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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6.14 이별 그리고 엇갈린 운명의 조각들(5월 망우리 인문학 강의 후기2) (3)


오월의 마지막주 토요일, 망우리공원은 버찌가 빨강게 물들자마자 검붉게 익어가고 있었다. 화사한 꽃이 예뻤던 4월도 잠깐, 어느새 열매는 삽시간에 익는다. 망우리가 근현대 역사인물이 잠든 특성 때문일까. 계절과 시간의 변화도 그들의 삶처럼 압축되어 나타난다.


오늘은 18명의 시민들과 함께 망우리 인문학 강의를 진행한다. 간혹, 참석하신 분들의 성향이나 직업, 나이에 따라 관심을 끄는 묘역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관심이란 한 인물에 대한 존경심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상황에 따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 드러나기도 한다. 사실, 위인에 대한 신비감과 무조건적 영웅시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위인역시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고, 그들의 삶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좀 더 견고하게 개선할 책임을 느낄 필요가 있다. 이를 떠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분의 잘잘못을 섣불리 논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이다.

 

승려의 묘 옆에 부인(人)의 묘가?

망우리공원 순환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도로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묘가 올려다 보인다. 20여 미터 완만한 계단을 오르면 예상치 못했던 장면이 나타난다. 바로 승려였던 만해와 그의 부인의 봉분이다. 비석에도 만해한용운선생묘라는 표기와 부인유씨재우(夫人兪氏在右)’라고 표기돼 틀림없는 한용운 선생의 묘임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김영식 작가가 재미있는 질문을 던진다.

그럼, 한용운 선생의 묘는 둘 중에 어떤 것일까요?


참가자들은 여러 추측이 이어진다. 김영식 작가 말에 따르면, 참배객들이 엉뚱한 봉분에 헌화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결국 오른쪽이라는 것은 우리가 묘를 바라본 입장에서가 아닌, 머리를 위로하고 누운 고인의 입장에서의 방향을 뜻한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18798, 충남 홍성군 결성면에서 태어납니다. 16살이던 1894년에 돌연 출가를 하게 됐는데요. 일설에 따르면 선생의 부인의 해산을 전후로, 시장에서 미역을 사오라는 부탁을 받고 나갔다가 그 길로 출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고향땅인 홍성을 찾지 않았고, 첫 번째 부인의 소생인 아드님과 대면하기조차 꺼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김영식 작가가 출가에 뒤이어 건국훈장인 대한민국장까지 수여받은 한용운 선생의 공로를 언급하였다. 하지만 부인의 봉분과 더불어 처음 알게 된 선생의 행적에 참가자들은 뜨악한 표정들이었. 게다가 승려임에도 두 차례의 결혼 경력은 지금이나 당시에도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임에 틀림없다. 

'상남자셨구나.' 

승려신분으로 독립운동에 그리고 두 차례의 결혼을 떠올리며 참가자들 사이에 묘한 웃음과 분위기가 감지된다.

김영식 작가가 고은 시인의 한용운 평전에서 지적된 내용을 언급한다. 『…연설에 뛰어나고 지조가 강해 지도자적인 능력을 갖추었으나, 수시로 파계를 한 승려답지 않은 행동, 첫 번째 처와 아들에 대한 무정한 처사, 문학적으로 자기보다 앞선 최남선에 대한 시기심...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한용운 평전은 위인의 무조건적인 신격화 또한 우리의 눈을 가리는 행위로 경계해야 할 점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용운 선생이 총독부에 보낸 탄원서와 조선불교유신론에서는 대처의 의미를 짐작할만하다조선불교의 부흥을 위해, 승려가 거지행각을 하면서 탁발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결혼도 하고 가정도 가져 안정된 바탕에서 승려생활을 해야 불교가 발전할 수있다는 소신이었다.


만해는 기미독립운동 민족대표의 33인 중 끝내 지조를 지킨 오세창 등과는 죽을 때까지 교류하였으나, 변절한 최린, 최남선과는 상종하지 않은 것으로 전한다. 한용운이 집을 비운 사이, 최린이 찾아와 딸에게 용돈을 주고 갔는데, 그 돈을 들고 최린의 집에 찾아가 내던진 일화는 만해의 비타협적 생각을 가히 짐작할만하다.

만해는 1944년 지병인 신경통으로 와병하다가 독립을 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시신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홍제동 화장터를 피해 미아리에서 불교식으로 화장을 하고 남은 유골을 망우리 묘지에 안장했다.

 

수채화같았지만 절망적이었던 사랑

1938년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한국명 이남덕)는 미술실기 수업이 끝나고 우연히 수돗가에서 나란히 서서 그와 붓을 빨게 되었다. 조선인 학생으로 2년 선배인 그는,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운동과 노래까지 잘해 당시 여학생들의 선망이 대상이었다. 수돗가에서 붓을 빨던 일을 계기로 둘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하지만 졸업과 동시에 그는 일제가 강점하고 있던 조선땅으로 귀국해야 했다. 편지를 주고 받으며 아쉬움을 달래던 마사코는 해방이 채 되기도 전인 19454월 혈혈단신 현해탄을 건너와 5, 그의 고향인 원산에서 결혼한다. 그의 남편의 이름은 이중섭.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부산과 제주를 전전하는 궁핍한 생활 끝에 병을 얻어 두 아들과 1952년 일본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1953년 친구의 도움으로 잠시 일본에서 가족들과 해후하였으나, 일시체류 신분이기에 다시 기약없는 이별을 맞아야 했다.

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다시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일본입국 비자를 받기 위한 이중섭의 노력은 절박한 것이었다.

마사코가 일본에서 어음을 주고 사 보낸 책을 이중섭이 팔았지만, 결국 판매대금은 그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후배가 중간에서 횡령을 한거죠. 그리고 이중섭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준게 1955년 서울과 대구에서 열린 이중섭 개인전이었습니다. 전시회는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그림을 외상으로 가져가 그림값을 지불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그림을 훔쳐가는 사람도 있었던 겁니다...

처지를 딱하게 생각한 친구들이 돈을 모아 밀항선을 타기를 권했지만, 그 돈마저 어떤 시인이 며칠만 쓰고 돌려준다며 가져가 결국 받지 못했다.

김영식 작가가 말을 잇는다.


화가 이중섭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그림 황소를 보면, 석양의 붉은색을 배경으로 누런 소가 슬픈 눈으로 우는 듯 하는 모습입니다만, 그게 바로 이중섭의 모습이었을 겁니다. 황소처럼 힘세고 야성적이지만, 온순한 성격의 이중섭은 세상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 후, 이중섭의 우울증은 극에 달했다. 일본에서 온 아내의 편지는 뜯지 않았고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황달, 영양실조, 간장염이 발병하게 된다. 그리고 1956년 서대문의 서울적십자병원에서 죽은 후, 무연고자로 처리돼 있다가 사흘 만에 고향 친구인 김병기에 발견된다. 그리고 홍제동 화장장에서 화장돼 유해의 반은 망우리에, 그리고 나머지는 일본의 가족들에게 전해진다. 

 

원했던 혹은 원치 않았던 '이별'의 엇갈린 운명

오로지 그림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던 이중섭에 비해 만해는 종교와 속세를 오가며 불교개혁운동과 독립운동을 벌인다. 1952년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가족과 생이별을 겪어야 했던 이중섭에 비해, 자기의사로 속세와 이별을 결심했던 만해의 경우는 다를지 모른다. 하지만 종교에 대한 귀의와 잔인한 시대의 가슴 아픈 이별도 저마다 타고난 운명을 넘어서지 못 하는 걸까?

대향 이중섭이 잠시 일본에서의 가족과 짧은 해후이후, 가족을 만나기 위한 노력은 필사적인 것이었다. 서울과 대구에서 개최한 개인전의 실패는 그를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하였다. 그리고 절박한 상황에서 시인이었던 친구의 배신은 의지할 곳 없는 중섭을 철저히 파괴해 버렸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은 시인 구상이 이중섭의 2주기 추도기에 기고한 동아일보 기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 세상에서는 중섭이 병들어 미쳐 죽었다고도 하고 굶어 죽었다고도 하고 자살했다고도 한다. 정신병원엘 두 차례나 입원까지 하였으니 병들어 미쳐 죽은 것도 사실이요. 먹을 것을 공궤치 못했으니 굶어 죽인 것도 진상이여, 발병 1년 반 그나마 식음을 완강히 거부했으니 자살했다 하여도 무방하리라. 그러나 그를 살게 하고 죽게 한 것은 오로지 고립이었다. 중섭은 너무나 그림밖에 몰랐다. 그의 생존의 무기란 유일 그림뿐이었다...”

고뇌하는 이중섭(친구이자 화가 한묵이 그린 스케치. 1954년 스케치)


출가를 통해 세상과 이별하고, 승려의 길을 선택한 만해 한용운의 삶도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았지만, 속세와 종교 사이에서 끊임없는 번뇌가 예상된다. 이미 한 차례의 결혼 이후 출가 그리고 재결혼 등은 승려의 파계를 논할 정도로 당시 시대에서는 파격적인 행동으로 보여 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교에 귀의한 몸으로,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의 지조를 지키기란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이중섭은 그렇게 그리워하던 가족들을 살아서 만나지 못했다. 그의 무덤에 세워진 비석은 사망 1년 후, 후배 차근호가 세운 것이다. 비석 오른편에 이중섭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아들 태현(야스가타)과 태성(야스나라)의 부둥켜안은 모습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만해 한용운 선생은 승려였으나, 결국 부인과 무덤을 나란히 하게 된다.

이중섭 묘비는 그가 사망한 지, 1년 후 차근호에 의해 세워졌다.


승려로서 속세와 이별을 했던 한용운 선생, 전쟁과 가난으로 인해 가족과 원치 않는 이별을 해야 했던 화가 이중섭. 원하던 원치 않았던 두 개의 이별의 결과, 설사 다른 시대를 살아갔을 지언정 확연하게 엇갈린 운명을 확인하게 된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세속적 삶의 만남에서 두 분의 생애가 다소나마 뒤바뀌었다면 어떨까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운명은 본래 희망한대로 이뤄지지 않는 인연과 같아 손길이 닿지 않는 아득한 곳에 있다며, 이중섭 묘비의 들꽃이 고개를 떨굴 뿐이다.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소처럼 걸음을 옮기면서 안간힘을 다해 제작을 계속하고 있소...(19541121일 일본의 아내에게 보낸 이중섭의 편지중)


자료참조 '그와 나 사이를 걷다' (김영식 저/호메로스/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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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국내셔널트러스트 한국내셔널트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