괴팍한 성격에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수록, ‘조선의 천재 이인성이라는 변할 수 없는 사실에 집착했을 법하다. 오로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건 '영광스러운 과거' 밖에 없었던 가난한 현실이, 그를 비극적 운명으로 몰고가지 않았을까.

목마와 숙녀에서 시인 박인환은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라면서 2차 대전 후, 허무주의에 시달리다가 템즈강에 투신 자살한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상실을 추모한다. 그리고 6·25 전쟁 이후의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는’ 현실 속 상실감을 토로한다. 어쩌면 시인 박인환의 상실감은 뿌리 깊은 것인지도 모른다. 앞서 밝힌 것처럼 이미 20대에 첫사랑을 잃었고, 그 역시 세상과 작별하기 나흘 전, 망우리에 묻힌 첫사랑을 찾는다. 그녀의 묘를 찾은 다음날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가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처럼 보여지지 않는다.  '목마와 숙녀' 역시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인해, 시인 박인환이 지병처럼 앓고 있던 세상에 대한 상실감을 버지니아 울프의 죽음에 투영시킨 건 아닐까.   

인문학 강의의 마지막 코스인 박인환 시인의 묘역에 앉아 그와 이인성이 겪은 상실감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게 나라면?’이라 자문해 본다. 나역시 그들보다 뛰어난 인내와 처세를 발휘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30대에 요절한 두 천재들의 삶을 무어라 평가할 수 있을까? 하지만 누구도 타인의 삶을 평가할 자격은 없다. 살아있는 사람이 목마를 타고 떠난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럴 수 있겠다공감하며 그들의 삶에 고개 끄덕여 주는 것밖에.


자료참조 '그와 나 사이를 걷다' (김영식 저/호메로스/2015)

5월, 6월 망우리공원 인문학강의 신청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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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세계내셔널트러스트대회 참가기
Common Threads; Different Patterns

 


공동집필: 조명래, 박도훈

매 2년 마다 열리는 세계내셔널트러스트대회가 영국내셔널트러스트 주최로 16회를 맞이하여 영국 캠브리지에서 개최되었습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영국내셔널트러스트로부터 2인의 초청을 받고 배청 이사님의 후원으로 조명래 공동대표와 박도훈 부장이 참여하였습니다. 또한 문화유산국민신탁의 문승현 팀장이 동행하여 한국에서는 모두 3인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2015년 9월7~11일에 진행된 이번 16회 세계대회 주제는 '공통의 실타래, 다른 무늬(Common Threads; Different Pattern)'였습니다. 직역하자면 그렇지만 뜻은 새겨봄직 합니다. 'Common Threads'는 '공통적 맥락'을 뜻하는 용어로 세계 각국의 내셔널트러스트가 추구하는 공동의 목표와 가치를 뜻하며 'Different Pattern'은 지역별로 다른 문화와 제도에서 나타난 '무늬' 즉 지역 특성을 가진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을 말합니다. ‘21세기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의 역할과 목적’이라는 질문으로 시작한 이번 대회는 우리가 보호하고 있는 유산을 잠식하는 개발압력과 전 지구적 위협을 극복할 대안과 전략을 공유하는 것에 집중하였습니다.
이번 대회는 호주, 미국, 캐나다, 이탈리아, 포루투갈, 버뮤다, 인도네시아, 슬로베니아, 체코, 한국, 중국, 일본, 인도, 우간다, 짐바브웨 등 50여 개 국 70여 단체, 200여명의 참가자가 등록하였으며 숙소는 캠브리지대학 킹스칼리지, 전체회의는 캠브리지대 웨스트로드 콘서트홀에서 열렸고 개별 활동 프로그램들은 캠브리지 근처에 위치한 영국 내셔널트러스트 사이트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영국NT대표 찰스 황태자의 영상 환영사

INTO 집행위원 및 임원진: 위원소개 링크


첫날(9월7일) 총회가 있었습니다. INTO(세계내셔널트러스트기구)의 경과보고와 정관에 따른 새로운 임원 선출이 있었습니다. 회장으로는 영국내셔널트러스트 전임 사무총장(2001-2012), 피오나 레이놀즈경(Dame Fiona Reynolds) (Dame:여성께 부여하는 Sir), 부회장으로 우간다의 에밀리 드레이니가 선출되었습니다. 사무총장으로는 캐서린 레오나드(1999년 영국 NT방문 때 첫 대면이 있어, 한국NT를 잘 기억함), 그리고 한국NT 조명래 대표를 포함한 12명의 집행위원이 선출되었습니다.
신임 피오나경은 취임사에서 “INTO회장이 된 것을 무한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영국NT 사무총장으로 있으면서 운 좋게도 다섯 번이나 ICNT(세계대회)를 참여했습니다. 재직 중에 INTO가 설립되고 글로벌 네트워크로 발돋움하는 용감한 도전을 보았습니다. 이제 그 관계를 더욱 새롭게 하고 협력해가는 기회를 즐기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오전 총회 이후, 개회기념 주제발표(NT운동의 전망과 도전) 및 강연이 오후까지 이어졌습니다. 영국내셔널트러스 대표(president)인 찰스 황태자의 영상 인사도 있었습니다. 저녁엔 킹스칼리지의 강당에서 축하 파티가 있었습니다.
 

캠브리지 킹스칼리지 강당은 영화 <해리포터>의 호그와트??

둘째 날(8일),  캠브리지 근방(동/북쪽) NT 사이트인 Anglesy Abbey(문화유산), Wicken Fen(영국 NT 최초 획득한 자연유산)을 방문한 후 현지에서 ‘문화정체성 지키기’라는 주제에 대한 토론이 있습니다. 글로벌화 되어가는 문화동화현상에 지역의 유형 혹은 무형의 인류문화이 사라져가는 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각 나라의 사례와 대안을 제시하는 토론이었습니다. 저녁엔 신임회장 주재로, '향후 INTO 활동방향/과제에 관한 간담회'가 있었습니다.
 

앵글 수도원

위켄팬 습지(영국최초의 자연유산)

영국내셔널트러스트 가게(각 사이트와 지역 명물, 공예품 등을 만날 수 있다)

Ickworth 장원

영국NT사이트 답사해설은 대부분 은퇴 시니어인 자원봉사자들이 맡는다.

주제별 그룹토론이 텐트별로 진행되었습니다. 관심있는 주제를 선택해 참여할 수 있었는데 다루고 싶은 주제가 몇개? 전부 다 필요해 ...ㅠㅠ 

  -젊은이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
  -브랜드 전달과 연관
  -펀드레이징 기법
  -자원봉사 활용하기
  -우리의 미래에 투자하기
  -법제와 거버넌스
  -캠페이너와 비평가와 같은 우리의 역할

셋째 날(9일), 캠브리지 근방 '뷰리 세인트 에드문즈(Bury St. Edmunds)의 NT 사이트(Theatre Royal, 18세기 최초 극장)에서 'Best Practices' 발표가 있었고, 장소를 다른 사이트인 Ickworth 장원으로 옮겼습니다. 저택과 정원 등을 답사하고, NT활동 관련된 주제(펀드레이징, 거버넌스, 소통 등) 그룹토론회가 정원의 텐트 속에서 오후 동안 열렸습니다. 이후 저녁 식사 전에 지역 미팅이 있었습니다. 아시아 지역모임에서는 한국, 타이완, 일본, 인도네시아, 인도 등이 참가했으며, 향후 아시아권 사이의 활동에 대한 의견 교환이 있었습니다. 한국이 처음으로 아시아 내셔널트러스트 회의를 개최한 후(2008), 후속 모임이 없음을 지적했고, 다른 나라가 이어서 개최할 것을 제안, 인도네시아에서 내년 1월에 아시아권 문화유산 커퍼런스를 개최하면서 아시아 내셔널트러스트운동 세션을 포함시켜 진행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아시아퍼시픽 지역모임 토론

넷째 날(10일), 캠브리지 근방(서쪽)의 대장원 Wimpole(NT 직원 42명, 자원봉사요원 500명)에서 NT가 추진하고 있는 친환경 농업활동에 대한 설명과 현장 토론이 있었습니다. 주제는 '땅과 경관과 자연'. 주로 이 사이트에서 추진하고 있는 '물살리기 캠페인'에 대한 토론과 농약과 화학비료로 침식되어가는 토질의 개선 등 농업활동에 대해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장원의 헛간에서 바비큐 파티가 있었습니다. 영국식 포크댄스를 배웠는데 모두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Wimpole Hall

동영상으로 보실까요? 올드한게 놀기 딱 좋았습니다.


 다섯째 날(11일),  다시 캠브리지대 콘서트홀에서 전체 마무리 회의가 열렸습니다. 전체 회의 전에 신임회장 중심으로 집행위원회가 열렸습니다.(우리가 일찍 떠나야 한다하여 오후 일정이 오전 일정으로 옮겨졌음) 12명의 집행위원들이 모두 참가한 첫 집행위원회에서는 집행위원회 운영에 관한 의견 교환이 있었습니다. 집행위원회에서 매 2개월마다 온라인 회의를 개최하며 일년에 한번씩 대면(face-to-face) 회의를 갖도록 합의하고 첫 회의는 11월6일에 하기로 했습니다. 이후 전체 회의가 시작되면서 특강이 있었고, 대회활동에 대한 간단한 평가가 있었으며, 신임회장의 인사말이 있었습니다. 신임회장은 '가족', '성공', '목소리' 3가지 키워드로 INTO를 이끌어가겠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끝으로 차기 회의개최국인 인도네시아 대표들의 수락인사, 문화공연 등이 있는 후, 대회가 공식 종결되었습니다.
 

차기 ICNT 개최국 인도네시아에서 축하공연을 마련했습니다.


이상이 간단한 16차 내셔널트러스트 세계 대회의 주요 내용입니다.
인상 깊은 것은 이번에 ‘루안 헤리티지재단’이 중국의 첫 INTO의 공식 멤버로 참여하였다는 것과 신생 동유럽의 ''체코 내셔널트러스''는 활동본부가 영국에 있으면서 글로벌 모금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국제적 구호활동 등도 지금은 국경이 따로 없는 시대이지만 자국의 유산보전을 위한 모금활동의 다양성에 대해서는 고정관념을 버려야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번 대회는 영국내셔널트러스트 중심으로 모든 게 다루어지다 보니, 우리 같은 신생단체들이 주체적으로 참가해 함께 하는 데는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 흐름과 동향, 다른 나라의 활동 등에 대한 직간접 체험은 우리의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을 다시 한 번 성찰하면서 한 걸음 더 나가게 하는 데는 적잖은 도움이 된 듯 합니다. 특히 향후 NT활동은 문화유산 확보와 보전에 더 역점을 두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고, 또한 국내 관련 단체들과의 협력도 더 강화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언제가 세계대회를 우리가 개최할 가능성도 꿈꾸어 봤습니다.

INTO 2015 세계대회 포스팅 : http://www.internationaltrusts.org/2015-conference-in-england 

INTO 총회 소식: http://www.internationaltrusts.org/14375

INTO 집행위원소개: http://www.internationaltrusts.org/about-into/executive-committ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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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내셔널트러스트 30호 [내셔널트러스트 여행]- 누하동 오거리

시간의 골목, 시간의 교차로

글: 김한울 / 서촌주거공간연구회 사무국장

장면 1. 현자를 찾아서

사진: 김한울

무언가 찾아 집집을 찾아 헤메는 이가 서촌의 골목을 바삐 걷는다. 술 좋아하는 체부동 김씨와 바둑 좋아하는 누각동 김씨까지 찾아 가 봤지만 모두 허탕이었다. 해는 인왕산을 넘어 처마 밑으로 어둠이 피어나고 있었다. 며칠 공을 치니 마음은 더 급해졌다. 귓가에 거문고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누각동 이만호 집이 머리를 스친다. 김홍기가 거문고를 좋아하는 그의 집을 자주 찾는다는 이야기를 김홍기의 아들로부터 직접 들었다. 조용히 대문을 밀고 들어가 가쁜 숨을 고르며 거문고 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묻는다.

“실례지만, 어느 분이 김노인이십니까?”

“여기에 김씨는 없소. 홍기를 찾나본데, 와도 예정이 없고 가도 언제 온다 않으며, 올 때는 하루에 두세 번도 오지만 오지 않을 때는 해를 넘기는 사람이오.”

날이 기울었으니 그가 다닌다 하는 집들을 물어서 다음 날에 기대해 볼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다음날, 다시 걸음을 서둘렀다. 그렇게 몇 집을 찾아갔을까. 지난 밤 술겨루기를 하곤 아침녘에 취기와 함께 먼 길을 떠났다는 답만 덩그러니 남았다.

김홍기라는 사람은 두루 세상의 이치를 꿰뚫고 있어 김신선이라고도 불리는 인물이다. 그를 찾는 이는 연암 박지원. 그의 지혜가 우울증에도 효험이 있다는 얘기를 마음에 새겨뒀다가 사람을 보낸 것이다. 하지만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신선은 찾지 못하고 만다.

서촌의 18세기 풍경을 아련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게 해주는 연암 박지원의 <김신선전(金神仙傳)> 내용이다.


조선의 지도를 들고 서촌의 골목을 걷다

연암의 <김신선전(金神仙傳)>은 체부동과 누각동에서 시작된다. 누각동은 누상동과 누하동의 옛 이름이다. 숨은 현자 김신선과 그를 찾는 박지원의 추적은 서촌의 골목 어디 쯤에서 엇갈리고 있었을까. 운 좋게도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실마리를 가지고 있다.

<도성대지도>는 조선의 서울을 가장 크고 세세하게 그린 지도다. 18세기 후반에 편찬되었으니 <김신선전>의 인물들의 발걸음이 일으킨 먼지가 막 가라앉을 즈음이다. 붉은 선으로 길을 긋고 푸른 선으로 물을 그렸다. 물길을 덮은 아스팔트 아래로는 오늘도 청계로 향하는 물이 흐르고, 골목길을 덮은 보도블록 위로는 오늘도 서촌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쁘다.

18세기 조선시대 지도를 들고도 21세기의 골목길을 찾아 걸을 수 있는 곳, 바로 서촌이다.

도성대지도(일부, 서촌) _ 공공누리:문화재청

지도를 보면 인왕산 아래 옥류동 물길 옆으로 구불구불 내려오던 골목길이 갑자기 한 곳에 모인다. 동네 밖으로 나갈 땐 모두가 만나는 곳이고, 동네로 들어설 땐 함께 들어와 흩어지는 곳이다. 길의 갈래는 다섯 갈래. 누하동 오거리다.

오거리는 조선시대 누하동 안의 작은 동네 이름들 중 하나로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다섯 오(五), 클 거(巨), 마을 리(里), 오거리(五巨里)다. 지금은 근처에 자리잡은 슈퍼마켓 이름으로 남아있다. 얼마 전까지는 마을버스 정류장 이름으로도 남아있었지만 서촌에 한옥마을이라는 이름이 덧씌워지면서 마을버스 정류장 이름에서는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서촌 사람들은 여전히 그 정류장을 오거리라 부른다.

누하동 오거리는 누하동, 체부동, 통인동, 필운동의 경계가 만나는 곳이다. 18세기 신선을 찾는 발길이 체부동에서 누각동으로 향했다면 지금의 누하동 오거리를 지나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오래된 골목, 그 길과 길이 만나고 흩어지는 곳마다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발걸음. 옛 사람들이 걷던 길을 그대로 우리가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살갗으로 느껴지는 역사의 깊은 호흡은 서촌이 간직한 시간의 숨결이고, 서촌이 시간을 담고 있는 방식이다.


장면 2. 단짝 친구의 선물

서너살 쯤 나이 차가 있어 보이는 두 아이가 오거리에서 인사를 나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한 아이가 몸이 불편하여 입학이 늦어진 바람에 둘은 동급생으로 몇 해를 지내며 둘도 없는 단짝 친구가 됐다. 함께 걷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끊어진듯 이어지다가도 통하는 듯 막다른 길이었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유년에 동네의 골목길을 탐험하듯 돌아 다니다 보면 길 잃고 헤메는 일도 더러 있기 마련이다. 둘은 그렇게 동네의 골목길을 함께 걷다가 헤어지곤 했다.

친구는 나무로 만든 그림도구 상자를 선물했다. 마음에 쏙 드는 선물에 마음이 들뜬 아이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별명을 ‘나무 상자’라는 뜻으로 지었다. 한자로 이상(李箱). 김해경이라는 본명 보다 직접 지은 이름을 더 자주 쓰게 된 것은 순전히 이 동네 단짝 친구, 구본웅 덕분이었다.


서촌의 시간은 길로 이어진다

한국의 툴루즈 로트렉이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한 서양화가 구본웅과 구본웅의 그림 <친구의 초상>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인 이상은 평생 친구이자 동네 친구였다. 누하동 오거리는 구본웅의 집과 이상의 집을 이어주고 있다. 그들이 걸었던 구불구불 막히기도 이어지기도 하던 골목은 이상의 시 <오감도>에 아해들이 질주하는 무대가 되었다.

서촌 골목의 아이들

20년 전에 새로 놓인 넓은 찻길을 피해서 골목으로 다니는 서촌의 아이들은 누하동 오거리에 익숙하다. 필운동으로, 누하동으로, 누상동으로, 통인동으로, 체부동으로 만나고 갈라지는 오거리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인사가 더 빈번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누가 알까. 지금도 일생에 남을 선물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우정을 키워가고 있는 어느 미래의 시인과 화가가 저 오거리를 지나고 있을지 말이다. 그렇게 서촌의 골목은 옛 이야기에만 머물지 않고 오늘의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 서촌이 시간을 이어주는 방식이다.


장면 3. 캔버스를 들고 오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전쟁의 포화에도 불구하고 불행 중 다행으로 서촌에는 폭격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오거리는 마치 언제 전쟁이 있었냐는 듯 평화로웠다. 캔버스와 물감을 들고 오거리를 지나는 화가의 마음을 예외로 한다면 말이다.

고향 떠난 고된 피난 생활이 결국 가족을 갈라놓았고, 그 후로 홀로 전국을 전전하다가 휴전 이듬해, 누상동의 고향 선배 집에서 하숙을 시작했다. 가족과 다시 한 집에서 살 수 있는 방편의 하나로 개인전을 준비하기로 한 것이다. 가족과 그림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었던 그의 발걸음은 재회의 희망에 부풀어 한결 가벼웠을 것이다. 그 마음을 담아 그린 작품에 <도원>과 <길떠나는 가족> 같은 제목을 붙였다. 가족과 함께하는 행복한 시간과 피난 가던 때를 화폭에 옮긴 것이다. 그의 이름은 이중섭이다.


전쟁의 포화에도 불구하고 불행 중 다행으로 서촌에는 폭격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오거리는 마치 언제 전쟁이 있었냐는 듯 평화로웠다. 캔버스와 물감을 들고 오거리를 지나는 화가의 마음을 예외로 한다면 말이다.

고향 떠난 고된 피난 생활이 결국 가족을 갈라놓았고, 그 후로 홀로 전국을 전전하다가 휴전 이듬해, 누상동의 고향 선배 집에서 하숙을 시작했다. 가족과 다시 한 집에서 살 수 있는 방편의 하나로 개인전을 준비하기로 한 것이다. 가족과 그림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었던 그의 발걸음은 재회의 희망에 부풀어 한결 가벼웠을 것이다. 그 마음을 담아 그린 작품에 <도원>과 <길떠나는 가족> 같은 제목을 붙였다. 가족과 함께하는 행복한 시간과 피난 가던 때를 화폭에 옮긴 것이다. 그의 이름은 이중섭이다.


삶과 예술이 이어지는 시간의 교차로

누하동 오거리에는 수많은 화가들의 이름이 수놓여있다. 전쟁이 끝나고 속속 서촌으로 화가들이 모여든 것이다. 피난 시절, 이중섭과 함께 부산에서 단체전을 열었던 이봉상 화백의 집은 누하동 오거리에서 몇 걸음 안되는 곳이다. 이봉상 화백과 누하동 오거리를 사이에 두고는 천경자 화백도 자리를 잡았다. 이중섭, 이봉상과 부산에서 함께 단체전을 열었던 한묵 화백도 곧 이웃이 되었다. 누하동 오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만나고 인사하며 그림을 이야기 했을 전후 서양화가의 발자취가 눈부시다.

 누하동 청전 이상범 가옥과 천경자 화백의 집

서촌엔 이미 당대 최고의 동양화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청전 이상범 화백은 이미 오래전 누하동에 청전화숙을 열어 수많은 제자를 배출하고 있었다. 그의 스승은 심전 안중식이었고, 심전의 스승은 오원 장승업이었다. 시상대 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도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던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우는 작업을 맡았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은 후 언론사를 나와 후진 양성에 더욱 힘을 쏟고 있었다. 그의 집에 하숙을 하던 이 중에는 10대의 박노수도 있었다.

미술관 전시를 통해서만 만나던 이름들이 누하동 오거리를 만나면 살가운 이야기들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같은 곳에 출퇴근을 하던 이들 중에 독신이었던 한묵 화백은 이봉상 화백의 집에서 식사를 하는 일이 잦았고 종종 천경자 화백의 집에서 끼니를 신세지기도 했다. 출근길에 누하동 오거리를 지나 이웃집에 들러 아침밥을 먹는 풍경에서 화가는 예술가 이전에 동네 삼촌이다. 언제든 달려가서 고민을 털어놓고 위안을 주고 또 받던 이웃들이 누하동 오거리를 오가며 이웃의 정을 쌓아온 것이다.

천경자 화백이 살던 누하동 집은 예술가 몇몇이 아뜰리에로 사용하고 있고, 곳곳에 화가들의 작업실이 있다. 오거리를 통해 오가며 정을 나누는 이웃 사이는 지금도 오거리에 서면 가던 길 멈춰 서서 한참을 이야기 나누는 동네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대로 다시 찾아 볼 수 있다.


시간의 골목, 시간의 교차로

서촌을 살다 간 이들의 이름을 모두 꼽으려면 숨이 차오를 정도다. 시인 노천명은 천경자 화백이 오거리를 오가며 인사를 나누던 사이였다. 노천명 시인의 집 맞은 편에는 염상섭의 생가가 있었다. 같은 나이의 수주 변영로가 신교동에 살았다 하니 통인동 골목으로 오거리를 지나 친구의 집으로 향하는 장면도 떠올려 볼 수 있다. 김복진과 이여성은 당대 얼마 되지 않는 대표적 예술인 독립운동가로 두 사람의 집을 잇는 길 역시 누하동 오거리가 된다. 이여성은 청전 이상범과 함께 전시를 열었고, 김복진은 구본웅에게 조각을 가르쳤다. 

누하동 오거리 지도 _ 서촌주거공간연구회

그 무수한 이름들이 누하동 오거리에 놓이는 순간 우리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역사 속 아련한 인물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길, 이 거리를 지금도 걷고 있는 누군가 처럼 느껴지는 경험 말이다. 구불구불 복잡하게 그물처럼 얽힌 골목처럼 시대의 이름들이 골목으로 얽히며 시간의 살아있는 숨결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누하동 오거리, 골목의 숨결을 이어가는 방법

누하동 오거리에는 오래된 건물이 얼마 없다. 올해로 상수(上壽)를 맞은 한묵 화백이 50년 전에 살던 누각같은 2층 집도 지금은 자취를 알 수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 길이 아직 남아있다는 점이다. 재개발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가면 집은 물론 길까지 모조리 흔적없이 사라지는 시대에 조선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역사의 자취를 따라가 볼 수 있는 길이 남아있고 그 길을 오늘도 이야기를 이어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문화유산이라 하면 고색 창연한 건축물만을 떠올리며 그 안을 드나들던 사람들이 걷던 길과 그 위에 놓여진 이야기의 호흡은 자칫 놓쳐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누하동 오거리는 오래된 건물 보다는 오래된 길과 이야기를 읽는 눈을 불러낸다. 그 눈으로 역사 속의 이야기와 오늘의 삶을 함께 읽어낼 때, 우리의 삶 자체도 문화유산과 함께 빛을 발하는 살아있는 역사로 새겨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사진: 서촌주거공간연구회(최문용)

오늘의 서촌이 답해야 할 물음은 여기에 있다. 보존과 복원이 개발의 다른 이름으로 돌아와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만져지지 않는 것들을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것으로 새로 만들어 세우는데 급급한 지금,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숨결은 숨결 그대로 이어가는 노력과 자세에 대한 것 말이다.

과거의 발걸음이 오늘의 발걸음으로 이어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살아있는 역사와 살아있는 문화유산을 누릴 자격을 가지게 되는 건 아닐까. 서촌을 수놓은 수많은 이름과 이야기들이 서로 만나고 교차하는 누하동 오거리에 오늘의 삶 역시 교차하고 있는 것 처럼, 시간의 교차로 누하동 오거리는 예전과 같이, 오늘도 여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쓰여지고 있는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참고문헌

연암집(燕巖集) 제8권 별집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김신선전(金神仙傳), 연도미상 (한국고전종합DB)

천경자, 思友 잊을수 없는 그때 그친구 <16> 千鏡子 <東洋畵家> (6) 萬年청년 韓默씨, 경향신문, 1979.10.3.

김창희, 서촌의 형제들이 꾸었던 꿈 진보적 민족주의자의 길 - 1, 레디앙, 2013.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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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국내셔널트러스트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분류없음2013.06.11 10:49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호흡을 멈추고 진흙속에 발담가 바짝 엎드립니다.

손가락 떨릴새라 정신을 고두고 고개들고 숙이고를 반복합니다.

5월, 강화도 초지리 매화마름 논에 찾아오신 사진작가들이 여러분이십니다. 거의 매일 누구든 오십니다. 그리고 흔적 없이 사진만 찍고 가십니다.매화마름을 잘 찍으려면 무조건 바짝 엎드려야 합니다. 심지어 물담긴 논에 들어가 주저앉기도 합니다. 지나가는 주민들은 그런 사진작가들을 보면서 재미있다는 표정입니다. 그리고 “그게 뭐라고... 잡초인데, 사진을 그렇게 정성을 들여서 찍는지... 귀하긴 하나벼...허허” 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난히 5월에 ‘매화마름’을 검색하면 새로 올라온 여러 작가님들의 사진작품을 여럿 감상할 수 있습니다. 올해도 꽤 좋은 작품들을 볼 수 있어 반가웠습니다. 


<매화마름 논을 찾아오신 사진작가들>


<이렇게 엎드려야 작품이 됩니다>


매화마름을 처음 보신 분들은 논 앞에서 “매화마름이 어딨죠?” 라고 묻습니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아~” 하십니다. 이렇게 작은 꽃을 사진에 담기는 카메라도 좋아야 하고 기술도 좋아야 합니다. 최상미 블로거님께서 주신 작품하나 얻어서 올립니다.


<사진제공: 최상미 회원님>


원본으로 보면 방울방울 촉촉이 물방울이 맺혀있고 씨앗도 영글어 가며 싱싱함이 물씬 풍기는 자태입니다. 블로그 사진이라서 원본 느낌과 좀 다르지만 감동을 느끼기엔 충분합니다. 줄기와 잎이 굵고 짧은 물밖꽃입니다. 꽃 중앙에 정확히 초점이 가있고 음영비율이 약간 어둡지만 신비롭게 보입니다. 


<스마트폰으로 찍어도 이정도는 나옵니다>

스마트폰으로 찍으면 이정도가 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능이 부족하니 접사도 애매하고 초점도 멀지만 옹기종기 모여서 재잘재잘 즐겁게 햇빛을 쬐고 있는 모습이 앙증맞습니다.

물아래 비친 반영도 나타냈습니다. 흩뿌려진 씨앗도 보이고 물속에 가득 퍼진 줄기와 잎도 보입니다. 이제는 매화마름이 예술작품의 주인공이 되어 ‘귀한 몸’ 대접을 받습니다. 

5월25일 즈음이면 거의 모든 강화도 논습지는 논갈이와 모내기를 끝낸 시기입니다. 그나마 매화마름을 끝까지 볼 수 있는 곳은 초지리 람사르습지 하나입니다. 람사르 매화마름 논도 6월5일 논갈이와 모내기 일정이 잡혀있습니다. 이제 매화마름은 내년을 기약할 수 밖에 없지요. 벼가 논의 주인이 되는 시기가 됩니다. 여름엔 매화마름이 더워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매화마름 논의 다른 쪽에서 반가운 친구가 왔습니다. 알락도요입니다. 늦게서야 도착했는지 다른 친구들 보다 홀쭉 말랐습니다. 열심히 영양을 보충하고 어느정도 기력을 찾으면 다시 어디론가 가겠지요. 주로 시베리아에서 번식하고 동남아시아, 호주까지 가서 겨울을 납니다. 봄 가을에 우리나라에 지나가는데 먼 길을 가려면 잘 먹고 쉬어야 합니다. 도요새는 크기도 작거니와 논 중간에 서 있으면 구분하기도 힘듭니다. 이런 사진을 찍으려면 카메라 렌즈는 망원급이 필요하겠습니다.

꽃창포와 새섬매자기가 향긋한 매화마름 논에서 습지생명과 조화롭게 사는 방법을 배웁니다.

생명과 밥을 어떻게 구하는지 현명한 습지 이용과 지속가능한 발전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5월 매화마름 논두렁을 걸어봅니다. 생명을 담는 예술은 그래서 더욱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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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떠나간 겨울새들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여름새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4월하고도 12일 즈음 눈발이 휘날리더니 며칠 지나 이제야 완연한 봄날씨입니다.

올해 매화마름 논이 꽃논이 되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할 판입니다기후변화의 영향일까요. 예년과 달리 꽃샘추위가 길어 아마도 5월이 되어야 꽃이 보일 것 같습니다당산리 매화마름 논은 경지정리가 진행되는 통에 마른 논으로 겨울을 나, 올 봄 꽃 보기는 틀렸고 초지리 논은 예년처럼 매화마름 꽃 보기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직 매화마름 꽃이 고개를 내밀지 않았지만 봄을 알리는 매화마름 논은 어느새 초록초록 생명의 빛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대부분 어린 싹이 비치는 정도이지만 햇빛이 잘드는 한 구석에 제법 성장한 매화마름이 눈에 뜨입니다. 미나리아재비과인 매화마름 줄기는 흡사 감도는 빛깔이 미나리를 연상케해 맛도 좋게 보이지만 멸종위기식물을 캐다 먹을 수는 없지요. 500만원 이상의 벌금이 그런 생심도 못내게 합니다.



          

매화마름은 물속과 물 밖의 줄기와 잎모양이 다릅니다.

물속의 매화마름은 줄기와 잎이 길고 마디에서 나온 잎은 털처럼 수북히 양도 많습니다.수심이 깊어질수록 뿌리의 개수는 감소하지만 길이는 확연히 늘어나고 1미터 정도의 수심에서도 잘 자랍니다.

그러나 물 밖에 축축한 곳에 뿌리내린 매화마름은 줄기와 잎이 굵고 짧습니다대신 많은 양의 물을 얻어야 하기 때문인지 뿌리는 개수도 많고 길이도 깁니다물속 매화마름의 뿌리는 중간중간 마디에서도 자라 수중에서도 멀리 떨어진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매화마름 논()과 그 옆 농수로()에 물이 가득합니다수로의 물이 가득해 물꼬를 통해 들어왔는지 어느새 논에도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칩니다주로 송사리와 참붕어떡붕어를 볼 수 있습니다올챙이도 벌써 헤엄칩니다텅 빈 논에 매화마름과 친구들이 제철을 맞았습니다모내기를 하기 전까지는 천국일 것입니다.

논둑에선 유일하게 꽃이 핀 민들레가 따스한 봄날씨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흔한 민들레도 요즘은 몸에 좋은 약초로 사랑받고 있지요. 민들레 씨앗도 시장에서 본 것 같습니다. 

올 해초지리 매화마름 논은 매화마름 꽃맞이를 하며 종자를 채취하고 보전용증식용으로 사용할 계획입니다경지정리를 하면서 복토된 매화마름 논에 다시 물을 대면서 복원하는 일도 중요합니다강화도에선 논에 물만 대면 매화마름은 나와...” 라고 흔히 말씀하시지만 강화도 논이라고 다 그렇지 않습니다특별히 다른 조건이 아닌데도 매화마름이 전혀 자라지 못하는 곳도 있기 때문입니다여러 생태적 조건이나 영농조건을 고려해 매화마름이 살 수 있는 논은 어떤 논인지 연구하는 것도 진행할 계획입니다.

이 모든 일을 가능하도록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매화마름쌀을 구입해주시면 모든 수익은 매화마름 보전사업에 쓰입니다람사르습지의 매화마름쌀을 아직 맛보지 못하셨으면 꼭 한번 맛보시기 바랍니다.


매화마름 꽃논사랑 캠페인, 후원하시면 매화마름쌀을 드립니다.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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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시대에 빛나는 

우리 문화유산의 지혜


김원 | 한국내셔널트러스트 공동대표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


  서양의 유산들은 천년을 갈 기념비로 오래 지속될 목적으로 만들어지지만, 우리의 방식은 이와 다르다. 우리의 문화유산은 우람하게 지어져서 사람을 겁주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오래 지속되어서 건축가의 영광을 기리는 목적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후변화시대와 연관지어 생각해 볼 때, 건물 자체를 보존하는데 생각을 집중하기보다는 우리의 문화유산들이 얼마나 에너지 절감형이고 자연과 융화되어 있는지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기후변화 시대의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CO2가 많아져 이에 대한 대비를 어떻게 해야느냐 하는 물리적인 얘기는 우리도 물론 할 수 있다. 과학기술적으로 거론할 수 있겠지만 지금이야 말로 우리가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여러가지 지혜들을 문화재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을 교재로 활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국의 문화유산이 존경할 만한 것인가를 알려면 체험이 필요하다. 문화유산의 감동은 낮에 둘러보고 사진을 찍고 돌아와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체험으로 지내볼 수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소쇄원의 경우도 필자가 몇일을 묵으면서 체험했기 때문에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소쇄원에서 묵은 정자는 총 3칸이었는데, 세칸 건물 중에 가운데 한칸이 온돌로 되어 있었다. 봄, 여름, 가을이면 마루까지 생활공간이 늘어났다가, 추워지면 가운데 한칸에만 온돌을 데워서 문을 꽁꽁 닫고 자는 것이다. 온기를 높이는 방식도 서양처럼 라디에이터로 천장까지 덮히는게 아니라 위쪽은 차게 두고 바닥만 따끈하게 하는데, 이는 한방에서 말하는 두한족열의 방식이며 한국 건축의 지혜이다. 서양식으로 공기를 데우면 공기의 특성상 데워진 공기는 위로 올라가게 된다. 이는 불필요한 낭비가 되는 셈이다. 이를 바탕으로 필자가 건축을 할 때에도 난방을 바닥에 하여 바인더가 따뜻해지면서 나온 온기가 사람을 지나 위로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소쇄원 (사진:남준기)


  팔만대장경은 우리나라의 최고의 문화유산이다. 기계도 신통치 않고 사람도 적고 전쟁 중인데 완성한 것이니 당시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나무판을 얻기위해 오래된 나무를 켠다. 2년동안 뻘에 담가놓았다가 1년간 건조시킨다. 경전 내용을 인도, 중국에서 팔만경을 모은다. 마치 한사람이 쓴 듯 구양순 필체로 수백명이 훈련받는다. 원고를 뒤집어 붙인 후 한자씩 경판을 새긴다. 이는 실로 어마어마한 작업이다. 이런 작업을 현대에 복원한다고 해보자. 그럼 당연히 현대식 건물에 기계를 돌려서 보전할 생각을 떠올릴 것이다. 

  우리가 만일 팔백년 동안 기계를 전기로 돌린다고 생각해보라. 거기에 소요되는 에너지와 비용은 어떻겠는가. 팔만대장경은 팔백년 동안 지속적으로 같은 습도와 온도를 유지하고 있음으로 해서 그 기간동안 최소한의 유지비용으로 유산을 보전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부분이 기후변화시대에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수단 일 수도 있고 혹은 기후변화시대에 대처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일 수도 있다. 과거 팔만대장경을 옮겨서 기술을 갖춘 건물에 보관하려 했으나 그렇게 되었다면 석굴암처럼 보존되지 못했을 것이다. 옛 사람들이 당시 대기오염이나 기후변화에 대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때에도 혜안을 가지고 있었던 것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무심한 것인가. 

*해인사 팔만대장경 (사진: Joone Hur)

  우리 건축문화유산의 훌륭한 점을 궁에서 찾아보자. 이전 사람들은 나라가 힘이 없어 궁의 규모도 자금성에 비할 것 없고 보잘 것 없다고 얘기하곤 했는데 이는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철저히 주입시킨 교육이다. 중국인이 천안문 광장과 자금성을 만든 이유는 중국 황제의 위엄을 건물로 입증해 보이기 위한 목적에 있다. 즉, 사람들이 건물을 보기만 해도 엎드려 꿇어앉게 하고 압박하기 위한 것이다. 자금성은 끝도 없는 벌판을 밀고 그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런데 너무 밋밋하니 맨땅을 파서 이화원이라는 인공호수를 만들고 판 흙으로 산을 만들었다. 넓은 벌판에 세워진 궁 이라 30여번 벼락과 불이 났다고 한다. 즉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것이다. 그렇게 하 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자금이 쓰여지고, 엄청난 사람이 죽었을 것이다. 스페인 등 유럽의 엄청난 규모의 성당들도 실은 남미 원주민을 착취해서 항해로 모아놓은 막강한 자금력으로 쌓아 올린 것이다. 

*자금성 이화원의 쿠밍호는 인력으로 바닥을 파서 만든 인공호수이다. (사진: Kanegen)

  스케일이 작고 문화적으로 볼품이 없다, 라는 것에 대해 제대로 보여주고픈 마음으로 출판사를 차려 우리나라의 궁을 최고의 사진작가에게 찍게 했다. 이런 작업이 성공 하면서 늘 지나쳐보던 것을 사진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그 가치를 확인시켜준 것이 그것이다. 빌바오 미술관을 설계한 미국 최고의 건축가 프랭크 개리는 종묘를 보고 자신들이 지금까지 경험한 미의 가치에서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한다. 밸런스, 콘트라스트, 비율의 조건에 하나도 해당이 되지 않는 그저 밋밋하고 길기만 한 건물에서 한국의 미를 느꼈던 것이다.

  인도의 아잔타석굴, 돈황의 석굴은 그 규모가 대단하다. 계곡에 수백수천의 굴이 있고, 그 하나하나에 불상과 벽화, 조각이 있는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이를 보고 와서 최고의 정수로 딱 하나를 만든 것이 석굴암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묘사된 백제의 왕궁을‘儉而不陋華而不侈(검이불루 화이불치)라표현하였다.“ 궁실을 새로지었는데,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부터 인본주의적인 사상을 토대로 사람의 기를 죽이는 건축을 하지 않았다. 또한 우리나라에는 산이 많아 자연지형을 수용하는 구조물을 만들어왔다. 이 때문에 좋은 장비로 땅을 밀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최소한으로 짓고 나중에는 흙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건물을 지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건축의 특징이면서 또한 이 점이 기후변화시대에 더 돋보이는 점이다. 


*종묘의 정전

  지금의 남양주시청사, 용인시청사, 성남시청사, 용산구청은 냉난방이 많이 쓰이 는 건물로 지어놓고 전기를 아낀다고 꺼놓고 있는 실정이다. 이 얼마나 웃긴 상황인가. 프랑스의 한 아파트 단지는 공사비의 반으로 건물을 짓고 반으로 조경과 연못으로 외부환경을 꾸몄다. 아파트는 비와 추위를 피하고 잠을 자기 위해 최소한으로 짓고 아웃도어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99%로 건물을 짓는 실정이다. 

  물론 기후변화에 있어서 기술적인 접근도 필요하다. 지리산 쌍계사의 진감선사비에는 신라시대 고운 최치원의 명필이 그대로 남아있다. 최치원의 친필글 씨가 남아있는 유일한 유산이지만 수성암으로 제작되어 탄성비 등에 굉장히 취약한 돌로 제작되어있다. 그 비석은 현재 별다른 보전 방안 없이 방치되고 있었고 최근 그 상태가 급속히 나빠지면서 글자가 마모되고 있다. 이런 경우 비각을 씌운다든지 보호대책도 필요하다. 얼마전 방영한 툰드라의 다큐멘터리에 순록을 잡으면 제사를 지내는 장면이 있다. 이는 자연과 생명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고 필요한 이상으로 탐하지 않는 것이다. '스테인레스로 부식하지 않는 건물을 지어 천년을 가야한다'란 관념에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수용하는 사상'이 기후변화시대 에 필요한 것이 아닐까.


본 글은 매거진<내셔널트러스트> 18호 '집중과조명'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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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내고 땅땅거리면서 사는 나무 황목근 석송령 이야기



세금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재벌부터 부동산 투기꾼은 물론 대부분의 샐러리맨들까지 아무도 세금은 피하지 못한다. 그러나 자기 이름으로 등기된 땅을 가지고 당당히 세금내고 살아가는 고목나무가 있다.

경북 예천군 감천면 천향리에 자라는 천연기념물 294호 석송령과 같은 예천군 용궁면 금남리의 400호 황목근이 그 주인공이다. 자기 앞으로 등기된 땅을 가지고 있는 나무는 우리나라에서는 이들 둘 밖에 없다. 재산이 있으니 세금을 내는 일은 너무나 당연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황목근부터 먼저 내력을 알아본다. 김천과 영주를 잇는 경북선 열차를 타고 가다 보면 용궁이란 자그마한 시골 역을 만난다. 용궁은 바로 토끼전에 등장하는 그 용궁(龍宮)이다. 생선을 좋아하는 필자는 자라의 꾐에 빠진 토끼 신세가 될까봐 용궁에 들어서면 본능적으로 바짝 긴장한다. 나무는 철길 건너 경지정리가 잘 된 들 한 가운데의 금원마을 앞에 널찍한 터를 잡고 자란다. 나이는 약 5백년, 높이는 18미터, 줄기의 둘레는 네 아름에 둥그스름하게 잘 발달된 버섯모양을 하고 있다. 나무는 내륙지방에 흔치 않는 팽나무다. 그러나 이 나무는 팽나무란 이름보다 황목근이란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금원마을에는 오래전부터 마을 사람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풍년제를 지내기 위하여 쌀을 모아 공동의 재산을 마련하였다. 근대화가 되자 이제 공동재산을 등기부에 올려야만 하였다. 뒷날 혹시라도 재산다툼을 피하기 위하여 논란 끝에 1939년 마을 앞 당산목 팽나무 앞으로 등기를 하기로 결정했다. 팽나무라는 보통명사로는 등기가 되지 않으니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다.

팽나무가 5월에 황색 꽃을 피운다는 뜻에서 황이란 성을 따오고, 나무의 근본이란 뜻으로 목근이라는 이름을 붙여 황목근(黃木根)이라 했다. 황목근은 현재 약 2,800평의 자기 땅을 가지고 있는 알짜 땅 부자다. 토지관리 대장에 엄연한 고유번호도 가지고 있고 매년 세금도 꼬박 꼬박 낸다. 2만원에 가까운 종합토지세를 내고 있으며, 틀림없이 자진납부하는 모범 납세목(納稅木)이라고 한다. 땅을 빌려 주고 받은 소작료는 한 푼도 쓰지 않는다. 나무의 모든 몸 관리를 국가에서 해주는 탓이다. 땅 투기에 신경 쓰지 않아도 자고나면 재산이 불어나는 행복한 나무다.



 

이어서 석송령의 사연을 들어본다. 약 6백 년 전 마을 앞 석관천에서 장마 비로 떠내려 오는 어린 소나무 한 그루를 건져 마을 앞에 심는다. 오랜 세월이 흘러 나무는 이제 높이 10여m, 둘레 두 아름이 넘는 큰 나무로 자랐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들어설 즈음, 마을에 홀아비로 살던 이수목(李秀睦)이라는 사람은 전재산을 소나무에 물려주겠다고 유언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상한 유언이지만 그대로 들어주기로 한다. 석평 마을의 석(石)자를 성으로 하고‘신령스런 소나무’를 뜻하는 석송령(石松靈)이란 근사한 이름으로 등기를 했다. 지금의 석송령은 큰 길과 인접한 넓은 터를 갖고 마을 회관까지 들어서 있는 부자나무가 되었다. 지방세를 비롯한 재산세와 방위세까지 사람이 내는 세금은 제 날짜에 꼬박꼬박 내고 있다.

예천군에는 이렇게 자기 앞으로 등기된 땅을 가진 희한한 나무를 두 그루나 갖고 있어서 사람들이 흥미로워한다.




본 글은 경북대학교 박상진 교수님이 쓰실 글로, 매거진<내셔널트러스트> 21호 자연이야기에 수록된 글입니다.


- 글: 박상진ㅣ 경북대학교 교수

- 이 글은 내셔널트러스트 매거진 21호를 통해 소개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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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근대건축, 용산을 중심으로

 

그림1. 용산신학교(1892)와 성당

 

나는 지난 2009년에『서울의 근대건축』이란 제목의 도집에 감수자의 한 사람으로 관여한 바가 있다. 이 도집은 1년 이상의 준비를 거쳐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간행한 것으로, 2010년 3월에 들어서 배부하기 시작하였다.『 서울의근대건축』은서울시의문화재인번사창, 뚝도수원지제1정수장, 승동교회, 천도교중앙대교당,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 구 배재학당 동관, 구세군중앙회관, 광통관, 구 동아일보 사옥, 구 제일은행 본점을 다루며 풍부한 사진과 도면, 인터뷰 등을 수록하였다. 도집의 간행과정을 감수하면서, 각기 다른 이유로 서울의 문화재가 된 이 10개소의 근대건축을 어떤 일관된 관점으로 다루는 논문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서울의 근대사를 서술하면서 이런저런 건물이 나타났다고 건물에 관한 기술을 외삽(外揷)하는 기술방식을 취하거나 어떤 방식으로 누구에 의해서 근대건축이 유입되었는가를 찾는, 곧 출자(出自)를 묻는 기술방식을 취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근대건축 전개의 동인을 건축 안에서 찾아서 기술하기란 비교적 어려운 작업인 것 같다.


여기에서 한국근대건축의 특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이러한 특성은 한국근대건축 만의것이 아니라 식민지를 거친 여러 나라들의 근대건축이 갖는 공통된 특성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 점에서 한국근대건축사에서 용산이 차지하는 위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용산은 근대의 문명이 집중된 장소이면서 식민통치를 위하여 개발된 식민지 도시로서 한국근대건축의 특성을 집약적으로 압축하고 있다.


용산은 조선시대부터 수운(水運)이 발달하고 물산(物産)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주요한 창고와 그 관리시설들이 용산에 입지하였다. 한강변의 여러 포구 중에서 용산이 도성으로 가는 최단 거리 길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말의 개항은 용산 일대의 변화를 가져왔다. 1882년의‘조일수호조규 속약’과‘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그리고 그 후의 조약들은 양화진(楊花津)과 한양에서 외국 상인들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1883년에는 개시장(開市場)이 양화진에서 용산으로 이전하게 되어, 용산은 외국상인 진출의 교두보가 되었다. 1890년대에 들어서는 인천에서 용산까지 증기선이 운항하기 시작했다. 1898년에는 화폐를 주조하는 전환국이 인천에서 용산의 군자감으로 이전하였다. 우편과 전신도 용산에 들어와서 용산우편수취소(1899)와 용산전신수취소(1902)가 생겨났다. 1903년에는 한성전기회사 제2발전소가 청암동에 자리잡았다. 한편, 한양 도성의 남부에 살던 가톨릭교도들은 1839년의 기해박해 때 당고개(堂峴)에서 순교하였다. 지금의 신계동(新契洞)에 속하는 당고개는 서소문, 절두산, 새남터와 더불어 4대 순교성지이다. 이후 가톨릭은 지금의 원효로에 1892년에 용산신학교를 세우고 1907년에는 성당을 건립하였다. (그림 1)

 

 그림2. 용산역(1906)

그림3. 조선총독관저(1912)


용산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철도였다. 1899년 경인선 철도공사 때 한강철교 가설공사를 시작하여 1900년 7월에 완성되었다. 이와 더불어 간이 용산역이 1899년에 건립되었다. 1900년 1월에 용산과 도성을 잇는 궤도전차가 놓였다.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로 용산은 경원선과 경의선의 시발점이 되어서 한반도의 철도 중심지가 되었다. 1905년 6월에는 용산역 서쪽으로 대규모의 열차수리공장(뒤의 서울철도공작창)이 세워졌고, 1906년에는 용산역이 서양식 목조로 완성되었다. (그림 2) 1907년 12월에는 용산동인병원(뒤의 철도병원)이 설립되었고, 아울러 만주철도관리국, 철도학교, 철도사택 등도 용산에 세워졌다. 한편 1912년에는총독관저가 가타야마 도우쿠마(片山東熊)의 설계로 철도사택 북쪽에 유럽풍으로 화려하게 지어졌다. (그림 3)

 

그림4. 경성전차안내도(1929)중의 용산 일대

 

용산에는 일본인들이 19세기말부터 거주하여 지금의 원효로를 중심으로 영정(榮町, 사카에마치), 미생정(彌生町, 야요이쪼) 등의 마을을 이루고, 거류민회를 조직하였다. 거류민회는 1906년부터 일본인 거류민단으로 바뀌었고, 1903년에는 일본인만 다니는 용산공립심상소학교가 설립되었다. 일본인들이 거주하면서 용산 일대에는 학교, 사찰, 신사, 유곽 등이 들어섰다. 이후에 용산은 식민지 도시로서의 모습을 갖춰갔다. (그림 4) 한편, 1925년의 을축대홍수는 용산 일대에 피해를 주었고 주변의 하천을 정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군은 1894년 청일전쟁 때 효창원 일대를 숙영지로 삼아 기지를 두고, 만리창에 임시사령부(假司令部)를 둔 적이 있다. 이후에 1904년 러일전쟁 때 한국주차군사령부를 두면서, 일본군은 용산 일대의 300만평을 군사기지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대규모의 군사기지는 일본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1906년 4월부터 사격장, 사령부, 사령관 관저, 위수병원, 병영, 창고, 무기고, 연병장, 형무소 등 수 많은 군사관련시설이 건립되었다. 1916년부터 일본군은 한반도에 2개 사단(師團)을 상주(常駐)시켰고, 사령부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용산에 두었다. 일제는 도성의 바로 밑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철도(경의선₩경원선)를 이용하여 만주 또는 러시아 등의 국경으로 병력을 쉽게 파견할 수 있는 구상으로 용산의 군사기지를 완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용산의 군사 기지는 비단 한반도뿐만이 아니라 동아시아를 염두에 두고 건립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용산 기지는 1945년에 미군이 인계하여 지금까지도 군사기지로 사용하고 있다. 미군은 일본군의 시설을 인수하여 사용하면서 내부는 바꾸었지만 외관은 대체로 그대로 놔두었다. 붉은 벽돌로 지은 주요한 군사시설들은 앞으로 보존활용의 여부가 문제가 될 것이다. (그림 5) 아울러 방대한 면적의 용산기지는 공원화의 방향을 두고 커다란 논란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림5. 용산 북쪽기지 벽돌 건물의 일부


용산은 한국 근대의 흔적들을 간직하면서 일제시대에 형성된 도시계획의 골격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용산은 이제까지 철도기지, 군사기지로 사용되면서 서울의 성장과 발달을 차단하여 왔다. 이제 도성에서 가깝고 평탄한데다가 대규모 토지이기까지 한 용산 지역은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 용산은 그 과거의 흔적들을 어떻게 간직하고 또 지워야 할 것인가?

 

- 글: 우동선ㅣ 한국종합예술학교 건축과 교수

- 이 글은 2010년 내셔널트러스트 매거진 15호를 통해 소개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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