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금호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사무국장)


6 인문학강의가 진행된 25일, 전국이 장마권에 들었다. 일기예보는 당일 곳에 따라 폭우를 예보하고 있었다. 기상청 예보는 행사 시작 며칠 전부터 인문학 강의의 강행과 취소 사이에서 갈등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번 6월 망우리 인문학 강의는 홍익대부속고등학교 내셔널트러스트 동아리 학생들이 참여를 신청한 상태였다. 학생들이 망우리 인문학 강의를 접할 기회가 날아가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다.

다행히 인문학 강의 당일은 간간히 비를 뿌렸다. 예보대로 폭우가 내리지 않는다면 차라리 더운 날씨보다 훨씬 괜찮은 편이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리위원회 김영식 위원장(작가)이 답사 시작에 앞서 망우리에 대해 간단히 소개했다.

장마비가 가끔 뿌리는 날씨, 청소년들까지 참여한 가운데 망우리공원 인문학강의가 시작됐다.


망우리공원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소파 방정환

참석자들 중 일부가 아직은 앳띤 청소년들이기에 망우리에서 가장 친근하게 다가 온 인물은, 단연 소파 방정환 선생인 듯 싶었다. 다른 묘역에서 보인 진지한 태도는 찾아 볼 수 없고 천진하게 장난까지 친다. 방정환 선생하면 생각나는 게 무어냐는 김영식 작가의 질문에 이들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어린이날이요.”

변성기가 지난 굵은 목소리로 어린이날을 연호하는 게 그들도 우스웠던 모양이다. 청소년들 사이에서 킥킥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직은 어린 티를 벗지 않은 청소년들이기에 소파 방정환 선생은 망우리공원에서 가장 친근한 분이다.


김영식 작가는 방정환 묘의 조성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망우리에서 가장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은 방정환의 묘는, 1931년 방정환 사망후 홍제동에서 화장후 납골당에 안치돼 있다가 1936년 망우리 이곳에 안장된 것으로 전한다. 묘비 앞면에는 선여심동(仙如心童), 무동의이린어, 묘지환정방파소라고 적혀 있는데, 청소년들은 이게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알기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김영식 작가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 방법을 설명하고 비문에 얽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글씨는 당대 명필이며 독립운동가인 위창 오세창 선생이 썼습니다. 오세창 선생은 손병희 선생과 함께 3·1운동을 주도한 33인이며, 방정환 선생은 손병희 선생의 셋째 사위입니다. 그런 인연으로 묘비를 쓰게 되었고, 묘비를 쓰신 오세창 선생도 현재 망우리 묘역에 잠들어 계십니다.”


                            

소파 방정환(1899~1931)


살아서의 인연은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는 모양이다. 소파 방정환과 인연이 있는 인물중 망우리공원에 묻힌 분이 또 계신다. 소파가 1928년 개벽사를 운영하며 주최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계기로 등장한 한국화단의 거두 이인성이었다. 소파 방정환이 부재했다면 과연 화가로서 이인성의 미래를 장담할 수 있었을까.

 

잘 알려지지 않은 소파의 연인

아동문학가나 아동을 위한 운동가로 잘 알려진 소파 방정환. 하지만 김영식 작가는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를 소개한다.

“...소파 방정환의 연인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이 잘 모릅니다. 물론 소파가 손병희 선생의 셋째 따님과 결혼 후, 알게 된 인연이었기에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돼버렸죠. 그 연인의 이름은 신준려(신줄리아, 신형숙)3·1운동 당시, 이화학당 교사로 재직하다 투옥되어 7개월간 수감생활을 하기도 한 여성입니다. 1920년 잡지 [신여자]를 기획했는데, 당시 편집의 귀재로 평판이 높던 방정환을 편집고문으로 위촉하며 사귀게 된 것입니다...”

            

아동문학가로 알려진 소파는 당대 유명 출판인이자 언론인이며 베스트셀러 잡지의 발행인이기도 하다.


당시 소파의 글에서 신준려(줄리아)는 이니셜 ‘S'로 표기돼 [개벽] 4호의 추창수필 [秋窓隨筆]에 등장한다.

...1020, 등불을 가까이하고 독보(구니키다 돗포)의 병상록을 읽다가 언뜻 S를 생각하고 한참이나 멀거니 앉아 있었다. 독보가 말한 밭 있는 곳에 반드시 사람이 살고 사람이 사는 곳에 반드시 연애가 있다라고 한 그 구절 끝에 왜 이런 구절이 없는가 한다. ‘연애가 있는 곳에 반드시 실연이 동거한다. 아아, 인정의 무상함을 지금 새로 느끼는바 아니지만, S의 사랑을 노래하는 그 입으로서 어느 때일지 실연의 애가 나오지 아니할까아아, 사람 그리운 가을 만유가 잠든 야밤에 창밖에는 불어가는 가을 소리가 처연히 들리는데 부질없는 벌레가 잠자던 나를 또 울리는 구나.

당시 소파의 나이 22세 그리고 줄리아 23세로 뜨거운 사랑을 품었던 사이였지만, 소파는 손병희의 3녀와 결혼을 하고 아들까지 둔 처지였다. 결국 두 사람의 짧고도 아쉬운 사랑은 소파의 도쿄 유학과 줄리아의 미국유학으로 영영 이루어질 수 없게 된다.

소파 사망한 후 10여년이 지난 어느 날, 아들 방운영씨는 방정환의 묘역을 참배하는 양장 차림의 여성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다가서는 운용씨에게 유족인지 물었고 그렇다고 대답하자, 조용히 목례를 하고 멀어져 갔다. 후에 방운용씨는 방정환의 지인을 통해 인상착의를 확인하고 그녀가 바로 줄리아였음을 알게 된다.

소파의 묘비에는  '동심여선(童心如仙), 어린의동무 소파 방정환의 묘'라고 표기돼 있다.


아동문학가 이원수는 훗날 두 사람의 플라토닉한 사랑이 어린이를 위한 사랑으로 승화됐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김영식 작가는 "짧은 인생을 살다간 소파의 활동에 대해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고 어린이날을 만든 사람 혹은 아동문학가로 알고 있지만, 그는 다방면에 걸쳐 눈부신 활동을 전개했다"고 언급한다. 소파는 아동문학가 이전에 출판인이자 언론인이었으며 공전의 베스트셀러 잡지인 [학생], [신여성], [혜성], [개벽], [별건곤]등에 발행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소파가 선택한 새로운 사랑

소파가 출판인이자 언론인으로 눈부시게 활약을 펼쳤다지만 묘비에 새겨진 대로 방정환은 어린이의 동무이다. 때문에 성인 누구나 어린시절을 지나왔기에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망우리공원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은 단연 소파 방정환 선생이십니다. 종래 애들’, ‘애놈등으로 불리던 것을 1920[개벽]지에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192251어린이의 날을 발기 선포도 하셨고, 번안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발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1923년 개벽사에서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합니다. 잡지 [어린이]를 통해서 일본노래와 어른들 민요밖에 없던 시절, 동요운동도 벌이셨습니다. 당시 어린이에 노랫말을 기고한 어린이들 중, 이후 아동문학가나 시인으로 성장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소파가 발행한 잡지 [어린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아동문학가와 시인으로 성장했다.


김영식 작가의 말대로 [오빠생각]은 최순애가 11세에 [고향의 봄]15세의 이원수가 어린이에 응모해서 선정된 노랫말이다. 마산소년 이원수와 수원소녀 최순애는 어린이를 계기로 펜팔친구가 되었고, 서로 얼굴도 모르면서 결혼약속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펜팔한 지, 7년 후 수원역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이원수는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원수가 독서회를 통해 불온한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구속돼 1년간 복역을 했기 때문이었다. 최순애의 집안에서도 이원수와의 결혼을 반대하며 다른 혼처를 권했으나 그녀는 완강히 거부한다. 그리고 이원수가 석방되자마자 바로 결혼식을 치르게 된다.

      

[오빠생각]은 최순애가 11세에 [고향의 봄]은 15세의 이원수가 어린이에 응모해서 선정된 노랫말이다. 

둘은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성공한다. 


이밖에도 윤극영의 [설날][반달]을 비롯해, [고드름(유지영 작)], [따오기(한정동 작)], [봄편지(서덕출)]등도 모두 어린이를 통해 세상에 나와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다.

일제강점기 암울한 상황에서 어린이를 위한 잡지 간행이 순조로울 수만은 없었다. 소파는 기성세대의 변절, 무기력, 분열, 좌절감 등을 신세대에 대한 기대로 전환했다. 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소파는 어린이를 장차 조선독립의 역군이 될 인재를 키우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잡지 [어린이]는 일제의 검열에 걸려 기사가 삭제되는 일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그때마다 소파는 경찰서를 들락거려야 했고요. [왜정인물 1]에는 일본 경찰이 작성한 방정환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손병희의 3()용화의 남편이고 천도교이 중요임무를 전담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그리고 키는 52촌에 둥근 얼굴이고, 까만 피부에 비만이라는 기록까지 나오는데,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고 불온한 행동을 할 우려가 있음이라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소파 방정환 선생은 동화구연가로도 유명하다.

이화여자보통학교에서 전교 학생들에게 산드룡(신데렐라의 불어 발음)’을 이야기할 때, 학생들은 눈물이 줄줄 흘러 저고리에 비 오듯 하는 걸 씻지도 않고 들을 정도였고, 교사들마저 눈물을 훔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신데렐라가 의붓어머니에게 두들겨 맞는 구절에 이르자 여학생들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상갓집 같이 일제히 통곡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방정환 선생과 함께 아동문학가로 활동했던 후배 최신복 선생에 따르면, 소파의 강연회에 입회했던 순사가 소파의 강연에 감동해 눈물을 참지 못하고 방정환을 선생으로 모실 정도였다고 합니다.

망우리공원 인문학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그와 나 사이를 걷다'의 저자 김영식 작가


김영식 작가가 언급한 최신복 선생은 동아일보사 수원지국 기자에서 소파의 부탁을 받고 1929년 개벽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훗날 무덤도 없이 홍제동 납골당에 안치된 소파의 유골을 윤석중, 마해송 등과 함께 지금의 망우리공원에 모신다. 그 역시 194538세의 젊은 나이에 소파와 마찬가지로 과로로 유명을 달리 하는데, 방정환의 곁에 묻어 달라 유언했다. 최신복은 그가 죽기 전, 1939년 부친이 사망하자 수원의 선산을 놔두고 망우리공원 소파의 아래쪽에 묘를 썼다. 소파를 더 자주 찾아뵙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1942년 모친이 사망하자 역시 망우리공원 조부의 곁에 안장하였고, 자신의 갓난아기가 죽자 그 곁에 묻은 것으로 전한다. 이로써 소파를 존경했던 최신복으로 인해 3대가 망우리공원 소파의 묘 근처에 잠들게 된다.

소파가 사망한 것은 1931년이었다. 그는 각종 강연, 어린이 관련 행사기획, 집필, 잡지 간행 등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던 중 과로로 쓰러진다. 고혈압에 신장염이었으나 당시 의료기술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지는 못했다. 김영식 작가는 병상의 소파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어린이들을 잘 부탁한다.’말했다며 동화와도 같은 마지막 유언을 전했다.

여보게, 밖에 검정말이 끄는 검정 마차가 와서 검정 옷을 입은 마부가 기다리니 어서 가방을 내다주게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 남긴 것

훌륭한 인물의 업적은 인물과 업적의 내용에 가려져 그 의도나 동기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동기가 드러난다 한들, 표면적인 동기와 당사자가 결심을 품게 된 내재적 동기는 다를 수 있다.

앞서 밝혔듯이, 아동문학가 이원수 선생은 소파 방정환과 줄리아의 플라토닉한 사랑이 향후 어린이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되었다고 언급했다. 아내와 처자를 둔 소파의 처지였기에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으면서도, 두 사람 모두 해외 유학으로 관계가 정리된다. 요즘 드라마 형식을 빌리자면 불륜과 막장으로 끝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유학이 결코 자발적 결정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상상역시 과하지 않다. 하지만 이원수 선생의 말처럼 소파의 플라토닉한 사랑이 내재적 동기로 작용했고, 식민지 조국의 독립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어린이 운동 투신의 표면적 동기와 분명한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소파가 줄리아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대상을 달리할 뿐, 소파의 삶 내내 현재 진행형이었고, 모든 사랑이 그렇듯 그 완성을 갈구하게 된다. [어린이]를 통해 등단한 아동문학가 이원수와 최순애의 결혼은 소파가 사망한 지 5년 후인 1936년의 일이다. 하지만 얼굴도 서로 알지 못했고, 일제 강점기의 엄혹한 환경, 가족의 반대를 극복하고 이룬 운명같은 사랑은, 살아 생전 소파의 실천적 사랑과 무관하다 할 수 있을까.

소파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은 대상만을 달리한 채, 그의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


임종에 가까워질 때, ‘어린이들을 잘 부탁한다.’며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사랑한 대상에 대한 애틋함을 나타낸다. 죽음이란 누구도 피하지 못 할 두려움의 대상이며 생물학적 기능의 종료 상태이다. 하지만 소파였기에, 죽음이라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정서적으로 유약한 어린이들에게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여보게, 밖에 검정말이 끄는 검정 마차가 와서 검정 옷을 입은 마부가 기다리니 어서 가방을 내다주게

소파는 어린이들에게 말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죽음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 동화와도 같은 다른 세계 어디로 떠나가는 것이며, 마치 새로운 일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가방을 챙겨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소파가 배역에 충실한 연기자같이 검은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떠나면서 미완의 사랑은 그의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 어린이를 위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성사시키는 마침표가 찍어진 것이다.

 


망우리공원 보전 '같이가치' 모금 참여하기: https://together.kakao.com/fundraisings/24277


자료참조 '그와 나 사이를 걷다' (김영식 저/호메로스/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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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마지막주 토요일, 망우리공원은 버찌가 빨강게 물들자마자 검붉게 익어가고 있었다. 화사한 꽃이 예뻤던 4월도 잠깐, 어느새 열매는 삽시간에 익는다. 망우리가 근현대 역사인물이 잠든 특성 때문일까. 계절과 시간의 변화도 그들의 삶처럼 압축되어 나타난다.


오늘은 18명의 시민들과 함께 망우리 인문학 강의를 진행한다. 간혹, 참석하신 분들의 성향이나 직업, 나이에 따라 관심을 끄는 묘역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관심이란 한 인물에 대한 존경심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상황에 따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 드러나기도 한다. 사실, 위인에 대한 신비감과 무조건적 영웅시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위인역시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고, 그들의 삶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좀 더 견고하게 개선할 책임을 느낄 필요가 있다. 이를 떠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분의 잘잘못을 섣불리 논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이다.

 

승려의 묘 옆에 부인(人)의 묘가?

망우리공원 순환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도로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묘가 올려다 보인다. 20여 미터 완만한 계단을 오르면 예상치 못했던 장면이 나타난다. 바로 승려였던 만해와 그의 부인의 봉분이다. 비석에도 만해한용운선생묘라는 표기와 부인유씨재우(夫人兪氏在右)’라고 표기돼 틀림없는 한용운 선생의 묘임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김영식 작가가 재미있는 질문을 던진다.

그럼, 한용운 선생의 묘는 둘 중에 어떤 것일까요?


참가자들은 여러 추측이 이어진다. 김영식 작가 말에 따르면, 참배객들이 엉뚱한 봉분에 헌화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결국 오른쪽이라는 것은 우리가 묘를 바라본 입장에서가 아닌, 머리를 위로하고 누운 고인의 입장에서의 방향을 뜻한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18798, 충남 홍성군 결성면에서 태어납니다. 16살이던 1894년에 돌연 출가를 하게 됐는데요. 일설에 따르면 선생의 부인의 해산을 전후로, 시장에서 미역을 사오라는 부탁을 받고 나갔다가 그 길로 출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고향땅인 홍성을 찾지 않았고, 첫 번째 부인의 소생인 아드님과 대면하기조차 꺼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김영식 작가가 출가에 뒤이어 건국훈장인 대한민국장까지 수여받은 한용운 선생의 공로를 언급하였다. 하지만 부인의 봉분과 더불어 처음 알게 된 선생의 행적에 참가자들은 뜨악한 표정들이었. 게다가 승려임에도 두 차례의 결혼 경력은 지금이나 당시에도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임에 틀림없다. 

'상남자셨구나.' 

승려신분으로 독립운동에 그리고 두 차례의 결혼을 떠올리며 참가자들 사이에 묘한 웃음과 분위기가 감지된다.

김영식 작가가 고은 시인의 한용운 평전에서 지적된 내용을 언급한다. 『…연설에 뛰어나고 지조가 강해 지도자적인 능력을 갖추었으나, 수시로 파계를 한 승려답지 않은 행동, 첫 번째 처와 아들에 대한 무정한 처사, 문학적으로 자기보다 앞선 최남선에 대한 시기심...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한용운 평전은 위인의 무조건적인 신격화 또한 우리의 눈을 가리는 행위로 경계해야 할 점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용운 선생이 총독부에 보낸 탄원서와 조선불교유신론에서는 대처의 의미를 짐작할만하다조선불교의 부흥을 위해, 승려가 거지행각을 하면서 탁발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결혼도 하고 가정도 가져 안정된 바탕에서 승려생활을 해야 불교가 발전할 수있다는 소신이었다.


만해는 기미독립운동 민족대표의 33인 중 끝내 지조를 지킨 오세창 등과는 죽을 때까지 교류하였으나, 변절한 최린, 최남선과는 상종하지 않은 것으로 전한다. 한용운이 집을 비운 사이, 최린이 찾아와 딸에게 용돈을 주고 갔는데, 그 돈을 들고 최린의 집에 찾아가 내던진 일화는 만해의 비타협적 생각을 가히 짐작할만하다.

만해는 1944년 지병인 신경통으로 와병하다가 독립을 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시신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홍제동 화장터를 피해 미아리에서 불교식으로 화장을 하고 남은 유골을 망우리 묘지에 안장했다.

 

수채화같았지만 절망적이었던 사랑

1938년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한국명 이남덕)는 미술실기 수업이 끝나고 우연히 수돗가에서 나란히 서서 그와 붓을 빨게 되었다. 조선인 학생으로 2년 선배인 그는,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운동과 노래까지 잘해 당시 여학생들의 선망이 대상이었다. 수돗가에서 붓을 빨던 일을 계기로 둘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하지만 졸업과 동시에 그는 일제가 강점하고 있던 조선땅으로 귀국해야 했다. 편지를 주고 받으며 아쉬움을 달래던 마사코는 해방이 채 되기도 전인 19454월 혈혈단신 현해탄을 건너와 5, 그의 고향인 원산에서 결혼한다. 그의 남편의 이름은 이중섭.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부산과 제주를 전전하는 궁핍한 생활 끝에 병을 얻어 두 아들과 1952년 일본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1953년 친구의 도움으로 잠시 일본에서 가족들과 해후하였으나, 일시체류 신분이기에 다시 기약없는 이별을 맞아야 했다.

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다시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일본입국 비자를 받기 위한 이중섭의 노력은 절박한 것이었다.

마사코가 일본에서 어음을 주고 사 보낸 책을 이중섭이 팔았지만, 결국 판매대금은 그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후배가 중간에서 횡령을 한거죠. 그리고 이중섭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준게 1955년 서울과 대구에서 열린 이중섭 개인전이었습니다. 전시회는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그림을 외상으로 가져가 그림값을 지불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그림을 훔쳐가는 사람도 있었던 겁니다...

처지를 딱하게 생각한 친구들이 돈을 모아 밀항선을 타기를 권했지만, 그 돈마저 어떤 시인이 며칠만 쓰고 돌려준다며 가져가 결국 받지 못했다.

김영식 작가가 말을 잇는다.


화가 이중섭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그림 황소를 보면, 석양의 붉은색을 배경으로 누런 소가 슬픈 눈으로 우는 듯 하는 모습입니다만, 그게 바로 이중섭의 모습이었을 겁니다. 황소처럼 힘세고 야성적이지만, 온순한 성격의 이중섭은 세상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 후, 이중섭의 우울증은 극에 달했다. 일본에서 온 아내의 편지는 뜯지 않았고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황달, 영양실조, 간장염이 발병하게 된다. 그리고 1956년 서대문의 서울적십자병원에서 죽은 후, 무연고자로 처리돼 있다가 사흘 만에 고향 친구인 김병기에 발견된다. 그리고 홍제동 화장장에서 화장돼 유해의 반은 망우리에, 그리고 나머지는 일본의 가족들에게 전해진다. 

 

원했던 혹은 원치 않았던 '이별'의 엇갈린 운명

오로지 그림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던 이중섭에 비해 만해는 종교와 속세를 오가며 불교개혁운동과 독립운동을 벌인다. 1952년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가족과 생이별을 겪어야 했던 이중섭에 비해, 자기의사로 속세와 이별을 결심했던 만해의 경우는 다를지 모른다. 하지만 종교에 대한 귀의와 잔인한 시대의 가슴 아픈 이별도 저마다 타고난 운명을 넘어서지 못 하는 걸까?

대향 이중섭이 잠시 일본에서의 가족과 짧은 해후이후, 가족을 만나기 위한 노력은 필사적인 것이었다. 서울과 대구에서 개최한 개인전의 실패는 그를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하였다. 그리고 절박한 상황에서 시인이었던 친구의 배신은 의지할 곳 없는 중섭을 철저히 파괴해 버렸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은 시인 구상이 이중섭의 2주기 추도기에 기고한 동아일보 기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 세상에서는 중섭이 병들어 미쳐 죽었다고도 하고 굶어 죽었다고도 하고 자살했다고도 한다. 정신병원엘 두 차례나 입원까지 하였으니 병들어 미쳐 죽은 것도 사실이요. 먹을 것을 공궤치 못했으니 굶어 죽인 것도 진상이여, 발병 1년 반 그나마 식음을 완강히 거부했으니 자살했다 하여도 무방하리라. 그러나 그를 살게 하고 죽게 한 것은 오로지 고립이었다. 중섭은 너무나 그림밖에 몰랐다. 그의 생존의 무기란 유일 그림뿐이었다...”

고뇌하는 이중섭(친구이자 화가 한묵이 그린 스케치. 1954년 스케치)


출가를 통해 세상과 이별하고, 승려의 길을 선택한 만해 한용운의 삶도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았지만, 속세와 종교 사이에서 끊임없는 번뇌가 예상된다. 이미 한 차례의 결혼 이후 출가 그리고 재결혼 등은 승려의 파계를 논할 정도로 당시 시대에서는 파격적인 행동으로 보여 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교에 귀의한 몸으로,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의 지조를 지키기란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이중섭은 그렇게 그리워하던 가족들을 살아서 만나지 못했다. 그의 무덤에 세워진 비석은 사망 1년 후, 후배 차근호가 세운 것이다. 비석 오른편에 이중섭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아들 태현(야스가타)과 태성(야스나라)의 부둥켜안은 모습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만해 한용운 선생은 승려였으나, 결국 부인과 무덤을 나란히 하게 된다.

이중섭 묘비는 그가 사망한 지, 1년 후 차근호에 의해 세워졌다.


승려로서 속세와 이별을 했던 한용운 선생, 전쟁과 가난으로 인해 가족과 원치 않는 이별을 해야 했던 화가 이중섭. 원하던 원치 않았던 두 개의 이별의 결과, 설사 다른 시대를 살아갔을 지언정 확연하게 엇갈린 운명을 확인하게 된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세속적 삶의 만남에서 두 분의 생애가 다소나마 뒤바뀌었다면 어떨까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운명은 본래 희망한대로 이뤄지지 않는 인연과 같아 손길이 닿지 않는 아득한 곳에 있다며, 이중섭 묘비의 들꽃이 고개를 떨굴 뿐이다.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소처럼 걸음을 옮기면서 안간힘을 다해 제작을 계속하고 있소...(19541121일 일본의 아내에게 보낸 이중섭의 편지중)


자료참조 '그와 나 사이를 걷다' (김영식 저/호메로스/2015)

6월 망우리공원 인문학강의 신청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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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금호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사무국장


삶과 죽음 그리고 세대를 가르는 경계, 망우리.

젊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지명이고 30대 중 후반, 그러니까 80년대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공동묘지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망우리. 망우리는 그렇게 삶과 죽음을 나누는 장소이자 특정 세대를 가르는 경계이기도 하다. 근심을 잊는다는 뜻의 망우(忘憂)라는 지명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연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양에 새롭게 도읍을 세운 태조가 지금의 건원릉(구리시 인창동 소재)에 자신의 묘를 정하고 환궁하던 중, 이 고갯마루에서 이제야 오랜 근심을 잊겠다(忘憂)’고 말한 것이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여부를 떠나, 태조의 건원릉이 위치한 동구릉과 직선거리로 2km 남짓한 거리에 위치해 있어 망우리는 세인들이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1914년 일제가 단행한 행정구역 변경 이전만 하더라도 망우리(忘憂里)는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忘憂里面)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하사한 지명 그리고 인근의 동구릉과의 위치 등을 고려할 때 행정구역의 격이 그만큼 높았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일제는 양주군 구지면(九旨面)와 망우리면(忘憂里面)자를 따서 구리(九里)로 병합시킨다. 그리고 망우리면(忘憂里面)의 잔여 지역을 리() 단위인 현재의 망우리(忘憂里)로 귀속한다. 사실상 행정구역의 지위에서 강등당한 셈이다. 망우리의 수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일제는 경성의 묘지가 부족하자 1933년 망우리를 공동묘지로 조성하게 된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과 동구릉이 조성된 산줄기에 평민의 공동묘지를 만든 의도를 짐작 못할 바 아니다.

 

품위를 잃은 장소와 가치가 떨어진 인간의 공존

그 후, 정확히 40년 동안 공동묘지로 매장이 이루어졌던 망우리. 이제 사람들의 기억 속에 품위 있던 장소는 죽음과 어둠의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당시 대학생들이 미팅에서 망우리에 산다고 말하면 퇴짜 맞을 정도였다. 특히 60년대 70년대 산업화의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망우리는 원해서도 가고 원치 않아도 갈 수 있는 슬프고도 두려운 공간이었다.

오죽하면 동대문에서 망우리로 가는 시내버스 여차장이 청량리중량교망우리가요~” 라고 속사포 랩으로 행선지를 외치면, 사람들에게 환청처럼 다른 외침으로 들리기도 했다.

차라리죽으려고망우리가요~'

품위를 잃은 장소와 가치가 떨어진 인간이 시대를 공존하며 무수한 사연과 애환을 만들어 낸 곳. 망우리 인문학 강의는 차라리 죽으려 망우리행 버스에 몸을 싣는 것이다. 코트 주머니에 소주병을 꽂은 채 몸을 휘청거리며 지난시절 누군가 버스에 올랐던 것처럼, 현재의 나를 그곳에 묻기도 하고 삶을 물으러 떠나는 길이다.

 

망우리 인문학 강의를 열다.

4월 망우리 인문학 강의는 강남시문학회 회원을 비롯해 27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30일 진행됐다. 인문학강의는 망우리 근현대 역사인물의 묘역을 순례하며 그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세상과 사람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되짚어 보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결정적인 삶의 순간에 나를 대입해 시간과 공간 그리고 나와 그의 벽을 허무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다. 인문학 강의코스는 주로 이인성(화가)-도산 안창호(독립운동가)-태허 유상규(의사/독립운동가)-아사카와 다쿠미(총독부 산림청 직원/민예학자)-혜관 오긍선(의사/사회사업가)-소파 방정환(아동문학가)-최신복(아동문학가)-위창 오세창(서화가)-만해 한용운(독립운동가)-죽산 조봉암(독립운동가/정치가)-남파 박찬익(독립운동가)-최학송(문학인)-계영묵(문학인)-대향 이중섭(화가)-박인환(시인) 순으로 진행된다. 본 코스는 서울시가 현재 조성하고 있는 인문학길의 코스와 일치한다. 하지만 매번 동일한 코스와 인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와 참여자들의 관심도에 따라 코스 일부가 추가되거나 변경되기도 한다. 강의 일정은 상반기 5월과 6월 마지막주 토요일에 강의를 열게 된다.

인문학 강의의 강사는 망우리 근현대사 인물 소개서인 그와 나 사이를 걷다의 저자이자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리분과위원장인 김영식 작가가 진행한다.

             

그는 부산 출생이지만 4살 때 상경하여 망우리공원과 가까운 중랑구 중화동과 상봉동에서 대학 때까지 살았다. 2006년부터 일주일에 한 번꼴로 현재까지 500회 이상 망우리공원을 오르내리며 무덤의 비명과 근현대 인물들의 삶을 조명하였다.

 

조선이 낳은 비운의 천재화가 이인성

4월 망우리 인문학 강의에서 가장 주목받은 인물 중 한 사람이 바로 화가 이인성이다. 김영식 작가의 소개에 따르면, 화가 이인성은 1930년대 마라톤 영웅 손기정과 무용가 최승희만큼 유명한 존재였던 모양이다. 당시 어른들은 그림 그리는 아이에게 커서 이인성 될거냐?”라고 농담을 건넬 정도였다고 한다. 1912년 대구에서 출생한 이인성은 1928(17)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서 촌락의 풍경이라는 작품으로 특선을 차지하며 주목을 받게 된다. ‘세계아동예술전람회는 소파 방정환등이 운영하는 개벽사가 주최한 것인데, 어떤 면에서는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 이인성의 천재성을 발굴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타계한 지 20년 가까이 차이가 남에도, 방정환과 이인성은 모두 망우리공원에 잠들면서 사후까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화가를 환쟁이라고 천대하던 시절, 1929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계기로 이인성은 집안의 반대를 극복하고 당당히 소년 천재화가로 주목받는다. 그 후 2년에 걸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과 특선을 수상하게 되고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1932년 이인성 화가가 19세 되던 해,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일본 화가들을 제치고 입선을 거머쥔다. 이 일을 두고 김영식 작가는 김연아가 피겨 스케이팅에서 올림픽 금매달을 차지한 것과 같은 역사적 사건이라고 언급하였다.

일본 유학시절 만난 부인 김옥순은 학력이 일천한 이인성과 집안의 반대로 어렵게 결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1924년 부인이 결핵으로 짧은 생을 마치면서 실의에 빠진 이인성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된다. 걸핏하면 폭음과 주사(酒邪)를 일삼았던 것이다. 두 번째 결혼마저 실패하고 세 번째 결혼까지 치루지만, 1950년 어이없는 사고로 죽음을 당한다. 김영식 작가는 그 당시의 상황을 눈앞에 그려내듯 설명했다.

6·25 전쟁으로 어수선한 상황에 경찰의 불심검문이 수시로 이뤄지는 분위기였겠죠. 화가 이인성이 술에 취한 채, 거리를 걷다가 행색을 수상하게 여긴 경찰관에게 붙들린 거예요. 그런데 이인성이 술도 마셨겠다, 경찰관에게 다짜고짜 조선의 천재 이인성을 몰라보느냐.”고 호통을 친 겁니다. 주눅이든 경찰관이 이인성을 놔주고 경찰서로 돌아와 도대체 이인성이 누구냐?”고 물었겠죠. 그러자 주변에서 그 동네에 술주정뱅이 환쟁이가 있지...”라는 말을 들으니, 한낱 환쟁이에게 당한 일이 화가 난겁니다. 그래서 총을 소지하고 이인성의 집으로 찾아가 말다툼과 몸싸움을 벌이다가 실탄이 발사된 거죠. 결국 그 일로 이인성이 숨지고 맙니다. 그의 나이 38살이었습니다.

황당하기까지 한 조선의 천재 이인성의 죽음에 이르러 참가자들이 하는 탄식과 실소 그리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깊은 상실의 시대를 살다 간 시인 박인환

4월 인문학 강의에서 관심을 끌었던 다른 인물이 있다면, 코스의 마지막 묘역에서 만나는 시인 박인환이다. 아마도 단체로 참가신청을 하신 분들이 시문학회 회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화가 이중섭의 묘역에서 강의를 마치고 망우리 관리사무소 쪽으로 이동하다 보면, 오른편에 박인환의 연보비가 나타난다. 비석에는 그의 시 목마와 숙녀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비석의 맞은편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자 김영식 작가가 스마트폰에 저장된 노래를 틀었다. 박인희가 부른 세월이 가면이었다. 이 노래 가사도 명동의 선술집에서 박인환이 즉흥적으로 시를 짓고 이진섭이 곡을 붙여 그 자리에서 나애심이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진다.)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시()였다. 박인환의 묘 앞, 사각형의 묘비에도 시인 박인환의 묘라 적혀있고 그 밑으로 세월이 가면의 첫 문장이 새겨져 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이 시를 짓기 하루 전, 박인환은 첫 사랑이 묻혀 있는 망우리 묘지에 다녀갔다고 김영식 작가는 설명한다. 평소 술을 좋아했던 그였기에, 코트 주머니에 소주병을 꽂은 채 몸을 휘청거리며 망우리행 버스에 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유작시 세월이 가면을 완성한 사흘 후인 1956320, 만취한 채 집에 들어와 잠을 자다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31. 세탁소에 맡긴 봄 코트는 돈이 없어 찾지 못했고, 겨울 코트를 그대로 입은 채였다. 부음을 듣고 맨 먼저 달려온 친구 송지영이 박인환의 뜬 눈을 감겨주었다.

박인환의 또 다른 시 목마와 숙녀에 대한 김영식 작가의 설명이 이어진다. “도대체 목마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그리고 우연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된 고대 무덤의 부장품인 목마를 본 경험담 그리고 순명효 황후 장례행렬 사진 속에서 종이로 만든 백마를 통해 죽음의 동반자임을 설명했다. 고급진 문장과 달달한 시어(詩語)의 느낌과 달리 1950년대 전쟁의 비극과 죽음, 이별, 허무 등의 시대적 고뇌를 박인환의 탁월한 언어적 감수성을 통해 시로 형상화된 것이다.

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시에 사용된 박인환의 세련된 수사와 평소 그의 행색 등으로 인해 남성을 대표하는 속물로 문단의 비난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전쟁의 참혹한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현실인식이 강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덧붙였다.

그러한 이유에서 일까?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에 대한 오해는 필자의 고교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목마와 숙녀는 시화전의 단골 주제였고 교실마다 한 점씩 걸리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박인환이 작사한 세월이 가면을 부른 가수 박인희의 시낭송 음반도 유행이었다. 모국어지만 낭독하면 혀끝에서 감미롭게 굴려지는 시어(詩語)들이 마치 유창한 외국어를 구사하는 듯 했다. 알 듯 모를 듯 낭만적인 언어들은 지적 허영심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잠자리 뿔테안경을 쓴 친구가 같은 반에 늘 한 명쯤 있기 마련이다. 까칠하기로 유명한 국어선생님 수업시간에 이 친구가 목마와 숙녀의 시낭송을 자원했다. 목소리가 좋았던 친구는 자신의 낭송에 점점 도취돼 가는 듯 했다. 그렇게 시낭송이 끝났다. 선생님의 얼굴에 비웃음 혹은 경멸의 빛이 스쳐 지났다.

이 시가 그렇게 낭만적으로 읽히든?”

 

상실의 두 빛깔

4월 망우리 인문학 강의에서 관심을 가진 두 인물은 공교롭게도 '상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인성은 1942년 아내 김순옥의 사망으로 실의에 빠진다. 절망의 시간을 술로 보내던 화가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준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 최고의 화가라는 타이틀이었을 것이다. 술로 인해 타인과의 불화가 이어지고 괴팍한 성격에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수록, ‘조선의 천재 이인성이라는 변할 수 없는 사실에 집착했을 법하다. 오로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건 '영광스러운 과거' 밖에 없었던 가난한 현실이, 그를 비극적 운명으로 몰고가지 않았을까.

목마와 숙녀에서 시인 박인환은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라면서 2차 대전 후, 허무주의에 시달리다가 템즈강에 투신 자살한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상실을 추모한다. 그리고 6·25 전쟁 이후의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는’ 현실 속 상실감을 토로한다. 어쩌면 시인 박인환의 상실감은 뿌리 깊은 것인지도 모른다. 앞서 밝힌 것처럼 이미 20대에 첫사랑을 잃었고, 그 역시 세상과 작별하기 나흘 전, 망우리에 묻힌 첫사랑을 찾는다. 그녀의 묘를 찾은 다음날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가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처럼 보여지지 않는다.  '목마와 숙녀' 역시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인해, 시인 박인환이 지병처럼 앓고 있던 세상에 대한 상실감을 버지니아 울프의 죽음에 투영시킨 건 아닐까.   

인문학 강의의 마지막 코스인 박인환 시인의 묘역에 앉아 그와 이인성이 겪은 상실감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게 나라면?’이라 자문해 본다. 나역시 그들보다 뛰어난 인내와 처세를 발휘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30대에 요절한 두 천재들의 삶을 무어라 평가할 수 있을까? 하지만 누구도 타인의 삶을 평가할 자격은 없다. 살아있는 사람이 목마를 타고 떠난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럴 수 있겠다공감하며 그들의 삶에 고개 끄덕여 주는 것밖에.


자료참조 '그와 나 사이를 걷다' (김영식 저/호메로스/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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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없는 목소리만 믿고 움직여야 했던 함평 임야의 기증

1월초, 전남 함평 소재의 임야와 토지를 기증하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당시 기부의사를 짤막하게 밝힐 때만 해도 사실, 성사될지 의심스러웠다. 적어도 자신의 자산을 기증한다면, 만날 약속을 정하거나 아니면 방문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증대상인 임야와 토지가 가족 공동소유라 했다. 가족들이 공동으로 소유한 상속자산은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고, 누구 한사람이라도 반대하면 기증은 불가능하게 된다. 최대한 성의를 다해 기증의 절차를 설명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어렵겠다’ 는 회의감이 밀려왔다. 전화를 걸어 온 이 남성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어쩌면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사람이거나 다소 치기에 휩싸인 상태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이 남성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기증에 대해 가족들 모두의 동의를 얻었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 기증하면 영구보전이 가능한 지 재차 물어왔다. 현재 보전상태를 확인한 후, 결정할 수 있다고 전과 동일한 답변을 드렸다. 그러자 그는 확인해 줄 수 있냐고 했다. 조용한 말투였지만 서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전화상으로 통성명만 했을 뿐, 한 번도 본적 없는 사람의 말만 믿고 함평까지 내려가는 길은 불안과 공허감이 꼬리를 물었다. 게다가 혼자만의 답사가 아닌, 운영위원장님을 비롯해 숲 전문가들까지 대동하는 터라 부담이 더했다. 약속이 어긋나기라도 한다면 사리분별도 못하는 실없는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8시간이 넘도록 바쁜 분들을 고속도로에 묶어 놓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미래를 위해 새로운 가능성에 기대를 걸다

비록 전화상의 약속이었으나, 대상지역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는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임야의 면적은 67,835(20,550)로 필지의 최정상부는 해발 310m의 높이에 위치해 있다. 멀리 함평 앞바다의 풍경이 내려다보이고 선산으로 이용했다는 말처럼 볕이 좋은 남향이었다. 임야의 일부가 선산으로 이용된 흔적도 보이지만 묘는 모두 이장된 상태였다. 임야의 식생은 주로 소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그 외 사스레나무, 송악, 비목, 감태나무, 춘란 등 난대 식물들도 넓게 분포했다

이병천(산과자연의친구 우이령사람들)회장님은 과거 편백나무로 수종갱신을 시도했다가 화강암 지반 탓에 실패한 지역이라고 설명하셨다회장님의 말대로임야 곳곳에 유려한 모양의 화강암 바위들이 넓게 펼쳐져 숲의 운치를 더하고 있었다일반적인 산지의 나무와 달리화강암반에 뿌리내린 소나무들은 몸통과 줄기가 휘어지고 얽혀 수형이 아름다웠다.

전문가들의 평가는 현재의 숲 보전상태가 좋다는 점에 이견이 없었다. 그리고 당장 이용이 불가능하더라도 미래의 활용가치를 염두에 두자고 입을 모았다지리적으로도 영광과 무안사이에 위치하면서 서해안을 끼고 있어 생태적 주제가 풍부한 곳이라는 장점도 언급됐다향후 내셔널트러스트가 전국적으로 확산된다면 이 임야를 남부지역 현장 교육장으로 활용하기에 적합하다는 의견도 제시됐다그리고 함께 기증을 약속한 농지(총 2,427/약 735)와 연계한 생태탐방과 숲체험힐링프로그램 등 다양한 시민교육의 장으로 활용가능성도 타진하였다.


복잡하고 번거로운 기증절차를 묵묵히 감수해 주었던 가족들

2월 개최된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이사회에서 함평 임야와 농지의 수탁이 최종 승인됐다. 좋은 취지의 기증이지만 이전등기를 위해서는 복잡한 증여절차를 거쳐야 했다. 법무사가 소유권이전에 필요한 서류를 확인해 주는 며칠사이, 또 연락이 왔다. 얼굴도 모르는 이 남성은 평소처럼 조용한 목소리로, 가능한 3월 초 안에 모든 증여절차를 마무리하고 싶다고 했다. 무엇이 그리 급한 걸까? 담당 법무사를 채근해 서류준비를 준비하면서, 등기이전은 실제소유주를 모두 만나 증여의사를 확인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참 복잡한 절차가 아닐 수 없었다. 함평의 임야와 토지는 78세인 어머니와 40대의 세 자녀의 공동소유다. 함께 거주하는 것조차 불투명한 이들을, 한날한시 한곳에 모여 달라는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끼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사회에서는 좋은 일을 하면서도 감내해야 할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하지만 기증하겠다고 밝힌 남성은 여러 가지 복잡한 서류와 가족들의 면담에 불편한 내색조차 드러내지 않았다전화상의 늘 평온한 목소리 그대로 어려운 부탁을 받아들였다.


믿으니까요(Trust), 믿으니까 할 수 있었던 겁니다

기증의사를 밝힌 얼굴도 모르는 남성과 그 가족들을 만나는 날. 소유권 이전등기를 위해 법무사님을 대동한 자리에 맏형을 제외한 가족 세분을 만날 수 있었다. 어느 가족이나 서로 비슷한 이미지와 분위기를 갖기 마련인데, 모두 순하고 반듯한 인상이었다. 특히 어머님은 80을 앞둔 나이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전화상의 목소리만 들었던 이모씨(44)를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눴다. 그는 형제들 중 막내였다.

법무사님이 함평 임야와 토지의 이전에 대한 동의여부를 확인하는 것을 시작으로 각종 서류에 날인이 이루어졌다. 가족들은 도장을 내주며 조용히 날인된 서류를 돌려보았다. 서류의 날인이 끝나고 소유권 이전 절차에 대한 설명이 진행됐다. 그리고 비로소 기증한 자산을 단체가 영원히 보전하겠다는 협약서의 내용을 설명하고 가족 모두의 날인이 이뤄졌다.

날인이 끝난 후,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일을 하셨으니 이번 기증에 대해서 가족들의 이름과 얼굴이라도 알리고 싶다는 바람을 말씀드렸다그러자 가족 모두 수줍은 듯 웃었고이씨의 누나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사실상 이번 기증에 대해 사진 한 장 이름 석 자도 남기지 않겠다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태도였다짧은 순간, 가족들 사이에 흐르고 있는 세상에 대한 공통된 이해와 서로간의 신뢰를 느낄수 있었다그 견고한 유대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처럼 여겨졌다

막내 이씨가 나직하게 말했다가족들의 이름과 얼굴이 공개되길 원치 않으며그 외 드러난 사실관계만을 알려주길 희망한다는 내용이었다이씨의 누나는 오히려, 이런 기회를 제공한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게 감사드린다고 전했다어머니는 자녀들의 고조부부터 잠들었던 곳이라 100년 가까이 집안 대대로 상속되었던가족들에게 의미있는 장소라고 말씀하셨다현재 묘는 모두 이장됐으나, 이곳의 처분이 자손으로서 도리가 아님에 가족 모두 공감했다 덧붙이셨다그리고 기증한 것이 오히려 흡족하며처음 마음 그대로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영원히 보전해 주길 당부하셨다막내 이씨는 그 자리에 없던 맏형의 이야기도 전했다맏형은 한국내셔널트러스트로부터 전달받은 기증협약서를 읽어본 후기증을 결정한 건 참 잘한 일이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쉽지 않은 결정을 해주신 가족들에게 감사를 드렸을 때막내 이씨의 말이 각자(刻字)처럼 마음속에 한 글자씩 새겨진다.

믿으니까요(Trust), 믿으니까 할 수 있었던 겁니다.”



가족간 유산을 둘러싼 분쟁은 우리현실에서 흔한 일이다그럼에도 이씨 가족들이 살아온 삶 속에서 어떤 계기 혹은 가치가 서로간의 견고한 결속을 이루었는지 궁금했다하지만 현재 이들 사이에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교감이, 어쩌면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안으며 살아 온 기억의 축척일 수도 혹은 종교적 신념일 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엇이든 묻거나 건드리지 않는 것이 이 가족에 대한 예의라는 확신이 들었다다만 이씨의 누나가 막내를 가리키며 우리 동생도 과거사회를 위해 특별한 봉사활동을 했었다고 말해 궁금증을 유발했는데이씨가 수줍게 웃으며 손사래로 누나의 말을 제지했다.

함평 임야와 토지를 기증한 가족들과의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일 수 있는 만남은가족들 사이에 흐르는 화목함 이상의 신뢰를 느끼며 아쉽게 끝을 맺었다. 

 

에필로그

그날 밤, 막내 이씨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국장님, 가 곧 외국으로 나가서 국내에 거의 못 들어오게 될 것 같습니다. 앞으로 혹시 연락하실 일이 있으면 제 누님께 연락을 취해 주세요.’ 국내에 거의 못 들어오게 될것 같다는 메시지를 보며, 그가 왜 기증을 서둘렀는지 짐작이 갔다.

그에게 답문자를 보냈다. ‘국내에 거의 못 들어오신다니 아쉽습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오랜 인연같이 느껴지는데, 이리 기약없이 헤어지게 돼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네요. 어디서든 항상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그로부터 마지막 문자가 왔다. ‘저를 낳아주신 조상님들께서 쉬셨던 곳이 좋은 단체와 인연을 맺을 수 있어 감사하고 마음이 참 좋습니다. (중략) 저도 내셔널트러스트에 대한 관심의 끈 놓지 않겠습니다. 건강하시고 항상 세상의 빛이 되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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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2014.03.25 14:22

매거진 내셔널트러스트 30호 [영국NT이야기]- 울즈소프 매너


근대과학의 성지 

‘울즈소프 매너(Woolsthorpe Manor)


글 : 조명래 | 한국내셔널트러스트 공동대표, 단국대학교 교수 


사진: David Ireland

농사꾼 집안의 아들이 천재 과학자가 되기까지 

'뉴턴'이란 이름을 들으면 보통 떠오르는 이미지는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천재적 과학자'이다. 말 그대로 천재였던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물리학자, 천문학자, 그리고 수학자였던 뉴턴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루카시안 수학 교수(Lucasian Professor of Mathematics)로 재직하면서 ‘광학’,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 등의 저서를 남기며 17세기에 이미 근대과학의 기반을 마련했다. 만유인력의 법칙의 발견과 새로운 역학론을 정립해 새로운 물리학 체계를 확립했고, 조예가 깊었던 천문학 분야에서는 망원경을 발명하고 개량했으며, 미적분법을 고안해 수학의 발전에도 지대한 기여를 했다. 하지만 뉴턴의 업적은 과학 분야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하원의원, 조폐국 장관(Master of the Royal Mint), 왕립협회 회장(President of the Royal Society)을 지내는 등 사회 여러 분야에서도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뉴턴은 잉글랜드 중동부에 있는 링컨셔(Lincolnshire) 주의 그랜섬(Grantham)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철의 여인’이라 불리는 마가렛 데쳐 전 총리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뉴턴의 생가는 ‘울즈소프 매너(Woolsthorpe Manor)’로 그랜섬에서도 11km 더 들어간 작은 마을에 있다. 마을 가장자리에 있는 울즈소프 매너는 17세기 장원주택으로 뉴턴의 조부(Robert Newton)가 1623년에 매입해 확장한 뒤, 아들인 뉴턴의 아버지(Isaac Newton, 뉴턴과 같은 이름)에게 결혼 지참금(wedding dowry)으로 주었던 집이다. 뉴턴은 그곳에서 1642년 크리스마스 날 미숙아로 태어났다. 양목장 농부였던 생부는 뉴턴이 태어나기 3개월 전 세상을 떠났고, 그 충격으로 생모는 그를 조산해버렸다. 과부가 된 생모는 뉴턴이 세 살이 되던 해 인근에 사는 목사 스미스(Barnabas Smith)와 재혼했고 그 이후 뉴턴은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뉴턴의 방에서 바라본 '뉴턴의 사과 나무'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뉴턴은 외롭고 내성적인 아이로 성장했고 그 때문에 부모에 대한 미움이 특별히 컸다. 한 예로 뉴턴은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목록에 ‘부모를 협박해 불로 태워 죽이고 싶었고, 그들이 사는 집도 불태우고 싶었다.’고 생각한 것을 올려놓을 정도였다. 그러다 새아버지인 스미스 목사가 잉글랜드 내전의 난리 속에 죽자 뉴턴의 생모는 울즈소프 매너로 돌아왔는데, 그 때 그녀는 새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신학서적 200-300여 권을 가지고 왔다. 뉴턴은 책장을 손수 짜 그 책들을 간수하는 서재를 꾸밀 정도로 지적인 호기심이 컸던 아이였다. 울즈소프 매너에서 할머니와 지낼 때 뉴턴은 바람의 속도나 힘을 분석하며 시간을 보냈고 신기한 것을 수집하거나 렌즈와 같은 과학적 기구를 만드는 데 열중하기도 했다. 울즈소프 매너의 벽에는 뉴턴이 어린 시절 낙서한 흔적들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뉴턴은 자신의 생각을 낙서로 벽에 표현하곤 했는데, 그 중 일부는 과학적 발견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자무식 농사꾼 집안의 아들이었지만 뉴턴은 이렇듯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재능을 가진 소년이었다.

뉴턴의 비범함을 일찍이 발견한 것은 큰아버지였다. 시골에서 농사일이나 하기엔 뉴턴의 재능이 아깝다고 생각한 큰아버지는 뉴턴을 정식으로 교육시키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12살이 되던 1655년, 뉴턴은 인근의 King Edward VI Grammer School에 진학했다. 학교에서 성적은 좋았지만 뉴턴은 또래와 잘 어울리지 못했고 항상 침울했으며 말수가 적었다. 아들이 학교에 적응을 잘 하지 못하자 그의 생모는 뉴턴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농사일을 시키려 했지만 큰아버지의 계속된 설득 끝에 뉴턴은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고 1661년에 캠브릿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로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위대한 3가지 과학적 발견을 하다

캠브릿지대학교 입학 당시, 뉴턴은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본’ 조차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얼마 안 가 위대한 과학자로 발전하게 된다. 흑사병의 창궐로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고 학교도 휴교령으로 문을 닫게 되자, 뉴턴은 고향 울즈소프 매너로 돌아가 18개월을 보냈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위대한 3가지 과학적 발견이 이루어진 건 바로 그가  1666년까지 고향집 울즈소프 매너에 머무는 동안이었다. 첫째는 미적분의 발견이고, 둘째는 만유인력법칙의 발견이었으며, 셋째는 프리즘을 이용한 빛의 구성을 발견한 것이었다. 

뉴턴의 사과 나무

집 창문을 통해 정원의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뉴턴은 만유인력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일화는 이 때 생긴 것이다. 울즈소프 매너 안내책자에서는 이 일화가 뉴턴이 직접 언급한 것이 아니라 그의 친구 윌리암 스튜클리가 뉴턴으로부터 전해들은 것이라고 쓰여 있다. 어찌됐던 이런 중대한 발견의 촉매가 된 '뉴턴의 사과는' 오늘날 번뜩이는 영감을 주는 대상을 지칭하는 말로도 쓰인다. 지금도 울즈소프 매너 뜨락엔 사과나무가 서 있다. 방문자들은 대부분 이 나무를 보고 뉴턴의 천재성과 기막힌 일화에 감탄하지만, 당시 뉴턴에게 영감을 준 사과나무는 사실 1820년에 베어졌고 지금 있는 나무는 다시 심은 것이다.

후에 뉴턴은 고향집 울즈소프 매너에 머물면서 획기적인 과학적 발견을 했던 18개월의 기간을 과학자로서 최고의 시간, 즉 절정기였다고 회고했다. 휴교령이 끝나고 ‘위대한 과학적 발견’을 가지고 학교로 돌아온 뉴턴은 더 이상 평범한 학생이 아니었다. 고전 수학자였던 아이작 배로우 교수(Issac Barrow, 1630-1677)는 뉴턴을 각별히 주목했고 또한 후의를 베풀었다. 1669년 배로우 교수는 당시 26살에 불과했던 뉴턴에게 교수직을 넘기고 스스로는 성직자가 되었다. 

1671년 뉴턴은 볼록렌즈 대신 오목거울을 이용한 망원경(뉴턴식 반사망원경)을 발명해 국왕에게 기증했고 그 보답으로 왕립학회 회원이 되었다. 이는 뉴턴이 과학연구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뉴턴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프린키피아’의 저술이다. 1687년 완성된 프린키피아는 수학적인 방법을 통해 '케플러의 법칙'의 발견을 유도했고, 케플러는 이 발견을 통해 천문학 혁명을 완성함으로써 기존 고전 역학에 종지부를 찍고 근대역학의 시대를 열었다. 프린키피아의 출판과 함께 뉴턴의 명성은 유럽 전역으로 뻗쳐나갔다. 명성이 커짐에 따라 그에 대한 많은 시기와 비판도 제기되면서 뉴턴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그런 와중에 그는 영국의 하원의원에 대학 대표로 선출되어 학교를 떠났고 1696년에는 재무장관이 된 제자의 천거로 조폐국 국장이 되었다. 이렇게 뉴턴은 학교와 과학으로부터 멀어지는 듯싶었지만, 1703년 왕립학회 회장이 되면서 그는 다시 학문의 세계로 귀환했다. 1704년, 그는 또 다른 대표 저서인 ‘광학’을 출판했다. 이듬해 (1705년), 가장 위대한 과학자가 평민이란 사실을 알게 된 앤 여왕은 그에게 기사 칭호를 주었다. 1711년 미적분에 관한 저서인 ‘해석’을 출간한 뉴턴은 비슷한 시기에 미적분을 발견한 라이프니치와 누가 먼저 발견했느냐에 관한 긴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은 과학사상 가장 격렬하고 장기간에 걸쳐 진행된 것으로 유명하다. 


뉴턴은 1727년 향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영국의 수많은 위인들이 묻혀있는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그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갈릴레이가 죽던 해, 그리고 코페르니쿠스가 죽은 지 100주년이 되는 해에 태어난 뉴턴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근대과학의 완성에 몰두했다. 코페르니쿠스가 시작한 천문학혁명과 갈릴레이가 시작한 역학혁명은 그것들을 수학적으로 재해석해 풀어낸 뉴턴에 의해 완결되었다. 뉴턴의 이 위대한 업적들은 그가 20대에 2년여의 세월을 보냈던 생가 울즈소프 매너에서 이뤄진 결과라 볼 수 있다. 비록 고달프고 침울한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지만, 뉴턴이 울즈소프 매너에서 과학사에 길이 남을 업적들을 남긴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울즈소프 매너가 과학자들이 순례하는 성지로 간주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 터이다. 


내셔널트러스트의 보전정신으로 복원된 울즈소프 매너

1727년 뉴턴이 죽은 뒤 울즈소프 매너는 뉴턴의 오촌 조카인 존 뉴턴에게 상속되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732년 이 장원은 터너 집안(Turner Family)에 매각되었다. 그 후 200년간 울즈소프 매너는 터너 집안의 장원으로 사용되었다. 1942년 왕립협회는 필그림 트러스트(Pilgrim Trust)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울즈소프 매너를 매입한 뒤 영국 내셔널 트러스트에게 기증했다. 당시 울즈소프 매너는 원형이 크게 훼손되 사실상 멸실될 위기에 놓여 있었지만 왕립협회는 뉴턴 탄생 300주년을 맞이하여 그의 생가 울즈소프 매너를 영구 보존하기 위해 매입과 동시에 매너를 영국내셔널트러스트에게 기증했다. 

사진: Kevin R Boyd

뉴턴의 생가가 시민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영국내셔널트러스트는 울즈소프 매너를 17세기의 전형적인 농가건물로 복원하기로 했다. 새로 지어진 건물들은 없애고 주동인 울즈소프 매너는 뉴턴이 살았던 때 당시와 최대한 가깝게 복원되었다. 건물 뒤편 계단(다락방을 외부에서 올라가는 계단)을 옛날식으로 다시 설치했고, 농장건물에 옛 시설과 장비들도 들여다 놓았다. 울즈소프 매너의 내부 공간은 새롭게 장식되었고 서재, 거실 등은 옛 모습 그대로 꾸며졌다. 실내에는 뉴턴이 어린 시절 만들었던 해시계가 비치되어 있고 제임스 손힐(James Thornhill)이 그린 뉴턴 초상화 원본도 걸려 있지만 책상, 책장, 실험기구, 펜, 종이, 책 등의 가구 대부분은 그가 실제로 사용한 것들이 아니다. 부지 내에 있는 창고는 일부가 개조되어 방문자들이 직접 과학실험을 할 수 있는 과학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울즈소프 매너 앞 뜨락엔 많은 방문자들에게 뉴턴을 알린 ‘뉴턴의 사과’가 있다. 6, 7 동의 건물로 구성된 울즈소프 매너는 동네의 끝자락에 자리하여 옆은 바로 초지로 이어져 있다. 울즈소프 매너 건물은 이 지역에서 나는 석회석으로 지어져 있고, 건축양식도 당시 지역에서 유행하던 것을 따랐다. 둘러쳐진 초지, 부드러운 흙색의 외벽, 높은 지붕, 작은 창문, 벽에 새겨진 문양, 소박하면서 초라한 내부 공간, 이 모두는 위대한 과학자가 탄생한 시대의 시공간을 재현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 재현은 영국내셔널트러스트의 위대한 보전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울즈소프 매너 앞 뜨락엔 많은 방문자들에게 뉴턴을 알린 ‘뉴턴의 사과’가 열린다. 많은 과학자들이 지금도 이곳을 성지로 순례할 수 있었던 것은 내셔널트러스트의 보전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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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내셔널트러스트 30호 [내셔널트러스트 여행]- 누하동 오거리

시간의 골목, 시간의 교차로

글: 김한울 / 서촌주거공간연구회 사무국장

장면 1. 현자를 찾아서

사진: 김한울

무언가 찾아 집집을 찾아 헤메는 이가 서촌의 골목을 바삐 걷는다. 술 좋아하는 체부동 김씨와 바둑 좋아하는 누각동 김씨까지 찾아 가 봤지만 모두 허탕이었다. 해는 인왕산을 넘어 처마 밑으로 어둠이 피어나고 있었다. 며칠 공을 치니 마음은 더 급해졌다. 귓가에 거문고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누각동 이만호 집이 머리를 스친다. 김홍기가 거문고를 좋아하는 그의 집을 자주 찾는다는 이야기를 김홍기의 아들로부터 직접 들었다. 조용히 대문을 밀고 들어가 가쁜 숨을 고르며 거문고 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묻는다.

“실례지만, 어느 분이 김노인이십니까?”

“여기에 김씨는 없소. 홍기를 찾나본데, 와도 예정이 없고 가도 언제 온다 않으며, 올 때는 하루에 두세 번도 오지만 오지 않을 때는 해를 넘기는 사람이오.”

날이 기울었으니 그가 다닌다 하는 집들을 물어서 다음 날에 기대해 볼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다음날, 다시 걸음을 서둘렀다. 그렇게 몇 집을 찾아갔을까. 지난 밤 술겨루기를 하곤 아침녘에 취기와 함께 먼 길을 떠났다는 답만 덩그러니 남았다.

김홍기라는 사람은 두루 세상의 이치를 꿰뚫고 있어 김신선이라고도 불리는 인물이다. 그를 찾는 이는 연암 박지원. 그의 지혜가 우울증에도 효험이 있다는 얘기를 마음에 새겨뒀다가 사람을 보낸 것이다. 하지만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신선은 찾지 못하고 만다.

서촌의 18세기 풍경을 아련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게 해주는 연암 박지원의 <김신선전(金神仙傳)> 내용이다.


조선의 지도를 들고 서촌의 골목을 걷다

연암의 <김신선전(金神仙傳)>은 체부동과 누각동에서 시작된다. 누각동은 누상동과 누하동의 옛 이름이다. 숨은 현자 김신선과 그를 찾는 박지원의 추적은 서촌의 골목 어디 쯤에서 엇갈리고 있었을까. 운 좋게도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실마리를 가지고 있다.

<도성대지도>는 조선의 서울을 가장 크고 세세하게 그린 지도다. 18세기 후반에 편찬되었으니 <김신선전>의 인물들의 발걸음이 일으킨 먼지가 막 가라앉을 즈음이다. 붉은 선으로 길을 긋고 푸른 선으로 물을 그렸다. 물길을 덮은 아스팔트 아래로는 오늘도 청계로 향하는 물이 흐르고, 골목길을 덮은 보도블록 위로는 오늘도 서촌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쁘다.

18세기 조선시대 지도를 들고도 21세기의 골목길을 찾아 걸을 수 있는 곳, 바로 서촌이다.

도성대지도(일부, 서촌) _ 공공누리:문화재청

지도를 보면 인왕산 아래 옥류동 물길 옆으로 구불구불 내려오던 골목길이 갑자기 한 곳에 모인다. 동네 밖으로 나갈 땐 모두가 만나는 곳이고, 동네로 들어설 땐 함께 들어와 흩어지는 곳이다. 길의 갈래는 다섯 갈래. 누하동 오거리다.

오거리는 조선시대 누하동 안의 작은 동네 이름들 중 하나로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다섯 오(五), 클 거(巨), 마을 리(里), 오거리(五巨里)다. 지금은 근처에 자리잡은 슈퍼마켓 이름으로 남아있다. 얼마 전까지는 마을버스 정류장 이름으로도 남아있었지만 서촌에 한옥마을이라는 이름이 덧씌워지면서 마을버스 정류장 이름에서는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서촌 사람들은 여전히 그 정류장을 오거리라 부른다.

누하동 오거리는 누하동, 체부동, 통인동, 필운동의 경계가 만나는 곳이다. 18세기 신선을 찾는 발길이 체부동에서 누각동으로 향했다면 지금의 누하동 오거리를 지나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오래된 골목, 그 길과 길이 만나고 흩어지는 곳마다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발걸음. 옛 사람들이 걷던 길을 그대로 우리가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살갗으로 느껴지는 역사의 깊은 호흡은 서촌이 간직한 시간의 숨결이고, 서촌이 시간을 담고 있는 방식이다.


장면 2. 단짝 친구의 선물

서너살 쯤 나이 차가 있어 보이는 두 아이가 오거리에서 인사를 나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한 아이가 몸이 불편하여 입학이 늦어진 바람에 둘은 동급생으로 몇 해를 지내며 둘도 없는 단짝 친구가 됐다. 함께 걷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끊어진듯 이어지다가도 통하는 듯 막다른 길이었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유년에 동네의 골목길을 탐험하듯 돌아 다니다 보면 길 잃고 헤메는 일도 더러 있기 마련이다. 둘은 그렇게 동네의 골목길을 함께 걷다가 헤어지곤 했다.

친구는 나무로 만든 그림도구 상자를 선물했다. 마음에 쏙 드는 선물에 마음이 들뜬 아이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별명을 ‘나무 상자’라는 뜻으로 지었다. 한자로 이상(李箱). 김해경이라는 본명 보다 직접 지은 이름을 더 자주 쓰게 된 것은 순전히 이 동네 단짝 친구, 구본웅 덕분이었다.


서촌의 시간은 길로 이어진다

한국의 툴루즈 로트렉이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한 서양화가 구본웅과 구본웅의 그림 <친구의 초상>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인 이상은 평생 친구이자 동네 친구였다. 누하동 오거리는 구본웅의 집과 이상의 집을 이어주고 있다. 그들이 걸었던 구불구불 막히기도 이어지기도 하던 골목은 이상의 시 <오감도>에 아해들이 질주하는 무대가 되었다.

서촌 골목의 아이들

20년 전에 새로 놓인 넓은 찻길을 피해서 골목으로 다니는 서촌의 아이들은 누하동 오거리에 익숙하다. 필운동으로, 누하동으로, 누상동으로, 통인동으로, 체부동으로 만나고 갈라지는 오거리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인사가 더 빈번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누가 알까. 지금도 일생에 남을 선물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우정을 키워가고 있는 어느 미래의 시인과 화가가 저 오거리를 지나고 있을지 말이다. 그렇게 서촌의 골목은 옛 이야기에만 머물지 않고 오늘의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 서촌이 시간을 이어주는 방식이다.


장면 3. 캔버스를 들고 오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전쟁의 포화에도 불구하고 불행 중 다행으로 서촌에는 폭격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오거리는 마치 언제 전쟁이 있었냐는 듯 평화로웠다. 캔버스와 물감을 들고 오거리를 지나는 화가의 마음을 예외로 한다면 말이다.

고향 떠난 고된 피난 생활이 결국 가족을 갈라놓았고, 그 후로 홀로 전국을 전전하다가 휴전 이듬해, 누상동의 고향 선배 집에서 하숙을 시작했다. 가족과 다시 한 집에서 살 수 있는 방편의 하나로 개인전을 준비하기로 한 것이다. 가족과 그림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었던 그의 발걸음은 재회의 희망에 부풀어 한결 가벼웠을 것이다. 그 마음을 담아 그린 작품에 <도원>과 <길떠나는 가족> 같은 제목을 붙였다. 가족과 함께하는 행복한 시간과 피난 가던 때를 화폭에 옮긴 것이다. 그의 이름은 이중섭이다.


전쟁의 포화에도 불구하고 불행 중 다행으로 서촌에는 폭격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오거리는 마치 언제 전쟁이 있었냐는 듯 평화로웠다. 캔버스와 물감을 들고 오거리를 지나는 화가의 마음을 예외로 한다면 말이다.

고향 떠난 고된 피난 생활이 결국 가족을 갈라놓았고, 그 후로 홀로 전국을 전전하다가 휴전 이듬해, 누상동의 고향 선배 집에서 하숙을 시작했다. 가족과 다시 한 집에서 살 수 있는 방편의 하나로 개인전을 준비하기로 한 것이다. 가족과 그림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었던 그의 발걸음은 재회의 희망에 부풀어 한결 가벼웠을 것이다. 그 마음을 담아 그린 작품에 <도원>과 <길떠나는 가족> 같은 제목을 붙였다. 가족과 함께하는 행복한 시간과 피난 가던 때를 화폭에 옮긴 것이다. 그의 이름은 이중섭이다.


삶과 예술이 이어지는 시간의 교차로

누하동 오거리에는 수많은 화가들의 이름이 수놓여있다. 전쟁이 끝나고 속속 서촌으로 화가들이 모여든 것이다. 피난 시절, 이중섭과 함께 부산에서 단체전을 열었던 이봉상 화백의 집은 누하동 오거리에서 몇 걸음 안되는 곳이다. 이봉상 화백과 누하동 오거리를 사이에 두고는 천경자 화백도 자리를 잡았다. 이중섭, 이봉상과 부산에서 함께 단체전을 열었던 한묵 화백도 곧 이웃이 되었다. 누하동 오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만나고 인사하며 그림을 이야기 했을 전후 서양화가의 발자취가 눈부시다.

 누하동 청전 이상범 가옥과 천경자 화백의 집

서촌엔 이미 당대 최고의 동양화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청전 이상범 화백은 이미 오래전 누하동에 청전화숙을 열어 수많은 제자를 배출하고 있었다. 그의 스승은 심전 안중식이었고, 심전의 스승은 오원 장승업이었다. 시상대 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도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던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우는 작업을 맡았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은 후 언론사를 나와 후진 양성에 더욱 힘을 쏟고 있었다. 그의 집에 하숙을 하던 이 중에는 10대의 박노수도 있었다.

미술관 전시를 통해서만 만나던 이름들이 누하동 오거리를 만나면 살가운 이야기들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같은 곳에 출퇴근을 하던 이들 중에 독신이었던 한묵 화백은 이봉상 화백의 집에서 식사를 하는 일이 잦았고 종종 천경자 화백의 집에서 끼니를 신세지기도 했다. 출근길에 누하동 오거리를 지나 이웃집에 들러 아침밥을 먹는 풍경에서 화가는 예술가 이전에 동네 삼촌이다. 언제든 달려가서 고민을 털어놓고 위안을 주고 또 받던 이웃들이 누하동 오거리를 오가며 이웃의 정을 쌓아온 것이다.

천경자 화백이 살던 누하동 집은 예술가 몇몇이 아뜰리에로 사용하고 있고, 곳곳에 화가들의 작업실이 있다. 오거리를 통해 오가며 정을 나누는 이웃 사이는 지금도 오거리에 서면 가던 길 멈춰 서서 한참을 이야기 나누는 동네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대로 다시 찾아 볼 수 있다.


시간의 골목, 시간의 교차로

서촌을 살다 간 이들의 이름을 모두 꼽으려면 숨이 차오를 정도다. 시인 노천명은 천경자 화백이 오거리를 오가며 인사를 나누던 사이였다. 노천명 시인의 집 맞은 편에는 염상섭의 생가가 있었다. 같은 나이의 수주 변영로가 신교동에 살았다 하니 통인동 골목으로 오거리를 지나 친구의 집으로 향하는 장면도 떠올려 볼 수 있다. 김복진과 이여성은 당대 얼마 되지 않는 대표적 예술인 독립운동가로 두 사람의 집을 잇는 길 역시 누하동 오거리가 된다. 이여성은 청전 이상범과 함께 전시를 열었고, 김복진은 구본웅에게 조각을 가르쳤다. 

누하동 오거리 지도 _ 서촌주거공간연구회

그 무수한 이름들이 누하동 오거리에 놓이는 순간 우리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역사 속 아련한 인물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길, 이 거리를 지금도 걷고 있는 누군가 처럼 느껴지는 경험 말이다. 구불구불 복잡하게 그물처럼 얽힌 골목처럼 시대의 이름들이 골목으로 얽히며 시간의 살아있는 숨결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누하동 오거리, 골목의 숨결을 이어가는 방법

누하동 오거리에는 오래된 건물이 얼마 없다. 올해로 상수(上壽)를 맞은 한묵 화백이 50년 전에 살던 누각같은 2층 집도 지금은 자취를 알 수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 길이 아직 남아있다는 점이다. 재개발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가면 집은 물론 길까지 모조리 흔적없이 사라지는 시대에 조선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역사의 자취를 따라가 볼 수 있는 길이 남아있고 그 길을 오늘도 이야기를 이어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문화유산이라 하면 고색 창연한 건축물만을 떠올리며 그 안을 드나들던 사람들이 걷던 길과 그 위에 놓여진 이야기의 호흡은 자칫 놓쳐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누하동 오거리는 오래된 건물 보다는 오래된 길과 이야기를 읽는 눈을 불러낸다. 그 눈으로 역사 속의 이야기와 오늘의 삶을 함께 읽어낼 때, 우리의 삶 자체도 문화유산과 함께 빛을 발하는 살아있는 역사로 새겨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사진: 서촌주거공간연구회(최문용)

오늘의 서촌이 답해야 할 물음은 여기에 있다. 보존과 복원이 개발의 다른 이름으로 돌아와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만져지지 않는 것들을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것으로 새로 만들어 세우는데 급급한 지금,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숨결은 숨결 그대로 이어가는 노력과 자세에 대한 것 말이다.

과거의 발걸음이 오늘의 발걸음으로 이어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살아있는 역사와 살아있는 문화유산을 누릴 자격을 가지게 되는 건 아닐까. 서촌을 수놓은 수많은 이름과 이야기들이 서로 만나고 교차하는 누하동 오거리에 오늘의 삶 역시 교차하고 있는 것 처럼, 시간의 교차로 누하동 오거리는 예전과 같이, 오늘도 여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쓰여지고 있는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참고문헌

연암집(燕巖集) 제8권 별집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김신선전(金神仙傳), 연도미상 (한국고전종합DB)

천경자, 思友 잊을수 없는 그때 그친구 <16> 千鏡子 <東洋畵家> (6) 萬年청년 韓默씨, 경향신문, 1979.10.3.

김창희, 서촌의 형제들이 꾸었던 꿈 진보적 민족주의자의 길 - 1, 레디앙, 2013.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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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내셔널트러스트 30호 [자연이야기-식물편]- 미나리

김치의 원조, 미나리

글: 고주환



"어깨동무 할 사람 여기여기 붙어라!"

 어릴적 학교수업이 끝나면 

 교문을 나서며 그냥 서로의 집으로 헤어져 가기 

 아쉬운 장난꾸러기들이 

 놀이에 참여할 아이들을 모은다.

『어깨동무 내 동무 미나리꽝에 앉았다.

 어깨동무 내 동무 보리가 나도록 씨동무』  

 

신작로가 옆으로 꽉 차도록 어깨동무를 나란히 하고선 이 노래를 합창하며 냉면집 쪽으로 올라오다간 '미나리꽝에 앉았다'는 대목에서 제각각 '앉았다' 또는 '섰다'를 외치며 자신이 외친 말과 같이 앉거나 서는 놀이를 한다. 여럿과 다른 한 사람이 나오면 떨어져 나가거나 술래가 되는 놀이지만 누가 술래가 되느냐보다는 길 가로 밀린 아이들이 개똥을 밟거나 양쪽에서 '섰다'를 외치면 가운데 아이는 앉으려다가 대롱대롱 매달리는 우스꽝스런 장면들이 더 재미있는 풍경이었다.

이 노래에 등장하는 미나리꽝은 '미나리 광'을 세게 발음한 말인데 여기서 ‘광’은 창고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오래 전부터 우리 민족은 집에서 가까운 곳에 미나리를 길러 밥상에 나물을 올렸다. 그런데 미나리는 뜯으면 금방 새 순이 나는 화수분같은 식물이라 미나리밭을 자주 드나들다 보니 구전되는 놀이동요에까지 등장하게 되었고, 미나리를 심어놓은 장소는 밭이나 논보다는 아예 창고라는 뜻의 ‘광’이라고 불리게 될 만큼 친숙한 공간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미나리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아주 오래전부터 야채로 이용되어 온 식물이다. 시경에 의하면 미나리는 기원전 2183~771년 간 하, 은, 주나라에서 양자강유역을 중심으로 식품으로 이용되 왔으며 인재를 발굴하는 것을 좋은 미나리를 뜯는 것에 비유한 대목도 기록으로 전해진다. 

기원전 480년에 쓰여진 중국의 ‘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는 '양자강 유역의 채소 가운데 가장 맛이 좋은 것은 운몽(雲夢, 지명)의 미나리'라는 기록을 볼 수 있고 '야인헌근(野人獻芹)'이라는 고사성어의 유래가 되는 '살찐 미나리를 임금님께 바치고 싶네'라는 노래도 같은 문헌에 실려 전해진다. 우리나라의 기록으로는 고려사의 열전 반역임연조(反逆林衍條)에 근전(芹田)이라는 기록이 있고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왕조실록이나 본초서, 요리서 등에 비교적 많은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이전부터 인공적으로 재배해서 식용으로 이용되던 채소임을 알 수 있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갈증을 해소하며 머리를 맑게 하고, 주독제거, 대, 소장의 소통과 황달, 부인병 등에 효과가 있는 약재’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에는 '제사상에 미나리김치를 두 번째로 진열해야 한다'고 했고 성종 19년(1488)에 명나라의 사신으로 왔던 동월(董越)이 쓴 ‘조선부(朝鮮賦)’에서는 ‘한양과 개성에서는 집집마다 모두 작은 연못에 미나리를 심는다.’는 기록이 있어 ‘미나리광’의 유래를 짐작할 수 있다.


산형화목 미나리과의 호습성 다년초로 분류되는 미나리는 뿌리가 물에 잠겨 자라는 물미나리물 근처의 흙에 뿌리를 박고 자라는 돌미나리로 구분된다. 이름인 미나리는 나리, 개나리, 까나리, 희나리 등 우리말 이름의 ‘나리’에서 유래되는데 ‘나리’는 날(日)[-낮-햇볕]에 그 어원을 두고 있으며 미나리의 ‘미’는 미더덕이나 미역처럼 물에서 왔으리라 유추해 본다.


 


미나리는 조선 후기에 급격히 보급된 배추에 그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 오랬동안 우리민족의 밥상에 올랐던 김치의 주재료이기도 하다, 원래의 김치는 나박김치등과 같이 국물과 함께 떠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지칭하는 말이었지만, 그 때 당시에는 '짠지'라 불리던 지금의 절임김치에 그 이름을 내 주고, 주재료의 이름을 앞에 붙인 물김치란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필자의 기억 속에 양지쪽에 돌나물의 두툼한 잎이 돋아나던 봄이면 언제나 상에 오르던 돌나물과 미나리를 곁들인 물김치 맛은 영원히 잊지 못할 어머니의 맛으로 남아 있다. 아삭아삭 씹히는 시원한 돌나물의 감촉과 입안 가득 풍겨오던 미나리의 향은 봄을 통째로 머금은 맛 그 자체였다.

"어머님! 이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

라고 그 시원하고 향긋한 맛에 반한 아내가 물으면 늘

"그냥 소금간만 맞추면 돼~" 라고 대답하시던 어머니.

그러나 서울로 올라와 재현해 본 아내의 물김치는 설탕을 넣지 않았다는데도 달짝지근한 단 맛만 났으니.......

매운탕, 아귀찜에 복지리까지 요즘의 요리에서도 빠지지 않는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한 알칼리성 식품임이야 두말 할 필요도 없고 피치 못할 간밤의 주독으로 머리가 지끈지끈한 날이면 고향에서 떠먹던 향긋한 어머니의 미나리물김치가 간절해지는 그런 소채이다.

 이 땅의 어느 어머니든 돌나물미나리물김치 요리의 달인 아니랴!

 



고주환 | 작가

[나무가 민중이다] 의 저자로 민초의 삶에 깃든 풀과 나무 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며, 숲해설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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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내셔널트러스트 30호 [추천도서]

시대 유산의 공존을 꿈꾸다


글 : 윤인석  |  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햇살가득 연희동 집, 바람솔솔 부암동 집>(최재완 외 저, 생강) 

<마을의 귀환>(오마이 뉴스 특별취재팀, 오마이 북)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조한, 돌베개)

<발전소는 어떻게 미술관이 되었는가>(김정후, 돌베개)


새해 들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역시 ‘경제’이다. 경제가 어려울 때면 으레 부동산 경기가 당대의 형국을 판가름에 큰 기준이 되곤 하는데 아파트 시세를 가지고 온통 전국 경제의 추이를 가늠하곤 한다. 어느새 한국은 아파트 공화국이 되어 사람의 행색과 문화적 수준, 행복도의 근거를, 동네의 위치와 아파트 시공회사에 두고 점수를 매기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지은 지 십년도 안 된 건물을 부수고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거대한 아파트 단지를 우후죽순처럼 짓고 이런 것들이 모여서 도시의 모습을 마치 공룡의 집단처럼 보이게 만들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작년 후반기부터 서점가에 웬 ‘골목길’, ‘집’, ‘주택’, ‘기억’, ‘공간’, ‘고쳐 쓰기’...와 같은 좀 고리타분한 단어가 제목에 들어 간 책들이 한꺼번에 꽂히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되리라 기대하지만 우리단체 소식지가 석 달에 한번 발행되는 관계로 이번 호에 이 네 권을 묶어서 회원 여러분께 소개하려고 한다. 


<햇살가득..>은 

아파트생활을 청산하고 단독주택을 구입, 수리하여 생활하는 두 가정의 기록이다. 단독주택에서 살다가 결혼을 계기로 아파트에서 수년씩 살던 두 가정이, 한 가정은 연희동으로 또 한 가정은 부암동으로 둥지를 옮겼다. 어릴 때 마당 딸린 집에서 살던 추억이 이들로 하여금 단독주택 행을 결행토록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철마다 잎이 나서, 꽃 피고, 낙엽 지고, 눈 쌓이는 마당과 식물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면 생활하기 편하기만 한 아파트 생활을 접고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북덕방 사람들과 한집 한집 탐사하며 자신들과 인연이 되는 집들을 고르는 수고를 굳이 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연희동 가족’집을 고치는 과정과 완성 후 이사 들어가서 골목을 매개로 이어지는 사람들, 그들과 벌이는 교류의 얘기가 자상하게 나와 있다. 골목은 커다란 집이고 그것을 연결 끈으로 그 안에 사는 사람은 가족이며 각자 집의 모양이 다르 듯 개성을 가지고 살며시 좋은 동네로 가꾸어 가려는 공동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이 가족은 그들의 느낌을 얘기한다. 그들의 가족에는 길냥이들까지 포함된다. 길냥이를 싫어하는 주민들을 배려하면서 서로 돌봐주었지만 끝내 자신의 품에서 숨지고 마는 고양이의 죽음까지 애도하는 마음 씀씀이는 햇살 가득한 마당과 골목이 이들에게 심어 준 큰 선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부암동 가족’은 연희동을 거쳐 부암동 한양성곽과 붙은 필지에 지어진 집을 택하고 수리하는 과정을 꼼꼼히 적고 있다. 알뜰하게 건축도면까지 곁들였으며 기르는 개를 산책시키며 이웃들과 맺어지는 가족 같은 연대감, 한양성곽이 관광지화 되면서 생겨나는 동네변화, 그리고 높은 언덕의 전망 좋은 집이라는 뿌듯함에 이어 밀어 닥친 첫 겨울의 폭설로 말미암아 맞게 되는 고립과 외부세계와 소통이 빚어낸 에피소드는 판박이 같은 아파트 생활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땅과 나누는 직접 대화일 것이다.      


<마을의 귀환>은 

2012년 8월부터 2013년 4월에 걸쳐 마을 공동체를 취재하여 인터넷 신문인 <오마이 뉴스>에 게재하였던 내용을 추려서 단행본으로 출판한 것이다. 20세기말부터 크게 유행하였던 ‘지속가능’이란 큰 주제로 우리나라도 여러 분야에서 갖가지 시도가 있어 왔지만 정작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직도 구름 잡는 얘기 정도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사례들을 찾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보통사람도 따라 할 수 있는가?’ ‘생생한 현장을 보여 줄 수 있는가?’라는 아주 기초적이고도 구체적인 기준 위에 주제별로 국내의 마을을 선별하여 주민들과 관계자들을 인터뷰하고 관찰, 취재하였다. 취재과정에서 필자들은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다’고 고백하고 있다. 마음을 나누고 공간을 나누는 공동체의 구성원들, 종교적인 집단거주이거나 동호인들의 ‘촌’이 아니라 평번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함께’사는 지혜를 찾아 나가고 거기에 필요한 장치와 수단들을 마련해 나가는 과정을 살피고 정리하면서 우리나라에도 지속가능한 마을공동체를 이루어 나갈 수 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마을공동체 운동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영국의 사례를 몇 가지 주제별로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우리 곁에서 수 없이 스치는 아파트 벽면에 씌어 있는 “....마을”이라는 글자가 조금은 허황하게 보인다. 


<서울, 공간의 기억..>은 

건축가 조한 씨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오래된 장소와 공간을 찾아가서 건축가로서 시민으로서 느끼는 바를 적은 글이다. 글쓴이는 세월의 더께가 앉아 있는 서울시내의 장소를 찾아내어 원래의 모습에서 감춰지거나 없어진 것들을 밝혀내고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세월의 힘, 각 시대의 최고선, 사회적 합의, 타협에 의해 새겨진 자국의 사연을 얘기해 주고 있다. 스무 군데의 동네와 건축물을 가지고 한국근현대사의 사건, 사고, 시대적 현상들을 들추어내어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대부분 저자의 어릴 적 기억이 배어있는 곳이라는 것이 놀랍다. 그중 압권은 ‘강남터미날’이라 불리던 건물이 지금의 모습으로 변형되어 가는 과정을 상세히 묘사하는 대목이다. 지금은 ‘센트럴 씨티’로 불리며 각종 기능이 얽혀 있는 그곳을 저자는 자신의 기억을 꼬물꼬물 되살려 아직 살아남아 있는 기둥 하나하나를 더듬으며 옛날 구조와 새로운 구조물이 가지고 있는 질서를 구분해 가며 세월의 켜를 찾아내고 있다. 


<발전소는 어떻게 미술관이 되었는가>는,

 영국에서 오랜 유학생활을 마치고 런던대학에서 교펀을 잡고 있는 김정후 박사영국 런던의 ‘테이트 모던 현대미술관’을 화두로, 공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지금은 쓸모없어진 유럽각지의 산업시설들이 용도를 바꾸어 가며 어떻게 적응되어 갔나를 살핀 ‘산업유산 재활용 소개서’이다. 건축은 시대의 거울이라고도 하며 생활을 담는 그릇이라고도 한다. 각 시대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던 공장, 발전소, 철도시설, 도축장, 탄광촌 같은 ‘구시대 산물’들이 한때는 도시의 재개발로 인해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가 뜻 있는 사람들의 노력과 협력으로 생생한 생명력을 지닌 생활시설물로 거듭나는 과정을 조사하여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이 책에서 알려 주고 있는 사례들은, ‘테이트 모던’의 영향으로 우리도 공업화 시기의 산업유산 재활용에 눈을 뜨기는 하였으나 용도변환의 범주를 ‘문화시설’로만 한정시키고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 ‘생활공간’으로 바꾸는 ‘사고의 전환’이 가능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을 갖게 한다. 도시공원으로 바뀐 철로부지, 새로운 공동주거지가 된 가스저장소, 호텔이 된 감옥... 우리의 상상력 너머 펼쳐지는 여러 가지 세상을 보면서 우리도 이제는 ‘땅 장사’에 목매는 경제구조를 하루 빨리 깨고 자본의 건전성, 건강함을 추구하며 옛것 지우기보다는 지키면서 새 생명을 불어 넣는 일에 대하여 좀 더 공부하고 시도해야 할 시점에 들어섰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게 되려면 폐 탄광촌에 카지노를 만들어 전 국민을 상대로 사행심을 조장하거나 정신질환에 걸릴 단초를 제공하기 보다는 건전하고 건강한 일상적 삶을 기를 수 있는 상상력과 창조력, 그리고 사회적 욕망의 제어가 작동할 수 있도록 공동체가 목표를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이 책은 이러한 욕구가 스물스물 일어나도록 동기를 촉발하기에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들을 통하여 ‘땅의 회복’, ‘각 시대 유산의 공존’, ‘문화의 부흥’, ‘공동체의 부활’, 여기에서 더 나아가 ‘자연의 치유’, ‘생태의 보전’으로 우리 사회가 한 걸음 내디딜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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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내셔널트러스트 29호 [내셔널트러스트가 만난 사람]- 승효상 | 이로재 건축사무소 대표

터무니있는 공간을 꿈꾸는 건축가

진행 : 이은희서울여자대학교 교수, 내셔널트러스트 편집위원장

장소 : 이로재 건축사무소

인터뷰 날짜 : 2013. 11. 19


승효상 건축가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 빈 공과대학에서 수학하고, 김수근 문하를 거쳐 1989년 자신의 건축사무소인 "이로재"에서  '빈자의 미학'을 건축 철학으로 삼아 활동하고 있습니다. 파주출판도시 코디네이터, 2011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총감독 등을 역임하는 등 명실공히 대한민국의 대표 건축가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존재를 공간에서 이어가고 사람 간의 소통을 실현하기 위한 그의 철학을 "내셔널트러스트가 만난 사람"에서 들어봅니다.  


(이은희)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의 방향과 승효상 선생님이 추구하시는 건축의 취지가 같은 방향을 보고 있지 않나 생각하여 오늘 이 자리가 무척이나 뜻 깊습니다. 오늘 인터뷰 덕분에 승효상 선생님의 건축사무소인 ‘이로재(履露齋)’에 오게 되었는데, ‘이로재’의 뜻은 무엇인가요?

(승효상) ‘이로재’는 제 사무소 이름이기도 하지만, 원래 중국 소학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옛 중국 선비가 아버지가 아침에 밖에 나오시다 감기 들까봐 윗옷을 준비했다가 건네 드렸다고 하는 이야기인데요, 일찍 아버지 처소까지 나서자니 이슬 맺힌 길을 걷게 된다 하여, 밟을‘이(履)’자, 이슬‘로(露)’자, 즉 이슬을 밟는 집이란 뜻이거든요. 효성이 가득한 가난한 선비가 사는 집을 뜻하기도 하고요. 

원래 사무소 이름은 다른 이름이었는데 이로재로 짓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유홍준 교수의 집<수졸당>을 제가 설계 하였는데, ‘나의문화유산답사기’ 명저를 출간하기 전에 아버지의 퇴직금으로 집을 짓게 되었는데, 영남대학교 가난한 학자 시절이었기 때문에 대신 200년 된 현판을 저에게 주었어요. 그게 ‘이로재’ 현판인데 이름이 하도 좋아서 사무실 이름을 바꿨죠. 우리 직원들이 하는 얘기가 아침 이슬 밟는 이는 도둑놈하고 설계사무소 직원 밖에 없다고 하더군요(웃음). 


재밌는 이야기네요. 건축을 전공하게 된 계기라도 있으셨는지요?

(승효상) 원래는 신학을 하려했습니다. 신에 대해 연구하고 싶었는데, 가난 때문에 부모님이 반대하셨어요. 그 외엔 생각을 안 해 봤는데 누님이 건축을 하라 권유하셔서 건축을 하게 됐죠. 건축이 제 적성에 너무 맞고 제 가치관과도 잘 맞아서 지금도 누님께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건축사무소 공간에서 김수근 선생님과 십 수 년 간 같이 계셨는데,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승효상) 저는 71학번이기 때문에 유신으로 노상 데모, 휴교를 해서 학교 수업에 재미를 못 느껴서 혼자 독학 하다시피 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수업시간에 그래도 좋아했던 은사께서 김수근 선생님께 가라고 강권하셨고 특별히 저에게 얘기하시는 게 감격스러워서 가게 되었죠. 74년도에 갔고요. 김수근 선생님 돌아가신 후에도 3년도 있었으니 15년 동안 있었던 거죠. 


김수근의 건축은 승효상 선생님에게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겠지만, 그래도 김수근 건축 vs 승효상 건축 차이점이 있다면?

(승효상) 건축을 만드는 데에 세 가지 요소가 있는데, 첫 번째는 장소, 두 번째는 건축이 가지고 있는 합목적성, 세 번째가 시대에 대한 가치 때문에 달라지는 겁니다. 김수근 선생님과 제가 다른 것은 장소와 합목적성은 같더라도 세 번째 요소인 시대가 다른 것이죠. 시대에 따라 환경과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저의 생각과 시대관, 제 개인적인 인생관 등이 건축을 다르게 만드는 거죠. 김수근 선생님은 건축의 내적 문제에 충실하셔서 건축 고유의 본질적인 면에 집중하셨고, 저는 사회 부조리에 관심이 많아서 건축을 통해서 사회에 내보이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는 것이 다르기는 합니다. 

 


‘정주하지 못하면 존재하지 못한다’ 는 하이데거의 말를 인용하신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삶을 유목민적이다.’라고도 표현하셨는데요, 요즘처럼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고 흩어진 삶을 사는 현대인에게 어떤 건축이 필요할까요?

(승효상) 현대에 들어 정보화시대가 되면서 인터넷 환경, 스마트환경이 생활에 밀접해지고 개인의 가상현실을 구축해가고 있고 그에 대한 범죄와 문제점이 많지 않습니까? 온라인의 시대는 개인을 폐쇄적 인간으로 집어넣는 겁니다. 이걸 깨고 오프라인에서 같이 만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건축이 이런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건축에서 중요한 기능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거든요. 더불어서 다소 불편한 건축은 사람을 궁리하게 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을 만나게 만듭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회적인 건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자가 떨어져 사는 게 아니라, 다른 계층끼리도 함께 살 수 있는 건축이 사회적 건축인데, 이런 것을 실현시키는 데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국은 장소성을 무척 중요하게 여기지만 우리나라는 그런 의식이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의 서촌 같은 곳도 공동체를 이루며 시간의 역사와 지혜가 켜켜이 쌓인 공간이라 생각합니다만, 이곳도 개발 위협에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도 올해, ‘서촌 트러스트’를 발표하며 서촌의 소중한 유산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활동을 해 나갈 예정입니다. 이런 공간이 미래를 위해 지켜지기 위한 방안은 무엇일까요?

(승효상) 유네스코나 이코모스총회, 유럽의회 헌장에서 역사마을 보존 위한 권고를 보면 네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지형을 보존하고, 길을 보존하고, 필지의 형태를 보존하고, 생활방식을 보존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네 가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지형, 길, 필지, 생활방식만 보존하면 다시 말하자면, 공간 구조가 삶을 유지시킬 수 있다는 겁니다. 공간을 보존해 나간다면 서촌 뿐만 아니라 어디든 보존할 수 있다고 보고요. 

실제로 지금 중계본동에 있는 백사마을이라는 달동네를 보존하려 하는데, 종례계획은 기존 공간을 다 허물고 아파트를 새로 짓는 것이었어요. 제가 설득해서 보존해갈 수 있는 방안을 서울시와 협의하고 진행 중입니다. 이것이 제 의도대로 잘 진행되면 기존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마을 풍경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우리말에 터무니란 말이 있거든요. 터에 새겨진 무늬를 이야기는 말이거든요. 선조들의 존재 방식이 터에 있다는 겁니다. 하이데거가 우리 존재는 장소에 있다고 말하였지만, 우리 선조들은 이미 그 전에 우리 존재가 터에 있다고 알고 있었던 겁니다. 터무니를 보존하고 새로운 무늬를 덧대는 것, 그것으로써 터무니 있는 삶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는 거죠. 


독일의 경우를 보면 통독이후 미군이나 프랑스군들이 철수한 주둔지에 주거단지등이 들어올 때 그 터를 어느정도 보존하고 계획한 것 들을 볼수 있습니다. 용산국가 공원설계에도 터무늬를 일고 해석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의도가 담겨있었군요.

공간사옥이 경매에 나왔습니다. 이에 몇일 전(2013. 11. 18.)에는 이 건축물을 보존하기 위해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뭉쳐 다양한 보전 방안을 제시하고,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한 기사를 접했습니다.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소개 부탁드립니다.

(승효상) 저의 20,30대를 공간에서 보냈으니까요. 제 청년기의 인성을 거기서 형성했으니 잊을 수 없지요. 

보존을 위해 세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첫째는 박물관으로 만들어 영구적으로 보존할 수 있게 해 달라. 두번째는 문화재로 지정해 달라 요구했고요. 세 번째는 공간을 거쳐 간 사람들과 이 곳을 사랑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힘을 모아서 트러스트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최순우 선생님의 미학이 담겨 있는 ‘최순우 옛집’ 등도 내셔널트러스트운동으로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시민들의 힘을 모아 자연과 문화유산을 보전하는 ‘내셔널트러스트운동’ 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승효상) 건축과 공간의 보전은 과거의 기억을 보는 중요한 장치입니다. 우리처럼 쉽게 짓고 쉽게 허무는 기억상실증이 걸릴 수 있는 상태를 치유하는 게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과거를 기억 못하면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고 봅니다. 내셔널트러스트처럼 천연한 활동에 대해 경외하고 있습니다. 힘 닿는데까지 도울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과거의 시간을 품고 미래세대를 위해 현재의 가치를 보전해가는 내셔널트러스트의 활동에 승효상 선생님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오늘 시간 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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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내셔널트러스트 29호 [내셔널트러스트 여행]- 장봉도 풀등

풀등, 전설이 아닌 신비의 섬이길

글: 장정구 / 인천녹색연합 사무처장


서만도에서 바라본 풀등과 강화마니산


 백두대간, 비무장지대, 서해안갯벌,,,,,이들은 한반도의 3대 생태축이다. 인천경기만은 3대 생태축 중 서해안갯벌과 비무장지대(또는 북방한계선)이 만나는 곳으로 한반도 최고의 자연생태계보고이다. 한강, 임진강, 예성강 하구에 위치한 인천경기만은 평균조차가 9미터에 이르러 다양한 갯벌이 잘 발달했다. 특히 장구한 세월 백두대간에서 한강 임진강 예성강을 따라 흘러온 강물과 모래들은 파랑과 조석을 만나 인천경기만에 초대형 연안사주(Sand-shoal) 3개를 만들었다. 영종도에서부터 덕적군도와 이작도로 이어지는 사주, 강화도에서 장봉도를 거쳐 뻗어있는 사주, 그리고 볼음도와 주문도에서 우도로 이어지는 사주가 바로 그들이다. 이 연안사주들은 매우 역동적이고 생물다양성과 생산성이 매우 뛰어나 유례(類例)를 찾기 어려운 세계적 자연유산이다. 그 연안사주를 대표하는 것이 장봉도 ‘풀등’이다. 풀등의 ‘풀’은 모래를, ‘등’은 언덕을 의미한다. 즉 풀등은 바다한가운데의 모래언덕으로 하루 두 번 썰물에 드러났다가 밀물에 잠기는 모래섬이다.


서만도 괭이갈매기집단번식지_여름철 서만도에서 우비와 우산이 필수품이다

장봉도 갯벌,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다 

 장봉도는 인천국제공항이 있는 영종도의 북쪽에 위치한 섬으로 해양수산부는 2003년 12월장봉도 주변 갯벌을 ‘국제적인 보호 조류들이 도래·서식하고 지형·지질학적 가치가 우수하고 생물다양성이 뛰어나’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하였다.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이 실질적으로 바다와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여 역동적인 퇴적상과 지형적 다양성을 보유하고 있다. 실제 해양수산부 조사에 의하면 장봉도 갯벌은 람사르 등록지역인 순천이나 보성갯벌보다도 해안선이 잘 보전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날가지도, 아염과 사염, 동만도와 서만도,,,,,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습지보호지역인 장봉도 갯벌은 풀등뿐 아니라 여러 개의 무인도를 품고 있다. 그 중에서도 풀등이 지척인 서만도와 동만도는 새들의 천국이다. 1만마리가 넘는 괭이갈매기가 집단으로 번식하고 멸종위기1급 노랑부리백로도 매년 200쌍 이상 둥지를 튼다. 괭이갈매기와 노랑부리백로 번식지로는 우리나라 최대번식지 중 한 곳이다. 이 외에도 멸종위기1급의 저어새와 매, 물수리 등 멸종위기2급 4종, 환경부 특정종 가마우지와 중대백로도 서·동만도에서 집단번식하고 있다. 


장봉도풀등의 범게

풀등, 많은 이웃생명들의 보육장이다

 새들이 번식지를 선택할 때 최우선 고려하는 것이 먹이인데 풀등을 품고 있는 장봉도 갯벌은 새들에게 우리나라 최고의 먹이터인 셈이다. 실제 해수부 조사결과에 의하면 장봉도 갯벌에 조류 40여종을 제외하고도 대형저서동물만 213종과 819개체/㎡로 다양성과 생물총량이 매우 우수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특히 풀등은 꽃게 등 주요 수산자원의 산란장이고 범게, 백합 등 우리나라 고유 해양생물의 서식지로 가치가 매우 크다. 범게는 등과 다리의 선명한 호랑이 무늬가 특징인데 풀등을 대표하는 해양생물이며 우리나라 고유종이다. 조개 중 단연 으뜸인 백합은 새만금방조제건설이후 장봉도와 주문도 사이 풀등이 우리나라 최대의 생산지가 되었다. 만도(서만도와 동만도)에서 태어난 아기 새들은 풀등에서 비행을 연습하며 처음 먹이를 잡는다. 또한 만도리어장은 새우와 꽃게, 주꾸미와 병어의 황금어장으로 어민들의 삶터이다.


장봉도 풀등위 백함잡이 그레질

풀등, 돈벌이대상이 아닌 자연유산이다

 풀등은 순탄하지 않는 이력을 가지고 있다. 1990년대 산업자원부가 풀등을 포함한 연안사주에 광업권을 설정하면서 논란이 시작되었다. 광업권자와 지역주민, 행정기관 간의 모래채취 논란은 2003년 해양수산부의 습지보호지역지정과 광업권자의 습지보호지역취소소송 등 수년간 지속되었다. 바다모래채취를 반대하고 습지보호지역을 찬성하는 지역주민들의 의견에 힘입어 재판부가 해양수산부의 손을 들어줬지만 보호지역 바로 옆에선 여전히 모래채취가 시도되고 있다. 광업권자는 모래에 포함된 티탄철과 금 등 희소광물을 채굴할 계획이라 주장했지만 조사결과 희소광물 함유량이 낮아 경제성이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희소광물보다는 골재용 바다모래에 눈독을 들였던 것이다.  


풀등은조석과파랑의의해 역동적인광경을연출한다

풀등, 아물지 않은 상처를 품고 있다

 모래채취 논란이 일단락되자 이번에는 해양수산부(당시 국토해양부)가 조력발전소건설계획을 발표하였다. 본인들이 지정한 습지보호지역을 축소·해제해서 조력발전소를 만들겠다고 나선 것이다. 주민들이 해양생태계파괴 등을 이유로 반발하자 방조제가 건설되면 육지와 직접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해지고 지가상승 등 섬경제도 활성화될 것이라 주민들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인천시와 학계, 환경단체의 반대, 특히 영종도공항건설에서 이미 대규모 개발의 문제점을 경험했던 주민들의 우려를 해소하지 못하면서 결국 조력발전계획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언제든지 다시 불거질지도 모를 일이다. 헌데 풀등과 주민들에겐 해묵은 근심거리가 또 있다. 영종도공항건설 당시 60세이상 어르신들이 받은 맨손어업 보상금을 공항공사에 돌려줘야 하는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지금도 갯벌에선 조개캐고 낙지잡는 70, 80세 어르신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르신들은 법으로부터 노동력을 인정받지 못했고 국책사업으로 인한 삶의 변화만을 강요당했다. 적지 않은 분들이 가슴의 상처를 안고  돌아가셨고 변화의 소용돌이를 이기기 못한 생명들도 풀등을 떠나야 했다.  


풀등은조석과파랑의의해 역동적인광경을연출한다


 6월 장봉도 풀등에 나가보면 한참 비행연습 중인 어린 노랑부리백로들을 만날 수 있다. 또 인근 갯벌에선 아기 저어새들의 힘찬 부리질을 감상할 수 있다. 새만금에선 자취를 감춰버린 백합잡이 그레질을 장봉도의 풀등에선 볼 수 있다. 세계자연보호연맹(IUCN) 적색목록의 새들을 쉽게 만나고 그레질하는 어르신을 만날 수 있는 것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만의 행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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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국내셔널트러스트 한국내셔널트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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